<긴급특별기획①>파란만장 DJ ‘인동초 삶’ 풀스토리

모진 겨울 이겨내고 평화의 꽃 활짝 피웠다



인생을 바꾼 ‘부산정치파동’, 3전4기 정치 입문기
가택연금, 사형선고, 망명 속에 키운 민주화의 등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거했다. 1924년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정치인이 됐고, 군사정부의 반대편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두 번의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꺾지 않았으며 1997년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민족이 손을 맞잡았던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의 영광도 있었지만 이후로도 시련은 그를 따라다녔다.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했던 삶 속에서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가 남긴 발자취는 거대한 족적으로 남았다.

지난 18일 오후 1시43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큰 별이 졌다.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건강 악화로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85년간의 삶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시련 속의 정치 도전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

DJ의 85년 삶 중 50여 년은 정치인생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으며 굵직한 민주화 사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사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정치에 뜻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DJ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그의 호 ‘후광’도 고향 마을의 지명과 같다.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926년 1월6일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그보다 2년 앞선 1924년으로 알려져 있다.

DJ는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목포상선에 취업했다.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이며 승승장구했고 해방이 되자 이곳의 재산관리인, 대표가 됐다.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로 불리는 와중에 목포상고 동기생의 소개로 첫 부인 차용애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1954년 ‘부산정치파동’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 대혼란이 벌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DJ는 “6·25를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자 몽양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탈퇴했는데 이 경력은 오랜 세월 그를 색깔론에 시달리게 했다.

정치권으로의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고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세 번 연속 국회의원 선거 낙선은 첫 부인인 차용애씨와의 사별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낳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의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부터다. 3전4기 끝에 처음으로 금배지를 손에 쥔 것. 하지만 당선 3일 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DJ는 다시 도전했고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1964년 4월20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 표결을 방해하기 위해 5시간19분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며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8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며 정치력을 쌓아갔다.

1970년 9월29일은 DJ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역전승을 거두며 당시 제1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날이기 때문이다. DJ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펼쳤고, 90만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한 매서운 공세였다.

그리고 이후 그의 삶에는 ‘시련’이라는 글자가 깊게 새겨졌다. 1971년 대선 패배 이후 정치 스타가 아닌 민주화의 상징이 되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투옥, 10년간 55회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상당 기간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대선 다음 해인 1972년 신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던 DJ는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도쿄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첫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국민투표 무효 선언을 하는 등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이어나갔다.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중앙정보부가 움직였다. 1973년 8월 DJ를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한 후 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키려고 한 것. 미국과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납치 5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석방과 연금이 계속됐고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연금해제 및 사면복권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기만 했다.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석방과 연금, 사형선고
죽음 문턱서 핀 ‘인동초’

DJ는 조작된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유언이기도 했던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최후진술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불렀고 사형에서 무기로,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그는 1982년 12월 석방된 직후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에 있던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계속했다. 굴곡진 정치 인생 속 민주화의 향해 나아간 그를 향해 사람들은 ‘인동초’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얇은 잎 몇 장으로 시린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우는 그 모습이 DJ의 삶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DJ는 귀국을 감행했다. 귀국과 함께 잡힐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도 뿌리쳤다. DJ는 귀국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또 다시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그러나 2·12 총선의 ‘신민당 돌풍’을 발판으로 3월에 YS와 나란히 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이끌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DJ의 대권도전은 3전4기였다. 1971년 첫 대선 도전 이후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36년간의 도전은 결국 꽃을 피웠다.

정권교체의 기회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첫 대선인 13대 대선에서 찾아왔다. YS와 후보단일화를 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진영의 간절한 바람에도 단일화는 실패했고 DJ는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 민주화 동지였던 YS와 척을 지게 됐다. 또한 야권의 분열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승리로 이어졌다.

3전4기 대권도전
평화적 정권교체 이뤄

DJ는 1992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삼당합당’을 앞세운 YS에게 패배했다. DJ는 즉각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의 정치인생에 마침표가 찍히는 듯했지만 1993년 7월 귀국한 DJ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을 벌이다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19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40년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종말을 고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던 그의 약속은 깨졌고 이는 줄곧 그를 괴롭혔다.

1997년 마지막 대권도전은 ‘대선 필패론’ ‘색깔론’ 등 반DJ 정서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DJP연합을 이루면서 ‘준비된 대통령’을 원하던 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선택의 통해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는 했지만 국민의 정부가 맞은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IMF 외환위기는 그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금 모으기 운동’으로 IMF 자금 상황기간을 2년 가까이 단축, 위기를 극복했다.

2000년에는 광복 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그는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들고 북한으로 향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 공동선언문을 채택, 발표했다.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대북송금의혹과 측근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불행한 임기 말을 보내야 했다. 두 아들의 권력형 부정부패와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옷로비’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DJ가 “가장 기뻤던 일은 IMF를 1년 반 만에 극복한 것이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옷로비 사건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퇴임 후엔 참여정부의 시작과 함께 몰아친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 흠집이 갔고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2005년에는 불법 도·감청 사건 수사로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DJ는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국가 원로로서 인권과 통일, 민족 문제 해결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은 건재했고 ‘현실정치 참여 논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최대 관심은 언제나 ‘통일’이었다. 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특사 파견 등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거듭 강조했으며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조언하기도 했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연설문도 대북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것이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한 DJ는 휠체어를 탄 채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쏟았다.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했다.

현실정치와 거리두기
‘햇볕정책’ 실패론 마음고생

때문에 그가 생전에 남긴 연설문과 발언은 사실상 유언이 되고 말았다. 지난 7월3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추천사 중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라는 말이 긴 울림을 갖는 이유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