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계는…' 오너 일가 줄사퇴 왜?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9.16 11:29:34
  • 댓글 0개

사건·사고만 터지면 '소나기 피하기'

[일요시사=경제1팀] 오너 일가가 경영권을 내려놓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GS그룹 회장의 동생 2명이 물러난 데 이어 최근 SK그룹 회장의 사촌 동생까지 자진 사임했다. 기업들은 오너 일가의 책임경영에 대한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외부에서는 계열사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것이라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최창원 SK건설 부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최 부회장은 선경직물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의 3남으로 최태원 SK(주) 회장의 사촌 동생이다. 최 부회장은 지난 2000년 SK건설 전무로 선임된 이후 13년 만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SK케미칼과 SK가스의 부회장 겸 대표이사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모든 책임지고…"
자진사임 진실은?

최 부회장은 사임과 함께 보유 중인 SK건설 주식 132만5000주(약 564억원)를 SK건설 법인에 무상증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전체 보유주식 227만주(9.61%) 가운데 58%에 이르는 수치로 회사 재무구조 개선과 경영정상화를 위한 결정이라는 게 SK측의 입장이다. 이번 결정으로 최 부회장의 지분율은 4%로 낮아지게 됐다.

최 부회장은 사임 이유에 대해 "SK건설의 근본적인 조직 체질개선과 분위기 쇄신을 위해 이사회 의장과 부회장직을 사임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며 "SK건설의 미래성장을 강도 높게 추진할 역량과 명망을 갖춘 인사 영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최 부회장의 사임 결정에 대해 업계 일각에서는 SK건설의 실적 부진에 따른 문책성 인사가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SK건설은 올 상반기 2918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SK그룹이 최태원 회장 '1인 체제'를 확고히 굳히기 위한 결정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사촌형제들이 계열사를 나눠 맡아 경영하면서 수차례 계열분리설에 휘말린 만큼 사촌형제들과의 경영권 다툼을 불식시키겠다는 것.

당초 재계에서는 사촌지간인 최 회장과 최 부회장이 그룹 주력사를 나눌 것이라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최 부회장이 SK가스와 SK건설, SK케미칼을 그룹서 떼어내, SK케미칼을 지주사로 하고 그 아래에 건설과 가스를 둘 것이라는 것. 하지만 이번 최 부회장이 물러난 것을 계기로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

지난 13일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가 국내 62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총수가 있는 43개 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SK그룹 오너 일가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자산은 2조9013억원으로 집계됐다.

먼저 최 회장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자산 가치는 2조743억원으로 오너 일가 전체 주식자산 가운데 71.49%에 달했다. 최 회장의 여동생인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이 SK C&C 주식 525만주(10.5%·5723억원)를 보유해 최 회장 뒤를 이었다. 자산비율은 19.72%를 기록했다. 최 부회장이 주식을 증여하기 전 자산평가액은 2222억원. 자산비율은 7.66%로 최 회장과 최 이사장 다음으로 높았다.

경영권 내려놓고 2선 후퇴 결단…진짜 의도는?
대부분 실적 부진에 따른 문책성으로 자진사임

현재의 지분율로는 최 부회장이 최 회장의 지원 없이 계열 분리를 이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최 회장이 검찰에 구속돼 실형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촌형제들을 지원할 여력이 없다. 당분간은 계열분리 이야기가 다시 거론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다.

일단 SK 측은 최 부회장이 실적 악화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SK 측은 "최 부회장은 CEO가 아닌 이사회 의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며 "오히려 오너로서 지분을 내놓으면서 SK건설이 그룹과 묶여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효과를 기대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12일에는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동생 허명수 전 GS건설 사장이 대표이사를 사임했다. 빈자리는 전문경영인인 임병용 대표가 물려받았다.

이날 허 전 사장은 '사원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회사가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멘텀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사임하게 됐다"고 밝혔다. 허 전 사장은 평소 책임경영을 강조해 온 최고 경영자로 주위의 만류에도 최근 경영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직의 혁신적인 변화를 돕기 위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꾸준히 밝혀온 것으로 알려졌다.

2주 뒤인 6월27일에는 허 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인 허정수 GS네오텍 회장이 18년간 맡아온 이 회사의 사내이사직을 돌연 사임했다. 이날 GS네오텍은 임원변동 공시를 통해 허정수 회장이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났으며 남기정씨가 신규 선임됐다고 밝혔다. 허정수 회장은 지난 7월3일 사내이사에서 해임됐으며 이사임면의 등기는 같은 달 13일 이뤄졌다.

허정수 회장은 GS네오텍 지분 100%를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GS그룹 계열사 중에서 GS네오텍을 독자 경영해 왔다.

자진 사임인가
압박 퇴진인가

사임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일감몰아주기 논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는 해석이 짙다. GS네오텍은 GS그룹 계열 정보통신, 전기공사 전문업체로 시스템통합 업체 GS아이티엠과 함께 일감몰아주기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돼 왔다.

GS네오텍은 지난해 기준 매출액 6047억1200만원, 영업이익 210억7900만원, 당기순이익 191억200만원을 나타냈다. 이 중 매출액 3922억3300만원은 GS그룹 계열사와의 내부거래를 통해 쌓았다. 내부거래비율이 65%에 이른다.

올들어 국세청이 '일감몰아주기 과세'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2012년 영업이익분에 대한 증여세 납부기간을 7월 말로 못 박은 바 있다. 허정수 회장은 증여세 납부마감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돌연 사임한 것이다. 그 '의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의도'를 의심케 하는 오너 일가의 자진 사임은 또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다. 정 부회장은 지난 3월15일 열린 신세계와 이마트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신세계 측은 "정 부회장의 등기이사 사퇴는 지난 2011년 이마트 기업분할 때부터 예정된 것"이라며 "향후 정 부회장은 그룹 총괄 경영을 강화하고 복합 쇼핑몰 등 미래성장동력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 부회장과 관련된 각종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어 오너 일가가 직접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당시 정 부회장은 검찰로부터 베이커리 계열사에 대한 부당지원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고용노동부로부터는 이마트가 직원사찰 활동을 벌였다는 의혹으로 특별근로 감독을 받은 바 있다.

이와 관련 신세계는 정 부회장의 등기이사 사임이 검찰조사 등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역시 지난 3월 진행된 정기주총에서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신 회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것은 7년 만이다.

물러난 총수들
책임 회피 의도?

롯데그룹은 "신 회장의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면서 "롯데쇼핑 대표에서 물러났지만 롯데케미칼과 롯데제과 등 다른 계열사의 대표와 롯데쇼핑의 신사업과 해외사업도 그대로 맡게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신 회장의 사임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며 대기업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는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경영을 해나가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롯데쇼핑 대표이사직만 사임한 것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압박이 가장 심한 유통업계에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비난도 받았다. 정부가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업계 등의 출점을 제한하고 특히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롯데그룹의 유통사업을 책임지는 롯데쇼핑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이야기다.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됐다가 간암 치료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지난해 6월 보석으로 풀려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도 미심쩍은 사임을 선택해 논란이 됐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2월9일 회장직을 포함한 일체의 지위에서 사임했다. 태광그룹 측은 "회장단이 그룹 문제로 재판을 받는 등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일체의 직위에서 사임했다"고 밝혔다. 이 전 회장은 태광산업과 대한화섬 대표이사를 포함해 티브로드홀딩스, 티알엠 등 계열사 사내이사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업계에서는 재벌개혁론이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대기업 총수가 법적 책임을 이유로 퇴진한 사례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회사에 문제 생기면 '회피용 카드'
잠적 후 은근슬쩍 복귀하는 사례도

하지만 이 전 회장의 사임 시기가 선고공판을 10여 일 앞둔 때여서 법원의 선처를 겨냥한 고육지책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 전 회장은 무자료 거래와 회계 부정처리, 임금 허위지급 등으로 회삿돈 약 300억원을 횡령했다. 또 골프연습장 헐값 매도 등으로 그룹에 975억원의 손해를 끼쳐 지난 2011년 1월 구속 기소됐다. 이 전 회장은 재판 도중 간암수술을 받고서 건강 상태를 참작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1·2심에서 모두 징역 4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경영 일선에서 제 발로 떠난 오너 일가가 은근슬쩍 복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저런 사건·사고 이후 이를 무마할 목적으로 '사임 카드'를 꺼냈다가 사태가 잠잠해진 틈을 타 당당하게 혹은 소리 소문 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지난해 2월3일 롯데그룹에서는 '롯데가 황녀'로 불리던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신 이사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맏딸이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누나다. 신 이사장은 쇼핑 지휘봉을 내려놓은 대신 롯데복지재단·롯데장학재단·롯데삼동복지재단을 총괄하게 됐다.

신 이사장의 대의는 젊은 피를 위한 세대교체. 하지만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던 신 이사장이 돌연 사임하자 "압박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삼성가-롯데가 황녀 전쟁'으로 불렸던 루이비통 유치전에서 패한 데다 '재벌가 빵집' 논란의 여파가 원인이라는 것. 빵집을 운영하던 신 이사장의 자녀와 사위는 대통령까지 나서 일침을 가한 골목상권 침해 논란으로 백기를 들고 사업을 철수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신 이사장과 그의 자녀와 사위가 보여준 행보는 '비가 쏟아지자 잠시 우산을 폈다가 그치자 다시 접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신 이사장은 롯데쇼핑 주주총회를 통해 사내이사로 현업에 복귀했으며 차녀 장선윤씨는 지난해 1월 베이커리 사업을 철수한다고 공표했다가 다시 확대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여론의 불똥이 다시 튀었다.

장씨의 남편 양성욱씨도 수입 포이달 물티슈의 롯데마트 입점을 취소하고 대표이사에서 사임한다고 밝혔지만 롯데마트에 해당 매장이 입점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두산그룹은 2005년 7월 '형제의 난'을 겪은 후 ▲두산가 형제들의 회장직 사퇴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의 수습책을 내놓고 같은 해 11월 두산그룹을 이끌던 박용성-용만 형제는 동반 사퇴했다.

등기임원 사퇴
책임경영 실종

두산그룹은 새 전문경영인을 영입했고 사태가 잠잠해지자 두산가 형제들은 은근슬쩍 돌아왔다. '형제의 난'과 관련해 횡령과 분식회계 관여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원을 선고받은 박용성 회장은 2007년 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후 경영 보폭을 넓히다가 두산중공업 등기이사로 경영에 복귀해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 박용만 회장은 두산중공업과 ㈜두산의 이사로 선임되면서 ‘형제의 난’이전 상황을 연출했고 현재 두산그룹 회장 겸 대한상의 회장을 맡고 있다.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은 2006년 3월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쌍용건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가 2007년 2월 특별사면 돼 1년 만에 다시 지휘봉을 잡았다.

한종해 기자 <han1028@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