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좌지우지’ 동양 막후 실세들 대해부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10.22 11:39:23
  • 댓글 0개

사공 많아 배가 산으로 갔다

[일요시사=경제1팀] 대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인물들이 있다. 이른바 숨은 막후 실세들. SK그룹의 김원홍이 그랬듯 이번에 무너진 동양그룹 역시 그룹을 좌지우지했다는 핵심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다. 결국 동양사태는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간 꼴’이라는 분석이다. 그 폐해는 그룹이 해체 위기에 몰리면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5만 여명의 금융소비자에 대해 2조원의 피해를 일으킨 동양 사태. 그룹이 법정관리에 이르기까지의 전말이 숨은 실세들의 부상으로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사건의 초점은 한때 재계순위 5위까지 올랐던 동양그룹이 왜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는지, 동양 사태를 야기한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그룹 쥐고 흔든
이혜경 부회장

우선적으로 ‘동양 사태’는 사위 경영의 한계와 한때 재계에서 ‘내조의 여왕’으로 통했던 이혜경 부회장의 ‘오판’이 원인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 부회장은 동양그룹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의 장녀이자,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그는 동생인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과 달리 30여년간 경영 일선에 나서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과 가정살림에만 전념했다. 대신 검사 출신에 스마트했던 현 회장이 1983년 동양시멘트 대표로 부임한 후 줄곧 그룹 경영의 전반을 담당했다.

순탄하던 이들의 관계는 지분관계가 뒤바뀌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까지는 현 회장이 경영을 맡고 있지만, 지주회사인 ㈜동양의 지분율은 이 부회장과 창업주의 부인인 이남희 서남재단 이사장이 더 높았다.


사위 경영인 역할만 해오던 현 회장이 2000년대 들어 금융 계열사를 인수하기 시작했고, 이 부회장을 제치고 1대 주주에 올라서면서부터 내부 불만이 쌓였다는 것이다.

현 회장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동양그룹 내부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더 이상 이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이 부회장은 2008년 경영일선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화여대에서 생활 미술학을 전공한 경력을 살려 ‘디자인 경영’을 선언, 최고디자인경영자(CDO)로 나섰다. 그룹 내 디자인 업무를 시작으로 계열사의 디자인 관련 업무 역시 모두 이 부회장의 손을 거쳐나갔다.

이 부회장은 특히 2008년 건립된 강원 삼척시 파인밸리, 안성시 웨스트파인 골프장 등의 클럽하우스와 2009년 동양종합금융증권 골드센터 디자인을 직접 도안하는 등 디자인 경영에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엔 ‘내가 아버지의 회사를 구해야 한다’는 포석이 깔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동양그룹 내에서는 이 부회장의 비선 조직까지 생겨났다. 동양그룹 내 숨은 실세로 지목된 김철 동양네트웍스 대표도 이때 등장하게 된다.

동양 접수한
‘김철 라인’

1975년생으로 올해 39세에 불과한 김 대표는 2008년 이 부회장과 인연을 맺고, 동양그룹 기획실 산하 유통 부문 본부장(임원)급으로 영입되면서 영향력을 점차 확대했다.


그의 이력이나 경력에 대해선 그룹 내부에서도 거의 알려진 게 없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한국종합예술학교를 중퇴한 뒤 인테리어와 유통업 등에 종사하다 새롬기술의 후신인 솔본의 자회사 솔본미디어 대표를 지낸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동양그룹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대표는 이 부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골프장과 증권 지점 디자인 과정에서 조언자 역할을 하며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이 부회장의 후광과 비호를 통해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그룹 전반의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설립된 MRO(소모성자재공급업체) 회사 미러스 대표를 시작으로 2011년 동양시스템즈와 합병한 동양네트웍스 출범과 함께 대표를 맡으며 그룹 내 실세로 급부상 했다.

그룹 내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확보한 김 대표는 곧바로 인사권을 장악해 나갔다. 지난해 부터 소위 ‘김철 라인’으로 불리는 인물들을 핵심 계열사 대표로 앉히기 시작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상화 동양시멘트 대표와 김정득 전 ㈜동양 건재부문 대표이사가 꼽힌다.

부인 이혜경 절대적 영향력 행사…인사도 장악
김철·이상화·김정득·오세경 두고 세력 확장

이 대표는 김 대표가 MRO 계열사인 미러스 대표로 있을 때 사업총괄본부장으로 일했다. 이 인연으로 지난 해 3월 동양시멘트 상무보(영업본부장)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인 같은 해 10월 동양시멘트 공동 대표이사로 선임되는 등 초고속 승진 인사의 주인공이 됐다.

또 다른 인물인 김 전 대표는 강릉고를 졸업하고 경남기업 이사와 금진생명과학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김 대표가 세운 미러스에 2011년 2월 금진생명과학 주식 42만주(70%)와 경영권을 54억8500만원에 넘겼다.

이 거래를 계기로 김 대표와 가까워졌고 동양그룹에 합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김 전 대표는 지난해 4월 ㈜동양 건설부문 겸 동양시멘트이엔씨 대표까지 오르며 그룹 내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지난 2월 동양생명과학 잔여 보유지분을 동양네트웍스에 매각한 뒤 돌연 회사를 떠났다. 동양그룹 내에선 소위 ‘김철 라인’ 내의 다툼에서 밀려 갑작스레 사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MB라인 출신
‘숨은 실세’

‘이 부회장-김 대표’가 주축인 비선 라인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핵심 인사는 감사권을 행사했던 오세경 전무다. 오 전무는 동양 네트웍스 법정관리 사태가 불거진 직후 김 대표가 있는 동양네트웍스로 소속을 옮겼다.

업계에 따르면 동양그룹은 오 전무가 지난해 입사한 시기를 기점으로 기존 법무조직을 법무와 감사를 통합해 담당하는 클린경영팀으로 재편했다. 클린경영팀은 오 전무가 담당했으며 여타 그룹사의 일반적인 법무조직과 달리 그룹 계열사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감찰할 수 있는 독특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무는 본래 검사 출신으로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연루됐던 BBK 사건 때 이 전 대통령을 돕는 등 측근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오 전무는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시절부터 인연을 쌓아왔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이 청계천 개발 비리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자 이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서울시 특명감사반’에 오 전무가 합류하면서 부터다.

오 전무는 이후 이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나서자 BBK, 다스 비리 의혹 등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법무행정분과위 전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는 MB 라인으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부산 동래구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하면서 공직에서 멀어졌다.

오 전무는 동양 건재부문 대표였던 김 전 대표와 개인적인 연을 바탕으로 동양에 입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 전무가 ‘김철-이상화-김정득’ 등과 함께 김철 라인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 전무는 또 ㈜동양과 동양인터내셔널ㆍ동양레저 외에 동양시멘트ㆍ동양네트웍스 등 그룹 법정관리 현황을 마지막까지 알고 있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사외이사·감사
산은출신 포진


오 전무 외에도 동양그룹 계열사의 사외이사와 감사, 비상근 상무이사 등이 동양 사태의 숨은 실세로 꼽힌다. 그 자리에 정계와 재계, 법조계 유력 인사가 대거 포진해 그룹 부실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지적이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이 공시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주식회사 동양과 동양시멘트, 동양증권 등 동양그룹 계열사 9곳에서 41명의 정권 측근 인사와 금융당국 관계자, 법조계 출신 인사가 발견됐다.

최연희 전 한나라당 의원이 동양파워 대표이사를 지냈고,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역임한 조동성씨와 이달곤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동양증권의 사외이사였다. 홍두표 동양시멘트 고문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의 선대위 직능총괄본부 협력단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와 함께 홍기택 현 KDB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동양증권의 사외이사를 지냈고, 김윤태 산업은행 부행장은 동양시멘트의 사외이사로 활동했다. 법조계에서는 법무부 차관과 법무연수원장을 지낸 한부환 변호사가 (주)동양의 감사위원으로 등재됐다.

“비선라인이 주도하다 피해 키웠다”
로비용? 보험용? 외부 방패세력도

강 의원은 “2011년 예금보험공사와 금융감독원이 동양증권을 검사했을 때 예금보험공사가 동양증권의 투자자 소송 가능성 등을 보고서에 포함했으나 금감원 최종보고서에는 관심촉구 수준으로 완화됐다”며 “당시 동양증권 상근감사가 금감원 출신권정국 감사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듯 영입된 인사들이 동양그룹의 거수기로 전락하거나 로비의 통로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들의 화려한 이력이 동양그룹 사태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56년 역사의 동양그룹 몰락 원인을 놓고 아직 설왕설래가 여전하지만 동양이 무너진 이유 중 하나가 숨은 실세들에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로 보인다. 특수 관계로 묶여 있는 이들이 대기업 오너의 경영판단에 대한 문제제기, 경영실패에 대한 감시·감독·견제 등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 사외이사들은 동양그룹의 계열사 간 자금거래의 핵심고리였던 동양 파이낸셜 대부를 동양증권 100% 자회사로 두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지는 등 ‘동양사태’를 불러 온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 회장 뿐만 아니라 이 부회장 역시 그룹 붕괴의 중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라며 “(이 부회장의 추천으로 동양에 들어온) 김 대표를 시작으로 그 라인 인물들이 줄줄이 주목받는 이유도 사실상 이 부회장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어 “당장의 내편들로 채워진 사외이사들 역시 지금의 동양 사태와 무관하다 볼 수 없다”며 “또 다른 동양을 막기 위한 여러 대비책 중 하나로 유명무실해진 사외이사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실세 의혹’김철이 지목한 실세는?
“보이지 않는 손 따로 있다”

김철 동양네트웍스 대표가 ‘동양그룹 숨은 실세설’에 대해 해명했다. 김 대표는 지난 15일 동양네트웍스 홈페이지를 안내문을 통해 “오해는 갈수록 증폭되고 의혹으로 번지고 있어 저는 어떠한 발언도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 했다”며 “오늘은 사기꾼이 되고 있다. 미러스를 창업하고 부터 지금까지 함께 달려온 임직원들보기가 너무 부끄러워 의문에 관해 상세히 해명드리고자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대표는 우선 자신의 동양그룹 입사 과정과 그룹의 실세설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는 “동양그룹에 오게 된 계기는 이혜경 부회장이 디자인경영에 관한 포괄적인 계획안을 원해 실무와 이론이 적절히 융합돼 있다는 평가와 함께 전문가 추천을 받았다”며 “이는 일종의 컨설팅 의뢰로 당시에는 유학준비로 인해 입사를 거부했지만 수 개월 후 자연스럽게 회사에 조인했으며 대표를 맡은 건 2010년 스스로 미러스를 설립하면서부터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이미 그룹은 재무구조가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으며 그룹 전, 현직 기득 세력의 압력과 반대를 무릅쓰고 강남구청에 가서 자본금 1억원의 법인을 설립하며 스스로 대표이사가 됐고 초고속 승진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승진을 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서 “내가 대표로 있는 동양네트웍스의 주식조차 한 주 갖지 못했다”며 “비자금에 관해서도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선을 그었다.

김 대표 또 이번 동양그룹의 CP 문제를 주도한 것은 자신이 아닌 ‘제3의 실세’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CP발행의 당사자인 동양레저, 동양인터네셔날, 동양의 대표들은 그 분들이 취임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회사가 수천억의 CP 문제를 안고 있었다”며 “실제로 CP를 발행하는 업무는 해본 적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CP를 판매한 직원들 역시 회사의 고수익상품을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판매했을 것”이라며 “이모든 정책을 만들고 운영한 분들이 아마 보이지 않는 손이거나 구조조정의 실세들일 것”이라며 지적했다.

김 대표는 끝으로 “동양네트웍스 임직원들은 현재까지 단한명의 이탈도 없이 숨 죽인채 협력업체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가며 버티고 있다”며 “참 직원들보기 부끄럽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나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나는 법정관리인 선임여부와 상관없이 당분간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며 “나로 인해 불편을 겪으시는 모든 분들과 투자자, 협력사 그리고 동양네트웍스 임직원여러분께 고개 숙여 사죄 드린다”고 말했다. <아>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