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서울 최대 슬럼가' 가리봉 가보니…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11 10:43:46
  • 댓글 0개

해만 지면 주폭 조선족 ‘어슬렁어슬렁’

[일요시사=사회팀]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은 한국 안의 작은 중국이라 불린다. 그만큼 많은 중국인과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자치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거리가 가리봉동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금은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가리봉동의 곳곳을 둘러봤다.




가리봉동은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과 독산동, 경기 안산 원곡동 등과 함께 조선족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구로공단 자리 사이에 자리 잡은 가리봉동은 과거 1964년 수출무역단지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청년들이 먼저 터를 잡은 곳이다. 이후 90년대 접어들어 구로공단 내 업체들이 생산시설을 이전하면서 한국 노동자들이 자연스레 빠져나갔다. 그리고 92년에 맺은 한·중 수교로 인해 조선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도 빽빽이 붙어있는 쪽방에서 생활하며 실낱같은 꿈을 꾸고 있다.

옹기종기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

지난 5일,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유명한 가리봉동의 민낯을 확인하고자 서울 지하철 7호선에 올랐다. 가리봉동과 가까운 남구로역은 지하철역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북한말 같은 조선족들의 대화소리와 이해 못할 중국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중국 본토로 착각할 정도였다.

기자는 남구로역 3번 출구를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나와 가리봉종합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삼거리부터 공단 오거리까지 300m에 걸쳐서 이른바 ‘조선족거리’ 혹은 ‘연변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시장으로 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다양한 일자리가 덕지덕지 게시돼 있는 직업소개소였다. 조선인을 모집하는 구인광고가 부착돼 있었다. 주로 업종과 지역, 구인자의 성별·나이·비자, 급여, 숙식 제공 여부 등이 요약돼 있었다. 용접, 가정부, 간병, 전자제품 조립, 벽돌 제조, 타이어 분쇄, 비닐 세척 등이었다. 월급은 대개 150만원 안팎이었다. 소개소에는 보통 하루에 30∼40명 정도가 찾아온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재외동포 체류자격(F-4)을 얻기 위해 제조업과 농축산업 분야를 선호한다. 사실상 무기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개소 옆에는 쭈글쭈글하게 널린 빨간 수건들이 있었다. 미용실 수건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미용실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주변에 스치는 사람들은 인상이 강했다.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들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에서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행과 먼 옷차림 때문이었다. 기자의 넥타이가 어색할 정도였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체감 없이 하얗게 분칠한 여자의 얼굴, 남자의 짧은 머리칼과 단단하게 솟은 광대뼈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장으로 내려가는 길 상가에는 작은 여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허름한 간판과 계단을 보니 여관의 연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부가 궁금해서 안에 들어가 여관 계단에 올랐다. 그런데 허름한 옷차림의 남성 3명이 계단 위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기자에게 한 남성이 말을 걸었다. “여기는 왜 올라왔어?” 말투를 보니 조선족임이 틀림없었다. 기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가리봉동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한 뒤 계단에서 내려왔다. 왠지 모를 오싹함이 온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여관 건물을 나와 다시 시장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시장 진입로에는 낯선 건물이 있었다. 알고 보니 경찰청 마크가 붙어있는 서울구로경찰서 가리봉파출소의 방범 제1초소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주폭 척결 모두 함께 나섭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순간 최전방에서 경계 근무를 했던 군 시절이 떠올랐다. 시장에 초소가 있다니,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만큼 위험지역이라는 것.

과거와 미래 공존…신 차이나타운 형성
어두컴컴한 골목 끼고 벌집촌 덕지덕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에 찾아갔지만 거리에는 기동순찰 중인 경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제1초소 기준으로 좌측에는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있었다. 이 신문사 앞에서 가방을 메고 있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주변 상인에게 물어보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함이라고.

무채색 상하의에 운동화나 등산화 차림은 여느 일용직 노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은 작업복과 세면도구로 부풀어 있었다.

이들을 지나 시장 진입로에 들어섰다. 80∼90% 정도가 중국어 간판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색 간판이 마치 연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생소한 중국식 메뉴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길거리 음식을 보니 확실히 중국인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꽈배기도 팔뚝만한 크기였다.


길 양쪽으로 ‘연길명태어옥’ ‘동북삼성반점’ ‘두만강식당’ ‘도문반점’ ‘압록강반점’ ‘아리랑분식’ ‘아리랑커피숍’ 등 조선족들의 고향인 중국 연변의 지명을 딴 음식점들의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주변 상가 건물에는 ‘중국 노래방’ ‘상해 노래방’ 등 대략 스무 곳의 노래방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방 주변에는 한낮에도 구수한 조선족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곳은 중국어 문화권’이라고 알리는 것 같았다.

중국 냄새나는 시장골목을 쭈욱 걷다 보면 골목 입구에 ‘가리봉종합시장, 동포타운, 어서 오십시오’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동포’라는 표현에서 이곳의 성격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시장 내부에는 중국어로 표기된 식품들이 있었지만 여타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이 지역에는 모두 137개의 중국관련 상업시설이 분포하고 있다. 현황을 보면 음식점이 50개로 가장 많았고 노래방 17개, 식료품점 16개, 주점 및 다방 12개, 여행사 10개, 직업소개소 8개, 의류잡화점 10개, 환전소 2개 등 다양한 업종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 지원센터, 교회, 신문사 등 다수의 관련 시설이 입지해 있다. 이 시설들은 한국계 중국인들이 음식료품 구입, 유흥, 취업, 쇼핑 등 다양한 문화·생활서비스를 공급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되고 있다.

조선족 이동 따라
슬럼화된 가리봉

시장을 둘러본 뒤 시장과 연결된 골목길로 향했다. 이렇게 따라 올라가니 그 유명한 ‘가리봉 벌집촌’이 나오는 언덕길이 나왔다. 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이곳, 매우 좁아 보였지만 이들의 보금자리라고. 그런데 아직도 욕실이 없는 방이 있다. 여전히 공동화장실을 쓰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생활이 불편한 건 여전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 내외의 저렴한 방값에 조선족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 이들의 문화는 벌집촌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지역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주로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벌집’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80년대 후반 산업구조조정으로 구로공단 내 많은 업체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자 가리봉동은 남아 있던 벌집을 중심으로 극빈층이 유입됐다. 이후 90년대 말부터 조선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조선족의 밀집거주지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낮은 임대료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기존에 가리봉동에 형성되었던 건설관련 일용직의 인력시장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도 한몫했다.

주택가는 비교적 한산했다. 낮이라 대부분이 일하러 나간 탓인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그저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여인들의 모습이 속속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방 있음’ ‘개조심’ 문구를 지나쳐 다른 골목길로 발길을 옮겼다. 어떤 골목길에는 ‘구로구민이 뽑은 행복한 골목길’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골목길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부적합해 보였다. 버려진 쓰레기와 가구 등으로 가득했기 때문. 표지판 옆에는 ‘보증금 100, 월세 25만원 016-751-****’ 등 각종 찌라시도 부착돼 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골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는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건장한 청년도 앞만 보고 걷기에는 무리가 있는 지역이다.

골목길 접어들면
등골 오싹

다소 위험해 보이는 골목길 곳곳을 촬영하던 도중 한 노인이 다가왔다. “뭐 정보 얻으러 왔어?”라고 말했다. 마치 취재 중이라는 걸 눈치챈 듯 보였다. 조선족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둘러보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내가 여기 살면서 자식들 대학까지 보냈다고. 동네는 이래도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어. 근데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하면서 이 동네에 살았던 게 부끄럽다고 하는 거야. 어렸을 땐 그런 말 안했는데 이제 머리가 큰 거지….”

‘가리봉’이라는 촌스러운 지명과 조선족의 동네라는 인식 때문에 자식들에게 불평불만을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가리봉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노인과 대화를 마치고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나왔다. 남부순환로 105길을 경계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가산디지털단지 패션아울렛이 보인다. 수백 미터 차이로 20세기와 21세기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가리봉동에서 가산디지털단지를 바라보니 마치 과거에서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가리봉동은 많이 낙후돼 있다. 때문에 우범지역이 생각보다 많다. 거리 하나하나가 범죄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영화촬영도 많이 한다고. 그리고 흔히 여성들에게 ‘밤 길 조심하라’고 하는데 가리봉동은 정말 주의가 필요하다. 남성과 동행 없이는 진입하기 어려운 길들이 있다.

구로공단과 함께 원주민 이전
빈자리에 조선족들 삼삼오오
수십년째 멈춰 있는 시계태엽

‘가리봉’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과, 어원이 ‘고을’과 같은 의미인 ‘갈’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인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조선 말기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가리산리였다. 이후 가리봉리로 바뀌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의 ‘가’ 자와 독산동의 ‘산’을 따서 가산동이라고 하였다. 75년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나뉘었고, 80년 구로구 신설로 편입됐다. 가리봉동의 북쪽과 동쪽은 구로동과 접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과거 60만평 규모로 조성된 구로공단은 국내 공업단지 제1호였다. 7∼80년대 ‘한강의 기적’도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섬유나 봉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을 주로 생산하다 보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가리가 빠졌다. 결국 구로공단이 해체되면서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선족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연변타운’을 형성했다. 이렇게 되다 보니 가리봉동은 자연스레 중국동포들의 모임 장소로 기능했다.


여전한 ‘벌집촌’
여기서 어떻게…

이들이 본격적으로 가리봉동에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2002년부터다. 정부가 자진 신고하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6개월∼1년의 출국준비 기간을 부여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사실상 미등록 외국인노동자에게 희망의 씨앗이었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을 준 것으로 이해돼 음지에 숨었던 조선적으로 양지로 나오게 됐다. 늘어난 조선족 때문에 한국인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중국인을 무시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쓰레기 무단 투기 등 기본 질서를 해치는 조선족들의 습관이 충돌하면서 양측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조선족 집결지의 대명사였던 가리봉동은 최근 들어 그 이름이 바래지고 있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돈을 벌어 주거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은 이곳 가리봉동을 떠나 대림, 신대방, 신림, 낙성대, 건대입구 등 지하철 2호선 주변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이러한 조선족의 인구 유동에는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재개발된다는 소식도 한몫했다.

가리봉동 앞 남부순환로 건너편으로 가산디지털 3단지, 동쪽으로는 구로디지털 1단지가 들어서 옛 구로공단 지역은 이미 IT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반면 가리봉동은 여전히 슬럼지역 딱지를 떼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아있다. 동시대지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가리봉동은 2003년 균형발전촉진지구, 2008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개보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물리적 쇠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발 사업이 지연되면서 임대용 방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탈법적인 수선도 진행 중이다. 특별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주류 사회와의 단절 양상은 뚜렷하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코로나19 종식과 비상계엄,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조기 대선을 치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대 대선과 21대 대선 모두 운명의 길목서 치러진 셈이다.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정치권도 큰 영향을 받았다. 코로나19 정국과 내란 정국서 대선을 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는 지난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3년 전, 20대 대선이 치러지던 2022년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코로나19 시기였던 점을 감안해 소상공인 정책과 경제 재건에 초점을 맞췄다. 민주당의 1호 공약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완전 극복’과 ‘피해 소상공인에 대한 완전한 지원’이었다. 경제 대통령 앞세웠지만… 이 외에도 ▲오미크론 등 변이종 확산 대응 강화 ▲백신 및 치료제 확보 ▲의료보건체제 구축에 대한 충분한 재정 투입 ▲필수예방접종의약품 자급화 실현을 위한 국가지원체제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이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이하 선대위)는 ‘유능한 경제 대통령’에 초점을 맞춰 5대 비전으로 ▲신경제 ▲공정 성장 ▲민생 안정 ▲민주사회 ▲평화·안보 등을 제시했다. 10대 공약으로는 수출 1조달러를 비롯한 311만호 주택 공급, 문화 강국 실현 같은 경제 중심의 공약을 제시했다. 차기 정부의 큰 틀이 되는 10대 공약을 살펴보면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두루 담겼지만,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이 후보의 상징과도 같은 ‘기본 시리즈’ 정책이었다. 기본소득부터 기본주택, 기본금융을 합친 것으로 이 후보의 숨은 1호 공약이란 평도 나왔다. 기본 시리즈는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동시에 주거와 금융 면에서 보편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공약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약으로는 ‘청년 125만원’ ‘전 국민 25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꼽을 수 있었다. 기본소득은 이 후보가 경기도지사이던 때부터 추진하던 정책이다. 2021년 7월 경선 후보 2차 정책 발표 기자회견서 이 후보는 “대전환의 위기 시대에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대대적 정부 역할도 중요한 성장 수단이지만, 세계 최저 수준인 국가의 가계소득 지원과 가계소비를 늘리는 것도 경제 성장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차기 정부 임기 내에 청년에게는 연 200만원, 그 외 전 국민에게 100만원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아울러 “지역 골목경제 활성화와 매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소멸성 지역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현금과 달리 경제 활성화 효과가 극대화된다”며 “기본소득은 어렵지 않다. 작년 1차 재난지원금이 가구별 아닌 개인별로 균등하게 지급되고 연 1회든 월 1회든 정기 지급된다면 그게 바로 기본소득”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비상계엄 정신없이 도는 정치판 “전 국민 25만원 지원” 3년 사이 변화는?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이 과거 보수 정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주장하던 ‘경제 민주화’와 닮았다고 봤다. 그러나 이 후보의 기본소득은 재원 확충 방안 등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민주당은 재원 마련 방안으로 재정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국토보유세와 탄소세 도입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코로나19 지원금으로 나라 곳간이 텅 비었다”며 ‘포퓰리즘’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전 국민에게 25만원을 지원하는 방안은 20대 대선 이후에도 이 후보가 꾸준히 밀던 정책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등 지원, 분배 방식 등에 변화가 생겼지만 이 후보는 지난해 윤 전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서 “민생회복 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며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보수 진영의 비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은 아이러니하게도 2012년 대선서 보수 정당 박근혜 후보가 주장했다.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한다는 공약은 박빙의 대선서 박 후보 승리 요인 중 하나였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후보는 대선 정국이 시작됨과 동시에 1호 공약으로 “AI 인공지능 3강 도약”을 외쳤다. 경제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AI 대전환 시대를 위한 산업 육성을 약속했다.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를 5만개 이상 확보하고 한국형 챗GPT를 국민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국가 비전으로는 K-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국내 AI 기술 등에 방점을 찍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고 경제 성장 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취지다. 이 후보는 K-이니셔티브를 지역별로 쪼개 맞춤형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기 동탄서는 K-반도체를, 대전서는 K-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냈고 전북 전주서는 K-컬처를 겨냥해 국악인과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후보의 21대 대선 공약은 ‘K’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난 대선서 기본소득 같은 ‘이재명표 공약’을 앞세웠다면 이번에는 12·3 내란 사태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지원금 어디로? 공약 발굴 과정 역시 K-이니셔티브를 앞세웠다. 후보 직속인 K-문화강국위원회는 문화 강국 실현을 위한 공약을, K-경제성장위원회는 맞춤형 의제를 설정하는 데 주력할 전망이다. 선대위 산하에는 K-민주주의·평화위원회를 설치해 ‘빛의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을 꾸렸다. 서울·인천·경기를 겨냥한 K-수도권 비전을 발표하며 “서울을 뉴욕에 버금가는 글로벌 경제 수도로, 인천을 물류와 바이오산업 등 K-경제의 글로벌 관문으로, 반도체와 첨단기술, 평화·경제의 경기로 수도권 K-이니셔티브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기본 시리즈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지난 대선서 기본 시리즈를 앞세운 것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기본 사회’라는 단어로 묶어 포괄적인 복지 정책으로 탈바꿈했다. 이 후보는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 기본 사회로 나아가겠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전담기구인 ‘기본사회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 만연한 사회에 우려를 표하며 “기본 사회는 단편적 복지나 소득 분배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의 주거·의료·돌봄·교육·공공서비스 전반에 대한 실질적 보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사회위원회는 기본 사회 실현을 위한 비전과 정책 목표, 핵심 과제 수립 및 관련 정책 이행을 총괄·조정·평가하게 된다. 아동수당 확대나 청년미래적금,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등 생애주기별 소득 보장 체계를 구축하고 농어촌 기본소득과 햇빛·바람 연금 같은 지역 맞춤형 소득 지원도 점차 확대해갈 예정이다. 개헌에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나 싶더니 선거 막판서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등을 골자로 한 구상을 밝혔다.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빠르게 진행된다면 2026년 지방선거서, 늦어져도 2028년 총선서 국민의 뜻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국민투표법을 개정해 개헌의 발판을 마련하고 국회 개헌특위를 만들어 하나씩 합의하며 순차적으로 개헌을 완성하자”고 말했다. 이후 최종 공약집서 “위기의 민주주의를 개헌으로 지키겠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우클릭? 융통성!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건 경제, 그중에서도 부동산 정책이다. ‘민주당 우클릭’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민주당은 중도우파까지 껴안는 방법을 마련했다. 우선 민주당은 주택 공급은 늘리되 부동산시장에는 최소한으로 개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문재인정부 당시 과도한 세금 규제로 집값이 오르는 등 발생할 각종 부작용과 혼란을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 후보는 ‘경제 유튜브 연합 토크쇼’에 출연해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바꾼 편이다. 집은 주거용이지 투자·투기용은 아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부동산시장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는 만큼 규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택해야지, 억눌러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우클릭, 태세 전환,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장과 경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정책을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부동산 투기를 막으려면 거래세를 줄이고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국토보유세는 전 국민에게 고루 지급하는 기본소득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는 시대는 지났다”며 선을 그었다.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등 부동산의 핵심 세제 역시 큰 틀에서 손대지 않고 현행 체계를 유지할 전망이다. 다만 이 후보뿐만 아니라 모든 대선후보들이 이렇다 할 부동산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어 비교 대상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후보 모두 부동산 정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공약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지난 3년간 일부 노선이 수정된 반면, 이 후보가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공약도 있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여성가족부를 평등가족부나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밝혔는데 이번 역시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기본 소득’ 내리고 ‘K-시리즈’ 올리고 갈라치기 대신 ‘중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이 후보는 사전투표가 진행되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 28일6 자신의 SNS에 ‘성평등가족부 확대 공약 메시지’를 내고 “여성들이 여전히 우리의 사회 많은 영역서 구조적 차별을 겪고 있음에도 윤석열정부는 성평등 정책을 후순위로 미뤘다”고 꼬집었다. 이어 “향후 내각 구성 시 성별과 연령별 균형을 고려해 인재를 고르게 기용하고 성평등 거버넌스 추진 체계도 강화하겠다. 중앙 부처와 지자체의 양성평등정책담당관제도를 확대해 성평등 정책 조정과 협력 기능을 강화하겠다”며 “지자체 내 전담부서를 늘려 성평등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도 약속했다. 대법관 구성과 다양성 및 전문성 강화를 위한 ‘대법관 증원’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대법관 한 명이 맡는 사건의 수가 많아 증원은 불가피하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번 공약집에도 민주당은 상고심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대법관 증원과 전원합의체 변론 공개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만 공약집에는 구체적인 증원 규모를 적시하지 않았다. 앞서 민주당은 대법원이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되자 사법개혁을 예고했다. 이때 민주당이 대법관의 수를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선대위가 해당 법안의 철회를 지시하면서 한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 역시 20대 대선서도 주장했다. 앞서 이 후보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정책을 취하고, 김대중·박정희 정책을 따지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도 이 후보는 국민 통합을 제시하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직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상계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인 만큼 급진적인 변화와 이념 갈라치기보다는 대한민국을 안정 궤도에 되돌리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리미리 착착척척 선대위 소속인 한 민주당 의원은 “조기 대선인 만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선거가 치러졌다. 그동안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국민 의견을 적극 수용해 좋은 공약이 나올 수 있었다”며 “대부분 이 후보 머릿속에 원래 있던 공약들이다. 여기에 지난 3년 동안 각종 위원회서 활동한 의원들의 시너지가 합쳐져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재명 공보물, 분위기도 바뀌었다? 대선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책자형 선거 공보물도 눈에 띈다. 지난 공보물은 ‘경제’ ‘일하는 대통령’ 등 유능함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내란 극복’ ‘빛의 혁명’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자 한 면 전체를 응원봉 시위대 사진으로 채워 이번 조기 대선을 내란 세력 심판 성격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선 출마 영상도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이다.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 후보는 검은 배경의 스튜디오서 파란 넥타이와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출마를 선언했다. 반면 21대 대선 출마 영상서 이 후보는 밝은 분위기의 실내서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등장해 부드러운 면모를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