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판치는 방송가 천태만상

  • 최현경 mw2871@naver.com
  • 등록 2013.09.24 13: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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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뭐길래…여기도 구라 저기도 구라

[일요시사=사회팀] ‘꾼 리스트’. 방송에 거짓 사연을 보내 상품을 챙겨가는, 일명 ‘꾼’을 색출하기 위한 리스트이다. 시청자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준 가짜 사연들 때문에 방송 프로그램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진솔한 사연이 방송에 소개되면 반응은 정말 뜨겁다.”

어느 방송작가의 말이다. 최근 일반인의 출연이나 사연으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프로그램이 많다. 그런데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그들의 ‘사연’이 모두 꾸며낸 이야기라면?

‘거짓 사연’들이 많아지자 속은 시청자들은 ‘노이즈 마케팅이다’ ‘시청자를 우롱하냐’며 제작진들의 ‘출연자 검증 여부’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허나 뿔난 시청자만큼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들 또한 의도적으로 속이는 사연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반인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진짜 사연’을 찾기 위해 최소 3∼4번의 검증 과정을 거친다. 간단한 서류 확인부터 전화 인터뷰, 방송용 인터뷰 등을 통해 ‘가짜 사연’을 골라내기도 한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요즘은 과거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을 남긴 이력도 ‘네티즌 수사대’를 통해 알려져 제작진의 힘으로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날 때는 곤혹스럽다”라고 말했다. 이어 “법적인 이유로 (사연)참가자의 개인정보를 물을 수 없다”며 “속이려고 작정한 (사연)신청자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하소연했다.

공감얻는 감동사연
진실없는 방송으로


가슴 절절한 사연으로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의 도전이 돋보이는 <슈퍼스타K>가 얼마 전 시즌5(이하 <슈퍼스타K5>)까지 제작됐다. 얼마 전 <슈퍼스타K5>에는 ‘말더듬이’ 사연으로 지원자 박상돈씨가 출연했다. 말더듬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박씨는 “노래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며 눈물을 보였고 장애를 극복하는 박씨의 사연에 심사위원들과 시청자들은 그를 응원했다.

그러나 박씨가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이 알려지며, 그의 사연 또한 거짓이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페라리 차량대여를 빌미로 피해자 A씨로부터 차량 운송비 등 50만원을 입금받은 뒤 잠적하는 등 같은 수법으로 여러 사람에게 금전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논란이 되자 <슈퍼스타K5>측은 “박씨가 슈퍼위크에서 탈락했다”고 전하며 박씨가 출연하는 장면을 통편집해 사건을 일단락했다. 제작진과 연락을 끊은 채 잠적한 박씨는 현재 사기 및 횡령혐의로 기소중지됐다.

<슈퍼스타K5> 제작사인 CJ E&M 측은 법적 문제 때문에 “지원자를 받을 때 개인 신상과 관련해 자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한다”며 참가자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청자 속이는 사연 넘쳐 제작진 골머리
‘진짜 찾기’최소 3∼4번 검증도 무용지물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여성들에게 성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주는 CJ E&M <렛미인> 또한 ‘거짓 사연’의 피해를 입었다.

<렛미인>은 MC와 성형외과, 정신외과의 등으로 이루어진 닥터스가 신청자의 사연을 듣고 최종 선정하여 치료해주는 성형 프로그램이다.

지난 8월, <렛미인>에 급격한 노화로 남편에게 버림받는 ‘라보니 루나’씨의 사연이 방영됐다. 방송에 출연한 루나는 “변한 외모와 늘어진 살 때문에 남편의 폭력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린다”며 눈물흘렸다.
 최종 선정된 루나는 방송절차에 따라 우울증 검사를 했다. <렛미인> 관계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루나는 우울증 검사의 모든 문항에 '심하다'고 체크했다”며 “실제 우울증 환자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루나의 수술을 맡은 의료진이 의구심을 제기했고, 제작진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루나의 거짓말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5년 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루나는 한 다문화신문에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글을 기고했다. “내가 가진 재능과 꿈을 한국에서 마음껏 펼쳐보고 싶었던 저는 속을 풀어 놓을 친구 하나 없이 좌절과 상처 속에서 우울증을 앓기 시작해 자살을 시도했다”며 “이후 남편의 격려과 보살핌 속에서 내 스스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여러 가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고 작성한 루나의 글은 방송에서 언급했던 말과 상반되는 주장이었다. 노안 외모로 외부활동이 어렵다는 말 또한 거짓이었다. 도리어 다문화극단과 TV프로그램에서 공연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결국 루나는 <렛미인> 사상 초유로 선정이 취소됐다.

‘의도적인 숨기기’
“법적 책임 묻겠다”

SBS <짝>은 일반인 싱글남녀가 일주일동안 함께 지내며 자신을 짝을 찾는 방송이다. ‘진실된 만남’이 전제인 <짝>에 의류 쇼핑몰 모델·운영자들이 경력을 숨기고 출연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프로그램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지적이 많다. SBS <짝>은 배우자를 찾는 프로그램인 만큼 ‘홍보’로 의심되는 자기소개서는 철저히 거른 후 각종 증명서 등으로 학력·재직 여부를 확인한다. 이와 같은 제작진의 노력에도 <짝>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11년 <짝> 돌싱특집에 출연한 한 여성 출연자가 에로영화 주인공과 흡사하다는 의심에 이어 지난해 7월 출연한 남성 출연자 또한 ‘에로배우’ 출신으로 밝혀졌다. 문제의 남성이 출연한 방송이 나가자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최근 <짝>에 출연한 한 남자와 성인물에 등장하는 남성의 체격과 점 네 개의 위치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왔다. 논란이 커지자, <짝> 제작진은 “성인용 방송 출연이 사실인 것 같다”며 사실을 인정했다. 일부 네티즌들이 “직업의 귀천이 어딨냐. 에로배우는 배우자 찾으면 안 되는 것이냐”라고 옹호하자 제작진은 “에로배우 출신은 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제작진에게 미리 공지를 했다면 출연을 시키지 않았거나 그와 관련한 정보를 방송을 통해 제공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촬영 전, 출연동의서 작성 과정에서 과거 매체에 출연한 적이 있냐는 항목에 없다고 응답한 남성 출연자에 대해 “일반인들이 짝을 찾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훼손한 점을 그냥 넘길 수 없다.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특이한 사연으로 연일 화제를 모으는 tvN <화성인 바이러스>는 수많은 ‘거짓 사연’으로  ‘홍보를 위한 방송’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10년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 ‘아우라 피부녀’ 박현숙씨가 출연했다. 박씨는 결혼 5년차 주부임에도 불구하고 무결점 피부로 많은 여성들의 부러움을 샀다. “고현정에 피부만큼은 뒤지지 않을 자신있다”며 미스코리아 수상과거를 고백한 박씨는 무결점 피부의 비결인 ‘노터치 피부 관리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기름진 것을 피하기 위해 일년에 고기는 5번 정도만 섭취하며 피부를 건조하게 만드는 커피와 녹차 대신 허브티를 주로 마신다”며 “튀김, 햄버거, 빵, 라면 등을 피하고 와인 한 모금에 물을 4∼5잔 정도씩 먹으며 수분 유지에 최선을 다한다”라고 하는 등 자신만의 피부 관리 비법에 대해 밝혔다.

가족들과의 스킨십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피부 관리녀 박씨는 알고보니 “피부관리실 대표”였다. 방송이후 한 네티즌은 “박씨가 일반 주부가 아닌 ‘피부 관리실 대표’다”라고 주장했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지며 홍보를 위해 방송에 출연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사실을 밝힌 네티즌은 “이번에 나온 피부녀도 피부관리실 원장님이네요. 화성인은 홍보의 장”이라며 비아냥거리듯 비난했다.

말 바꾸는 사연자…
해명하기 바쁜 제작진

지난 7월 KBS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 ‘약술을 사랑하는 엄마’ 때문에 고민이라는 가족이 방송됐다.

집안을 가득 채운 수천 개의 약술로 생활이 어렵다는 사연이었다. 수천 개의 약술은 출연자의 어머니가 10년 동안 담근 것으로 “방안 가득 약술이 있다.”고 고민을 호소하며 “거실, 부엌, 안방, 엄마방이 약술로 꽉 차있다. 내 방에도 못 들어가며 3년째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술 사업을 구상 중인 것 아니냐”는 MC의 질문에 사연을 보낸 아들의 어머니는 상업목적이 아니며 “5000가지가 넘는 약재로 술을 담가서 내 이름을 걸고 전시하고 싶다” 라는 바람을 밝혀 화제가 됐다.

 ‘약술사랑 엄마’의 사연이 방영되고 일부 네티즌은 이들 가족이 지난해 10월 MBN <리얼다큐 숨>에 말벌사냥꾼 가족으로 출연했다며 사연의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다큐프로에서는 이들 부부가 함께 말벌을 잡아 술을 담그는 장면이 방송됐다. 이를 두고 시청자들은 “부인의 약술 사랑이 고민이라고 했는데 함께 술을 담그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담근 약술이 온라인을 통해 판매되고 있는 것이 밝혀져 논란이 불거졌다.일었다.


<안녕하세요> 제작진은 “(다큐)방송 출연 당시 말벌사냥꾼으로 소개돼 곤혹스러웠다고 하더라. 부인에게 촬영 섭외가 와서 도와준 것 뿐, 술 판매를 주업으로 하는 가족이 아니다”며 “조작이나 설정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안녕하세요>이전에 출연한 다큐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함께 말벌을 채집하는 생활을 한다고 했다”며 “이 때문에 촬영도 함께 이뤄진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신상·경력 숨기고 출연
신분 세탁했다가 덜미도

지난 2011년 MBC <100분 토론>은 이른바 ‘신촌 냉면집 논란’으로 방통심의위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다.
‘SNS 규제 논란’의 주제로 제작진이 사실 확인 없이 SNS 심의에 찬성하는 발언을 내보낸 것이다. 생방송 도중 전화로 “신촌에서 10년 동안 냉면 음식점을 운영했다”고 밝힌 한 시청자는 “손님이 종업원에게 욕설을 들었다는 거짓 정보를 트위터에 띄워 나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는 바람에 음식점이 폐쇄당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방송 이후 <100분 토론>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수만 명이 리트윗했다는 냉면집, 리트윗했다는 사람 한 명도 못 찾겠네” “전화한 사람 말대로 신촌 냉면집 쳐도 그런 말이 안 나오는데?”라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냉면식당의 진실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논란이 커지자 MBC <100분 토론> 제작진은 홈페이지에 “서울 모처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중, 해고된 강사가 허위사실을 트위터로 유포시켜 큰 정신적 물질적 손해를 입었던 억울한 심경을 밝히고 싶었으나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학원을 식당으로 바꿔 이야기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사전확인에 미흡함이 발생해 사실과 다른 내용이 방송되게 된 점 깊이 사과드리며,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라는 제작진의 공식 사과문과 해당 시청자에게 받은 사실확인서 원본을 올렸다.

팔팔 나는 98세 노인
알고보니 전과 9범


올해로 33주년을 맞은 KBS <전국노래자랑>에도 황당한 ‘거짓말쟁이’가 등장했다.

지난해 10월 충북 청주시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에 안복영 할아버지가 참가했다. 98세의 나이로 출연한 안씨는 사회자 송해에게 ‘동생’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고령의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트로트 가요를 부른 안씨는 인기상을 수상했고, 연말 결선에서도 인기상을 한 번 더 받았다. 나이에 비해 정정한 할아버지(?)인 안씨는 지난 1월 한 아침 교양프로에도 출연해 건강비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안씨의 방송에서 알려진 나이보다 38살 어린 60세로 9범 전과자였다.

안씨는 유가증권 위조죄로 2년동안 교도소 신세를 진 뒤 2005년 출소해 고아인 척하며 청주의 한 목사에게 접근했다. 많은 주름과 이가 없는 노안 외모의 안씨는 목사의 도움을 받아 출생년도를 1915년으로 신고해 95살의 나이로 2009년 새 호적을 얻었다.

새 신분을 얻은 안씨는 손에 강력접착제를 발라 지문을 손상시키는 등 치밀하게 90세 노인으로 살며 지난 1월까지 48개월 동안 2285만원의 기초노령연금, 장수수당과 기초생계비를 챙겼다.

이어 5만원 미만의 복권을 위조해 총 47만원의 당첨금액을 타낸 안씨는 위조 복권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덜미가 붙잡혔다. 안씨를 검거한 경찰 관계자는 “안씨가 치아도 없고 흰 수염을 길러 99세 노인으로 착각할만 했다”라고 전했다. 현재 안씨는 허위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고 복권을 위조한 혐의 등(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됐다.


최현경 기자<mw287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끊이지 않는' 스타들의 거짓말
재미에 급급…입만 열면 뻥?

클라라는 최근 거짓말 논란과 해명으로 화제를 모았다. KBS <해피투게더>의 ‘야간 매점’코너에 출연한 클라라는 소시지에 파스타면을 넣어 요리하는 기발한 레시피를 소개했다. 

MC 박미선이 “이걸 어떻게 생각했냐”고 묻자 클라라는 “음식에 프레젠테이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재밌게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방송 이후, tvN <세 얼간이>에서 해당 메뉴가 소개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자 제작진은 “‘야간매점’코너는 스타가 직접 만든 메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즐겨 먹는 야식을 소개하는 것이 기획의도다”라며 “클라라 또한 방송에서 직접 이를 자신이 개발한 메뉴라고 한 적이 없다. 출연자들끼리 대화하고 소개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작진과 클라라의 상반되는 주장에 네티즌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클라라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죄송합니다. 변명, 해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전적으로 제 욕심으로 기인한 저의 잘못입니다. 부디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해명했다.

재치있는 입담의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또한 거짓말 논란으로 공개사과를 한 바 있다. 2007년 SBS <강심장>에 출연한 이특은 “피겨선수 김연아와 함께 CF촬영하며 친해졌고, 일촌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거짓말을 해 논란이 됐다. 이후 “김연아에게 피해가 갈까봐”라고 해명하며 공식사과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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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