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메이저리거 임창용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9.23 1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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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불굴의 루키…드디어 ‘꿈의 무대’ 오르다

[일요시사=사회팀] 사이드암 투수 임창용이 메이저리그에 당당히 입성했다. 난관을 헤치고 결국 꿈을 이뤄낸 것이다.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1995년 해태(KIA 전신)에 입단해 프로 무대에 발을 디딘 지 19년 만에 이룩한 ‘꿈의 무대’ 진입이다.




‘창용불패’ 도전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다부진 포부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던 ‘미스터 제로’ 사이드암 투수 임창용이 빅리그로 승격됐다. 미국 프로야구 시카고 컵스 구단은 지난 5일(한국시간) 임창용을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포함했다고 발표했다. 선수 생활의 고비마다 ‘마이 웨이’를 외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임창용의 패기가 비로소 빛을 발한 것이다.

‘풍운아’ 임창용
빅리거 꿈 이뤘다

시카고 컵스 산하 트리플A 팀인 아이오와 컵스에서 뛰어온 임창용은 9월 확대 엔트리가 시행된 뒤 두 차례 발표된 추가 합류 선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승격이 늦춰지는 듯했지만 지명할당된 투수 마이클 보우든 대신 빅리그에 입성하게 됐다. 이로써 현역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추신수(신시내티), 류현진(LA 다저스)과 함께 3명으로 늘었다. 또 그는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를 시작으로 빅리그 무대에 서게 되는 14번째 한국인 선수가 됐다. 한국과 일본, 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거친 선수로는 이상훈, 구대성, 박찬호에 이어 네 번째이다. 메이저리그를 거쳐 2011년 일본 프로야구 라쿠텐에 입단했지만 부상으로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김병현(넥센)까지 포함하면 5명째다.

컵스는 임창용을 2014년 주요 전력 중 하나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리빌딩에 들어간 컵스는 전반적인 마운드 개편이 시급한 상황이다.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는 가운데 40인 로스터 확장에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지난 5일까지 총 9명의 선수를 불러올렸고 이 중 절반이 불펜 요원이다. 지난 5일 불펜 평균자책점이 4.17로 내셔널리그 14위에 처져 있는 컵스의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데일 스웨임 컵스 감독은 2014년 구상을 원점에서 시작할 듯 보인다. 이번 로스터 확장에서 많은 선수를 불러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불펜은 마무리부터 전면 개편이다. 올 시즌 팀 내 혼란을 틈타고 마무리 자리를 꿰찬 케빈 그렉이 불안한 모습을 보였음은 물론 장기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새 판을 짤 가능성이 높다.


스웨임 감독도 “9월에는 페드로 스트롭을 마무리로 시험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내년을 내다본 포석이다. 그러나 스트롭이 마무리로 직행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스웨임 감독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어떤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라면서 “많은 선수들이 MLB에 올라왔고 오프시즌은 길다. 내년 스프링캠프 때까지 어떤 결정이나 계획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무한경쟁을 예고했다.

결국 임창용도 이제 출발선에 섰다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스프링캠프까지가 진짜 승부처다. 팀에서 기대를 걸고 있지만 임창용 스스로가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전망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임창용은 현재 불펜 요원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단점을 갖고있다. 다만 경험은 가장 풍부하다. 과연 임창용이 자신의 경쟁력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지난 8일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경기에서 역사적인 메이저리그(MLB) 첫 경기를 치른 임창용은 그 후 2경기에서 등판하지 못했다. 몸 상태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임창용 스스로 “연투가 가능하다”고 자신할 정도로 몸 상태는 어느 정도 올라왔다. 하지만 ‘경기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국내 프로 입단 19년 만에 MLB 입성
선수생활 고비마다 ‘마이웨이’개척

데일 스웨임 시카고 컵스 감독은 일단 임창용의 등판을 ‘지고 있는 상황’에 한정시켜 놓았다. 부담 없는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르라는 배려다. 사실 처음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컵스는 올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다. 승리에 대한 압박이 그리 크지 않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지만 MLB 첫 시즌을 맞이하는 임창용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여건이었다. 컵스가 상대적 약체라 이기는 상황보다는 지는 상황이 더 많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창용이 승격한 이후 컵스의 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컵스는 임창용의 승격 첫 날이었던 5일 마이애미 말린스전에서 9-7의 역전승을 거뒀다. 임창용이 나올 만한 타이밍이 마땅치 않았다. 7일 밀워키전에서도 8-5로 이겼다. 초반부터 앞서 나가 임창용의 등판은 무산됐다. 9일 밀워키전에서는 1-3으로 졌지만 6회까지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창용은 이날 경기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역전당한 통에 등판 타이밍을 놓쳤다.

신시내티 원정 첫 경기였던 10일 경기에는 선발 트래비스 우드가 7이닝 6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 역투를 펼치며 2-0으로 이겼다. 임창용보다는 기존부터 활용했던 필승조들이 먼저 부름을 받았다. 2-0으로 앞선 8회에는 장기적인 기대주인 페드로 스트롭이 마운드에 올라 1이닝을 책임졌고 9회에는 팀 마무리 케빈 그렉을 올려 임창용에게는 경기 끝까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임창용과 추신수와의 맞대결이 미뤄졌다. 임창용 승격 이후 컵스가 3승2패로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한가닥 위안으로 삼아야 할 판이다.


인고의 세월 끝에
드디어 밟은 MLB

임창용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지역우선 드래프트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첫해를 대부분 2군에서 보냈다. 당시 해태 2군 감독이였던 김성근 감독의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입단 2년차때부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96년 20살 임창용과 34살 김정수가 뭉쳐, 마치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스 마리아노 리베라-존 웨틀랜드처럼 불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정규 시즌 1위, 팀의 8번째 우승에 공헌했다.

97년 풀타임 마무리로 데뷔한 임창용은 14승 8패 26세이브를 기록하며 해태의 마지막 우승에 공헌했다. 이해에 임창용은 불펜과 마무리로 135이닝을 소화하였는데, 이는 93년 선동열이 125이닝 소화한 것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창용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98년 시즌 최다인 34세이브를 기록하며 22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구원왕에 오른 바 있다.

99년 삼성에서 보낸 첫 시즌,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38세이브와 2.14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여 두 부문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위기 상황 때마다 부르면 항상 나온다”는 뜻으로 자사의 휴대폰 브랜드인 “애니콜(Anycall)”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혹사에 가까울 만큼 많은 경기를 소화해냈다. 2000 시즌까지 삼성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임창용은 두산 베어스의 진필중과 함께 한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 양대 산맥으로 꼽힐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2001 시즌부터 그는 마무리 투수에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옮겼다. 2001 시즌 14승, 2002 시즌 17승, 2003 시즌 13승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쌓으며 김진웅, 배영수와 함께 삼성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특히 2002 시즌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정규 시즌 및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한편, 그는 국가 대표로도 많은 활약을 펼쳤는데,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등 세 개의 국제 대회에 출전하여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에 큰 일조를 했다.

프로 야구 2003 시즌이 끝난 뒤 선동열이 삼성의 수석 코치 겸 투수 코치로 새롭게 부임하면서 그는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옮겼다. 그해 임창용은 정규 시즌 36세이브, 평균 자책점 2.01을 기록하며 여전히 최강 마무리투수임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시즌 막바지에 구위가 떨어지면서 포스트시즌에선 좋지 못한 기량을 보여 줬다.

2004 시즌이 끝난 뒤 자유 계약 선수(FA)가 된 임창용은 일본 프로 야구(NPB)에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 구단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끝내 영입을 포기하였고, 그의 높은 몸값에 대한 부담과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점 등이 빌미가 되어 한국의 다른 구단에서 선뜻 그의 영입을 조심스러워 했었다. 결국 소속 구단 삼성과 재계약을 맺으며, 심정수, 정민태에 이어 리그 전체에서 고액 연봉 3위를 기록했다.

추신수, 류현진
그리고 임창용

2005 시즌은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이자 임창용이 FA 계약 후 맞이한 첫 시즌이었다. 그는 다시 선발 투수로 보직을 옮겼지만, 2004 시즌 말부터 계속된 제구력 및 구위의 난조로 5승 8패 3홀드, 평균 자책점 6.50이라는 그의 프로 생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것은 그에게 혹사의 후유증이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 것이기도 했다. 2005 시즌 도중 팔꿈치 부상을 당한 임창용은 결국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다. 2006 시즌에는 재활에만 전념하였으며, 그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되어서야 1군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6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선 연장 12회에 구원 투수로 등판해 한화의 중심 타자 김태균을 상대로 148 km/h의 강속구를 뿌리며 삼진을 잡아 조금씩 부활을 알렸다.

한국인 14번째 빅리거…역대 최고령
시속 160km 공포의 ‘뱀직구’주무기

2007 시즌, 에이스 배영수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가운데 구단과 팬은 선발 투수 임창용에게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기량은 회복되지 못했고, 5승 7패 3홀드, 평균 자책점 4.90이라는 성적으로 2005 시즌과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여 줬다.

2007년 시즌에도 자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내면서 뭔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동기 부여를 찾게 된다. 고민 끝에 임창용은 일본 리그 진출을 다시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2004년 시즌 후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와 맺었던 2년 FA 계약이 끝나는 시점인데다 삼성 구단은 그가 해외 진출을 원할 경우 조건없이 풀어주기로 미리 합의해 놓았었기에 일본 진출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2007년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가 끝나자마자 그는 일본 진출을 하고 싶다고 구단측에 말했고, 흔쾌히 동의를 받았다. 2005년부터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을 뿐더러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단 새로운 리그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더 중요했기에 “인생의 황금기는 한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정체된 나를 깨우고 싶었다”라는 말을 남기며, 몸값이 낮더라도 상관없이 어떻게든 일본에 진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일본 프로 야구단 중 센트럴 리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그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다. 2007 시즌이 끝난 뒤 야쿠르트는 에이스 투수 2명, 용병 세스 그레이싱어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좌완 이시이 가즈히사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하면서 투수진이 크게 약화되었기에 임창용 영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임창용은 결국 야쿠르트와 2년 계약, 연봉 1500만엔(약 1억2400만원)에 합의함으로써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했다.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한 임창용은 팀의 간판 마무리 투수로서 2008년 첫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했다.

강타자 농락할
여전한 뱀직구

200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개막 첫 경기 때 셋업맨으로 등판했으나, 마무리 이가라시 료타의 부상으로 바로 그 다음날 마무리로 등판하면서 일본 진출 후 첫 세이브를 따냈다. 이 날 첫 삼진을 잡은 선수는 놀랍게도 이승엽이었다.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줌으로써 현재까지도 팀의 주전 마무리로 2009년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도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팀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에 일조했다. 팬들로부터 야쿠르트 ‘수호신’이라는 말과 함께 ‘미스터 제로’ ‘이무타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강속구는 마치 뱀처럼 빠르고 꾸불꾸불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하여 ‘뱀직구’라 불리며, 최고 구속은 일본에서 세 번째로 빠른 160km/h이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선수 중 최초로 올스타전 팬 투표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 진출 2년 만에 스스로 퀼리티를 높여, 실력을 인정받고 첫해 기본 연봉 30만 달러, 2010년 50만 달러(추정)에서 2010년에는 200% 증가한 기본 연봉 160만 달러에 재계약을 했다. 그러나 2012년 시즌 중 발생한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에 전념했으나 결국은 그해 11월15일 야쿠르트에서 방출되었다.

2012년 12월14일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이로써 역사상 4번째로 한국 프로 야구 , 일본 프로 야구 , 미국 메이저리그 순으로 활약하게 된 선수가 됐다. 그리고 엔트리에 올라와 2게임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임창용은?>

▲전남 광주 출생
▲해태 타이거즈
▲방콕 아시안게임 한국 야구 국가대표
▲삼성 라이온즈
▲시드니 올림픽 한국 야구 국가대표
▲부산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
▲시카고 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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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