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대기업 전문경영인 빛과 그림자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10.21 18: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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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한마디면…파리 목숨 사장님

[일요시사=경제1팀] 파리 목숨이다. 3년을 넘기기가 너무 힘들다. 대기업 전문경영인 얘기다. 국내 500대 기업 중 3년 임기를 넘긴 이는 3명 중 1명. 경쟁이 치열한 30대 그룹, 10대 그룹은 사정이 더 심각하다.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막고 합리적인 경영노선을 이끌던 전문경영인들이 최근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1973년 고 정수창 전 두산그룹 회장을 시작으로 올해로 40년째를 맞은 국내 전문경영인 체제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봤다.




국내 500대 기업 현직 전문경영인(CEO) 중 법정 임기 3년을 넘겨 재선임된 사람은 3명 중 1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30대 그룹, 10대 그룹 등 규모가 커질수록 CEO의 재선임 비율이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6일 기업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연말 재계의 사장단 인사를 앞두고 500대 기업 현직 CEO 516명의 재직기간을 조사한 결과, 3년 임기를 한 번이라도 넘긴 재직자는 총 188명으로 36.4%에 불과했다. 3명 중 1명꼴이라는 얘기다.

회사 규모 커질수록
재선임 비중 하락

규모가 큰 대기업으로 올라갈수록 CEO의 재선임 비중은 낮아졌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CEO가 되더라도 임기를 채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500대 기업 내 30대 그룹 소속 CEO의 경우 3년 이상 재직자는 총 227명 중 69명으로 30.4%에 불과했고, 10대 그룹은 150명 중 39명으로 다시 26.0%로 낮아졌다.

반면 30대 그룹 계열사를 제외한 중견 기업들의 3년 이상 중임자 비중은 41.2%로 대기업 그룹 계열사들보다 훨씬 높았다.


CEO 평균 임기로 따져도 500대 기업 현직 CEO의 평균 재임기간은 3.1년에 달한 반면 30대 그룹은 2.6년에 불과했다. 500대 기업 내 30대 그룹 계열사를 제외한 기업들의 CEO 재임기간은 3.6년으로 30대 그룹 소속보다 1년이나 길었다.

특히 신세계와 대림, 현대, 부영, 동국제강 등 5곳은 3년 이상 재임자가 단 1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세계와 동국제강 현직 CEO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0.6년에 불과했고, 부영도 0.9년으로 1년 미만이었다. 대림과 현대는 각각 1.1년, 1.6년이었다.

5대 그룹 중에서는 삼성의 재선임자 비중이 3.3%로 매우 낮았다. 총 30명 중 단 1명만이 3년 임기를 넘겼다. 5대 그룹 현직 CEO의 평균 재임기간은 롯데 3년→현대차 2.9년→LG 2.7년→SK 2.4년→삼성 1.6년이었다.

CEO 체제는 해당 분야의 전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경영인에게 거대 기업의 경영전략 전반의 수립과 이행권한 등을 맡기는 일이다. CEO는 기업 오너와 직원 사이에서 경영 관리를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국내 CEO 체제는 고 정수창 두산그룹 회장이 처음 열었다.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 고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은 공직에 전념하기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결심, "자기가 사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박 회장이 선택한 후계자가 정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광복 후 적산기업이 된 '소화기린맥주'에서 미군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통역, 즉 의사소통 역할을 담당하면서 박 회장 밑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았다. 입사 7년 만에 동양맥주 상무에 올랐으며 박 회장과 함께 동양맥주 정상화, 양조기술 자립, 맥아공장 가동, 와인 ‘마주앙’ 생산 등 수많은 일을 함께 했다.


'CEO 수난시대' 3명 중 1명만 재선임
대부분 3년 임기 못 채우고 ‘집으로’
신세계·대림·현대·부영 '툭하면 교체'

하지만 전무 승진 후 2년 만인 1965년 정 회장은 돌연 삼성그룹 계열인 새한제지로 자리를 옮겼다. 보수적 경영을 하는 박 회장 밑에서는 CEO로서의 성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4년간의 외도를 마친 그를 박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다시 불렀고 정 회장은 1973년 박 회장 폐암 판정과 동시에 그룹 회장에 올랐다. 이후 정 회장은 10여년간 자리를 지키며 두산그룹 제2 중흥기를 이끈 후 1981년 박두병 회장의 장자인 박용곤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가 1991년 페놀유출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그룹 총수로 복귀, 상황을 안정화시키며 능력을 발휘했다.

정 회장의 CEO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한국 재계에 CEO 시대를 열었다. 과거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되지 않아 소유주가 직접 경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던 한국 재계도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CEO의 필요성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국내 대기업 오너 못지않은 CEO 3인방으로 꼽히는 이들은 김창근 SK그룹 수펙스추구협의회(이하 수펙스협) 의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이석채 KT 회장이다.

1974년 선경합섬(현 SK케미칼)에 입사, 현재 SK에 재직 중인 임직원 중 입사 기수가 제일 빠른 최고참인 김 의장은 국내 4대 그룹 중 하나인 SK의 수장으로 SK 최고 의사결정지구인 수펙스협을 이끌고 있다.

그는 오너 부재는 물론 한·중·일 권력교체, 미국 재정위기 등 유례없는 격동기 속에서도 경영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5월 초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경제 사절단으로 동행, 오너 총수들 사이에서 "우리 정부의 창조경제와 미국 정부의 국가혁신전략이 시너지 효과를 내고 그 결과로 글로벌 경제가 새롭게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기업도 노력하겠다"며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3월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대표이사로 연임된 정 회장은 결단력 있는 리더십으로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구축하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 2011년 한국거래소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주회한 '기업지배구조 우수기업'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점과 감사 업무의 독립성 등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김창근·정준양·이석채
국내 CEO 3인방

정 회장은 미국 발 금융위기와 유럽 발 재정위기 등 세계 경제 위축이라는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대우인터내셔널 인수, 베트남 냉연공장 준공, 인도네시아 제철소 착공 등 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09년 취임한 이 회장은 희망퇴직을 통해 직원 6000여 명을 줄이고 KT와 KTF의 합병을 두 달 만에 이끌어내는 등 과감함으로 승부했다. 같은 해 말 아이폰을 국내에 들여오며 스마트폰 혁명을 이끌었으며 지난 1월에는 숙원이던 프로야구 10구단 창단에 성공했다.


이처럼 CEO 체제는 경영인이 전문성을 발휘하고 조직 내부에서 민주적 의사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투명성 높은 주주 중시 경영을 펼친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거나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실적부진·사고책임
잇따른 CEO 교체

최근 오너 일가인 설윤석 전 사장이 경영권을 내려놓는 등 유동성 위기에 빠져있는 대한전선의 경우 CEO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사익추구가 유동성 위기의 원인이라고 분석하는 사람이 많다.

회장 비서실장 출신인 임종욱 전 부회장은 2002년 대한전선 대표이사에 오른 후 무주리조트를 시작으로 선인상가, 남부터미널부지 매입, 쌍방울 인수, 진로인수전 참여, 이탈리아 프리즈미안, 남광토건 등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진행했다. 2008년까지 투자한 금액은 무려 2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도래로 부동산과 증권 등에 투자해 몸집을 불렸던 대한전선에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2009년에는 54년간 이어온 흑자 신화가 붕괴됐다. 총자산 중 절반 이상이 투자자산이던 대한전선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했고 2009년에는 차입금 규모가 2004년의 8배가 넘는 2조5000억원에 달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설 전 사장이 부회장에 오른 2010년은 상황이 더 악화한 후. 임 전 부회장이 망쳐놓은 회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 전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회사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당시 업계는 대기업 오너뿐만 아니라 CEO의 불법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도 엄하게 물어야 한다는 법원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박기석 전 삼성엔지니어링 대표이사는 지난 7월26일 발생한 삼성정밀화학 내 SMP(폴리실리콘 생산법인)사의 신축 공사장 물탱크 파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8월1일 전격 경질됐다. 이 사고로 삼성엔지니어링은 3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5명의 사상자를 냈다.

지난 6월 물러난 서종욱 전 대우건설 사장의 경우 사측은 서 전 사장이 과로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4대강 사업 담합과 수주관련 비리의혹 등 수사에 연루되자 서 전 사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대우건설은 4대강 담합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의 받고 있는데다 건설업자 윤모씨의 사회 유력인사 불법로비의혹 수사와 관련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서 전 사장은 지난 2월 낙동강 칠곡보 사업의 비자금 비리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CEO 체제는 실적 중심의 성과경영을 낳기도 했다. 경영실적에 따라 CEO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이뤄졌고 이는 CEO들의 단명으로 이어졌다. 보령제약그룹의 경우 계열사 보령메디앙스에서 2006년 김은정 부회장 취임이후 5년간 CEO 4명이 교체됐다. 매출 실적 부진이 이유였다. 보령메디앙스의 최근 3년간 당기순이익은 10억원 안팎으로 특히 2011년에는 적자 전환해 10억원의 손실을 낸 바 있다.

2008년 3월 취임한 이상희 대표이사 사장은 1년6개월 만인 2009년 12월 해임됐으며 2010년 3월 취임한 유승재 대표이사 부사장은 9개월 만에 사임했다. 2011년 부임한 최기호 대표이사 또한 1년 후 사임했다. 현재는 경영전략실장을 지낸 윤석원 대표이사가 김은정 부회장과 각자 대표를 맡고 있다.

체제 도입 40년…오너 경영 전환 목소리도
장점만 살린 '오너+CEO' 협업체제 부상

증권가에서도 CEO 교체는 이어졌다. 실적 부진이 정권교체와 맞물려 몇몇 증권사 CEO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10일에는 황성호 전 우리투자증권 대표이사가 사의를 표명했다. 황 전 사장은 지난해 6월 연임에 성공했으며 임기는 오는 2015년 6월까지였다.

이에 앞서 6월4일에는 이승국 전 동양증권 사장이 갑작스럽게 사의를 표했다. 지난해 현대증권 부사장에서 동양증권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이 전 사장은 취임 1년 만에 중도하차하게 됐다. 업계는 동양증권의 CEO 교체를 두고 실적악화와 함께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 진행에 따른 이유로 분석했다.

5월23일에는 현대증권이 김신·윤경은 각자 대표체제에서 김신 대표의 사임에 따라 윤경은 단독 대표체제로 변경됐다. 김 전 대표는 지난해 4월 현대증권 사장에 취임, 1년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초 임기는 2015년 4월까지였다.

김 전 대표의 사임 이유로는 현대그룹 경영진과의 갈등과 업계의 전반적 불황 속 실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짊어졌다는 게 중론이다.

CEO 교체 바람은 유관기관에도 불었다. 김봉수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지난 5월 자진 사퇴한 데 이어 우주하 코스콤 사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대기업 전현직 CEO들이 법정구속, 갑작스런 퇴진 등 잇따른 악재로 수난을 겪자 재계는 'CEO체제의 한계'라며 술렁이고 있다. 연말 대기업 인사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업계 분위기가 전면적인 CEO교체 쪽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국감에 기업인 200여 명이 증인으로 채택되고 '기업국감'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각 사 CEO들은 좌불안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계에서는 CEO체제 전환 이후 실적부진 등 악재가 이어진다면 오너 경영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임기가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재임기간 동안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는 CEO체제는 기업의 내적 성장보다 가시적인 성과에 치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인 전력을 앞세워 거시경제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갖춘 오너 경영인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재계 연말 인사
CEO 좌불안석

하지만 오너 경영은 지나치게 독단적인 의사결정으로 기업을 결정적인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오너 경영과 CEO 경영의 장점만을 살린 '협업'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인데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는 오너 경영이지만 최지성·권오현 부회장이 CEO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그룹에 행사하고 있다.

물론 '오너 경영' 'CEO 경영' '오너+CEO 경영' 중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 지금 당장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성공적인 오너들이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수난을 겪고 있는 CEO들이 고생 끝에 빛을 볼 수도, 협업 체제의 단점이 나타날 수도 있다.

협업 체제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한 경제전문가는 "어느 한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각각의 체제의 장점만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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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내란 비선’ 노상원 민간인 사찰 준비 의혹

[단독] ‘내란 비선’ 노상원 민간인 사찰 준비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방첩사가 댓글 공작을 계획한 정황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사이버작전사령관 후보군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하면서 여론전에 나서려 한 게 골자다. MB·박근혜정부 때의 악몽이 재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군 안팎에서는 계엄이 유지됐다면 여론 공작뿐만 아니라 민간인 사찰까지 벌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군 정보기관 간부들은 이 계획을 준비하려 했던 인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아닌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을 지목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인형은 댓글 공작을 지시한 사람일 뿐 계획한 사람은 노상원이다.” 한 군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부정선거 수사만을 담당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도 복수의 군 관계자들로부터 관련 진술을 받아냈다. 특히 사이버작전사령부가 댓글 공작을 계획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진보 성향 진급 제외 공수처는 이달 초 복수의 국군방첩사령부 간부들로부터 군 댓글 공작 의혹과 관련된 진술을 받아냈다. 한 방첩사 간부는 공수처에 “사이버사령관에 대한 정치 성향, 개인정보 등 신원 검증을 진행했다. 진보 계열 정치인과 친분이 있거나 알고 지낸 적이 있는 군 간부에 대해서는 신원 검증을 더욱 철저히 했다”고 진술했다. 공수처는 방첩사가 사이버작전사령관 후보군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하면서 정권 ‘코드 인사’가 정해지면 댓글 공작팀을 구성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공수처가 확보한 블랙리스트는 지난해 12월과 지난 1월 두 차례에 걸친 방첩사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것이다. 당시 압수수색 대상엔 사이버사령관 관련 블랙리스트 문건도 포함됐다.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은 이 문건들을 김용현 전 장관에게 수차례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보고 시점이다. 김 전 장관이 대통령경호처장이던 지난해 초부터다. 김 전 장관이 군 인사에 개입하고 신원식 국가안보실장보다 영향력이 강했던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도 방첩사의 댓글 공작 플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지난 1월 국회 국정조사특위에서 “조원희 사이버사령관이 사이버 정예 요원 28명으로 구성된 ‘사이버 정찰 TF’를 구성해 2024년 10월7일∼12월27일 약 3개월간 운영할 계획이었다”며 “사이버사가 국가정보원, 국군방첩사령부 등 그동안 비상계엄에 협조해 온 기관과 연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지전·심리전을 하려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했다. 인지전은 전단 살포 등 기존 심리전에 더해 SNS를 통한 사이버 여론전까지 포괄한다. 실제 방첩사는 예하 보안연구소에 인지전을 전담하는 ‘정보종합통합대응팀(대응팀)’ 신설을 계획했다. 이 대응팀은 방첩사가 인지전 조직 설립을 추진하다 내부 반발에 부닥치자 만들어진 TF(태스크포스) 성격의 팀으로 알려졌다. 일부 인원을 보안연구소로 이동시켜 TF를 꾸린 뒤 인지전 조직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사이버사 통해 인지·심리전 작업 선관위 서버 탈취 성공하면 서포트 여 전 사령관은 보안연구소에 인지전 전문가를 직접 추천하기도 했다. 실제 여 전 사령관이 추천한 인사는 지난해 12월2일 보안연구소 연구기획팀에 임용됐다. 지난해 10월에는 여 전 사령관실에 있던 소령이 전 부대원을 대상으로 인지전 내용이 포함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았던 건 그의 비서실장이던 정성우 전 1처장과 최측근인 소형기 전 방첩사 참모장(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다. 정 전 1처장은 보안처와 방첩처에 인지전 관련 조직 신설을 지시했으나 간부 대부분이 ‘업무 관련성이 없다’며 거부했다. 소 전 참모장은 지난 2023년 11월6일 인사를 통해 여 전 사령관과 함께 방첩사로 온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인사 이전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에서 부장과 계획편제차장으로 함께 근무했다. 방첩사는 육·해·공군 장성급 직책과 국방부 예하기관장 등에 대한 인사안도 작성했다. 이 인사안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수처는 관련 진술을 확보하고 지난달 29일부터 방첩사 신원보안실과 군사정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방첩사 신원보안실은 본래 육·해·공군 각군 인사참모부에서 인사 계획안을 작성하면, 해당 인물의 세평 등 정보를 수집·조사해 검증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여 전 사령관이 지난 2023년 11월 방첩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신원보안실은 여 전 사령관 측근들로 구성돼 군 인사와 비상계엄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신원보안실장을 맡고 있는 나모 실장(대령)은 지난해 전역을 앞두고 있었으나 비상계엄을 나흘 앞둔 11월29일 인사에서 이례적으로 임기가 2년 연장됐다. 신원보안실 산하 신원검증과장 등을 맡았던 진모 당시 중령은 충암고 출신으로 지난해 9월 인사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내란 사태 이후 지난해 12월6일 육군 제5군단 방첩부대장으로 부임했다. 공수처 진술 확보 방첩사 신원보안실은 여 전 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계획 문건을 만들고, 이를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당시 그 자리는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이 맡고 있었으나 박 전 총장 임기 만료 전이던 지난 4월 인사에서 여 전 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안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8월 여 전 사령관 지시로 만들어진 블랙리스트인 이른바 ‘최강욱 라인 명단’은 2017~2020년, 군 법무관 출신인 민주당 최강욱 전 의원과 근무 시기가 겹치거나 만난 적이 있다는 군 판사·검사 명단을 30명 가까이 정리해 둔 문서다. 최 전 의원은 문재인정부 시절인 2018년 9월~2020년 3월 청와대 직원 직무감찰과 군을 포함한 주요 공직자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공직기관비서관으로 근무했다. 명단에는 김상환 육군본부 법무실장(준장)과 서성훈 중앙지역군사법원장(대령) 등 비육사 출신 군 법무관들이 주로 이름을 올렸다. 공수처는 여 전 사령관이 김 법무실장을 국방부 검찰단장직에 보임되는 일을 막기 위해 그를 강제 전역시킬 방안을 연구했다고 보고 압수수색 영장에 관련 혐의도 적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수처는 여 전 사령관이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군 인사에도 개입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정치 성향 등 단순 세평 수집이 아닌 각 군에서 작성한 인사안을 검토하거나 직접 작성했는지가 의혹의 핵심이다. 한 군 정보 소식통은 “정보사를 포함해 계엄에 협력할 만한 인물을 정리한 문건도 방첩사가 관리했다.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을 포함해 계엄에 반대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은 모두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에게 보고됐다”고 주장했다. 조 사령관은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해 4월 사이버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노 전 사령관이 김 전 장관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부임 6개월도 안 된 해군 출신이던 이동길 전임 사령관을 교체하고 조 사령관을 임명한 건 이례적인 일이라는 게 군 내부의 시선이다. 사령관 추천 노 ‘오케이’ 조 사령관은 평소 여 전 사령관과의 친분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 전 장관이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시절(2015~2017년) 작전본부 중령으로 근무했다. 방첩사 출신 군 관계자는 “여 전 사령관이 노상원을 멀리 했으나 계엄을 놓고 본다면 자신의 측근이자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사이버사령관으로 둬야 했을 것이다. 여 전 사령관이 김용현에게 조 사령관을 추천, 노상원이 ‘오케이’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초부터 김 전 장관과 연락하면서 12·3 비상계엄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검증하려 계엄사령부 산하 수사2단을 지휘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서버 탈취를 계획했다. 정치권과 군 일각에서는 조 사령관이 여 전 사령관의 지시로 노 전 사령관에게 협력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노 전 사령관의 선관위 서버 탈취 계획이 성공했다면 조 사령관이 사이버사 산하 해킹 부대인 900연구소를 중심으로 댓글 및 여론 공작에 나섰을 것이란 분석이다. 복수의 정보사 간부들은 댓글·여론 공작의 다음 플랜이 ‘민간인 사찰’이라고 전했다. 노 전 사령관이 선관위 서버 탈취에 성공하면 진보 성향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SNS를 들여다볼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부정선거가 사실이었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계엄이 2~3주 정도 유지됐다면 방첩사와 노상원이 지휘하는 수사2단이 주체가 돼 진보 성향 시민단체의 동향 파악은 기본이고 실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결론적으로 방첩사가 사이버사를 통해 댓글·여론 공작을 하려 했던 건 ‘윤석열의 계엄이 옳았다’는 헛소리를 유포하기 위함이다. 노상원이 김용현에게 조언했고 MB·박근혜 때의 국정원 댓글부대 사건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짰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노, MB·박정부 국정원 댓글부대 사건 참고 여, 블랙리스트 김용현에 직보…김·노 논의 여 전 사령관은 사이버사를 통해서만 댓글·여론 공작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직접 국정원에 방첩 업무를 담당할 도·감청 전문가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여 전 사령관의 요청을 거절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홍 전 차장은 윤 전 대통령이 “방첩사를 지원하라”고 하자 여 전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윤 전 대통령 지시 사항을 전달했고, 여 전 사령관은 체포 대상자 명단을 불러주며 위치 추적을 요청했다. 합참의 ‘계엄실무편람’에 따르면, 계엄사는 합동수사본부 지원을 맡는다. 합동수사본부는 예하에 수사1·2·3·5국을 둔다. 2018년 논란이 됐던 기무사의 계엄 대비 문건에는 합동수사본부장은 방첩사령관이, 수사5국은 국정원이 맡는다고 적혀 있다. 당시 문건에는 ‘국정원은 국정원법을 이유로 계엄사령관의 지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가능성 내재’ ‘이럴 경우 대통령께서 국정원장에게 계엄사령관의 지휘·통제를 따르도록 지시’라고 기록됐다. 여 전 사령관은 ‘민간인 사찰을 계획했느냐’는 <일요시사>의 여러 질문에 대해 “너무 구체적이다. 어떤 게 맞고 틀린지 답하기 곤란한 내용이 포함돼있다”며 “수사를 앞두고 있어 답할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고 말한 바 있다. 공수처는 방첩사의 댓글·여론 공작 의혹과 군 간부들에 대한 평가와 사찰에 대한 문건이 윤 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는지 수사 중이다. 공수처는 조만간 여 전 사령관에 대한 피의자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지만 내란 특검이 출범하게 되면 모든 자료를 특검에 넘겨야 한다. 공수처 최근 정례 브리핑에서 “지난주부터 방첩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의 매일 진행 중”이라며 “포렌식이 오래 걸리는 건 여러 곳에 분산된 서버를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통해 윤 전달? 공수처는 12·3 비상계엄 사태 수사와는 별개로 방첩사 관련 사건을 입건해 사건번호를 부여한 상태라고 부연했다. 지난 5일 내란 특검법, 채상병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해 조만간 특별검사 수사 체제가 가동될 것으로 예상돼 공수처는 특검 출범 이후 방첩사 블랙리스트 관련 수사와 기존 고발 사건 수사에 집중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공수처 관계자는 “특검이 출범하고 자료 요청이 오면 당연히 자료를 넘겨야 하지만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