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특집> ③명절에 더 그리운 정재계 인사들의 망향가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9.17 08: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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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하면 뭐합니까? 고향도 못가는 신센데…"

[일요시사=특별기획팀] 태어나서 자란 곳. 마음속에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설과 추석에는 이곳을 찾는다. 바로 고향이다. 그런데 명절만 되면 가슴 한편이 답답한 이들이 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38선 너머가 고향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퍼토리 (중략)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 봤으면 좋겠구나라구요'

가수 강산에가 전쟁 때 북한에서 남하한 모친이 평소 고향을 그리워하던 모습을 보고 만든 '라구요'라는 노래다. 강산에는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부모가 함경도 흥남 출신으로 6·25 전쟁 발발 이후 거제도로 피난 온 실향민 2세대다. '라구요'의 가사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고향산천에 대한 피난민들의 그리움을 위로한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은 풍요와, 오랜만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설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고향인, 또는 북한에 부모, 형제가 있는 실향민들에게는 명절이 더 외롭다.

명절 기간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지역구를 다니면서 지역현안과 민심을 살피는 등 분주한 행보를 보인다. 요즘에는 지역정서를 지배한 특정정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한풀 꺾였다고 평가됨에 따라 정치인들의 추석 민심탐방을 위한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갈 수 없는
그리운 마을


하지만 탈북자 출신의 국회의원 1호,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에게 있어서 추석은 다른 의원들과는 조금 다르다. 조 의원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이다. 그는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상급교원(교수)으로 재직하다가 1994년 탈북 했다. 남한에 정착한 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과 통일부 통일교육원장을 지냈다. 지난해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4번을 받아 '탈북자 1호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아버지가 북한에서 정무원 건설부장(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냈을 정도로 엘리트 집안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일성 일가와 장·차관급 자제들만 다닌다는 평양 남산학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생인 김평일과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북한 최고 명문인 김일성 종합대학교 자동조종학과를 졸업하고 준 박사 학위를 땄다. 북한의 학위는 3단계로 대학을 졸업하면 기사, 2년 과정을 추가로 마치면 준 박사, 3년 과정을 더 마치면 박사이다.

그가 탈북을 선택한 시기는 중국 난카이대학 교환교수 시절, 자유를 박탈한 북한 사회와 김정일 정권에 염증을 느껴 1994년 7월 월남했다.

남한으로 넘어온 뒤에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국내 최고의 대북전문가로 활동하며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과 전망을 내놓았다. 국내 최고의 북한 전문가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평양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한 전 총리의 부모 역시 평양이 고향이다. 부친은 당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으며 모친은 평양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로 인해 한 전 총리의 부모도 평양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왔다. '한 달만 피해 있다가 돌아오면 평온해질 거다'라는 생각에 집문서며 값나가는 패물은 마당 한구석에 깊이 묻어두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평양에 돌아가지 못했다. 한 전 총리가 다섯 살 때 일이다.

한 전 총리는 6남매 중 맏딸로 자랐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살림살이는 날로 쪼들려 갔고 어린 한 전 총리는 일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탈북자 의원 1호 조명철 의원
평양서 태어난 한명숙 전 총리
탈북자 희망 김용 한아홈쇼핑 회장
갈 곳 없는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이화여대 불문과, 대학원 여성학 석사를 수료하고 1967년 박성준 성공회대 NGO대학원 평화학 겸임교수와 결혼했으나 6개월 만이던 68년 남편이 유신정권에 의해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5년형을 받자 13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던 한 전 총리는 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됐고 90년대에는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이끌었다.

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냈고 참여정부에서는 환경부 장관과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임명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5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 및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아 검찰 조사를 받았다. 5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에 대해서는 지난 3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으며 9억원에 대해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인천광역시 의회 노경수 전 의원은 황해북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금광을 운영해 노 전 의원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부친은 부인과 노 전 의원을 포함한 3남2녀 형제들을 데리고 탈북했다.

그의 부친은 경북 김천에서 아연광을 발견해 광산업으로 큰돈을 만졌으나 사업에 실패해 인천 강화에서 인삼을 재배했다. 서울 광성고와 수원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온 노 전 의원은 2001년부터 2012년까지 인천 중구 시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며 인천광역시의회 부의장, 민주평화통일회의 인천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인천 중구청장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풀리지 않는
실향의 아픔

북한 땅에 고향은 둔 기업인들에게도 명절은 유난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날이다. 직원들이 저마다 고향집을 찾아 떠나는 동안 쓸쓸히 사무실 한 귀퉁이를 지키며 고향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개중에는 망향의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이들도 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개발 등 대형 납북경협 사업을 이끌어낸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2007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이 대표적이다. 함경남도 이원 출신으로 낙농업의 기틀을 다진 고 김복용 매일유업 전 회장도 2006년 별세했다.

정 명예회장은 강원도 통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가출, 상경해 사업에 뛰어들어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 자신의 아호를 고향 마을인 '아산리'에서 따와 '아산'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고향에 대해 각별한 정을 나카냈다.

1946년 월남한 김 전 회장은 71년 정부 투자기업 한국낙농가공을 인수해 매일유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뒤 낙농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대북 지원 단체를 통해 북한 어린이들에게 두유제품을 제공하는 등 고향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귀순가수 1호
파란만장한 삶

귀순가수 1호이자 사업가 김용 한아홈쇼핑 회장의 고향은 자강도 강계군이다. "고향생각을 잊으려 명절 때면 외국에 나간다"는 김 회장은 베트남 최초의 홈쇼핑 방송국 HSV 오너다.


김 회장은 자강도 체육단 및 국가종합체육단 청소년조 빙상선수를 거쳐 평양국립교향악단 솔로가수가 되어 평양에 올라오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는 91년 귀순했다. 스위스로 망명을 한 뒤 한국을 택했다. 일반적인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통해 귀순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것을 감안할 때 북한 사회에서 꽤나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랐음을 예상케 했다.

김 회장이 탈북하기 전 작고한 아버지는 당 간부였고 매형은 김일성 고급당학교 간부인 조직비서였다. 양봉이 300본 정도였고, 양도 50∼60마리 정도 키웠다. 북에서도 권력층만 타는 벤츠를 굴렸다.




김 회장은 스케이트 선수였다. 10년 터울의 친형과 함께 선수생활을 하다가 죽기 살기로 노래를 배워 평양국립교향악단 바리톤 솔로가수로 스카우트됐다. 그러나 3년 뒤 가수의 길을 버리고 중앙당 면접시험을 본 후 해외자금을 북한에 대는 중앙단 산하 105호실 책임지도원이 됐다. 그러던 그는 불현듯 공산주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에 머물다가 9개국을 거쳐 스위스에 도착해 망명했다. 현재까지 북한 국적의 사람이 여권을 갖고 귀순한 건 김 회장이 유일하다.

귀순 이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수로 왕성하게 방송 활동을 하며 사업으로 승승장구했지만 급격한 사업 실패와 이혼을 겪으며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자신이 운영하는 북한 음식 전문점 '모란각'을 재오픈해 식품유통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홈쇼핑 채널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모란각 제품을 팔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당시 미국·캐나다·호주·일본 전지역에 모란각 제품을 유통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것이 베트남.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도움으로 2011년 HSV(베트남 홈쇼핑)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지난해에는 베트남 이웃 국가인 캄포디아에 진출해 HSC(캄보디아 홈쇼핑)을 설립했다. 캄보디아 첫 홈쇼핑 방송이다.

김 회장은 명절이면 한국에 없다. 대부분의 매스컴이 추석 기간 동안 고향 혹은 가족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명을 달리했다. 귀순을 택한 김 회장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 회장은 상갓집 문상도 가지 못한다. 김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진각 실향민 합동차례에 몇 번 가봤는데 돌아올 때면 더 힘들어 요즘은 안 간다"며 "술 한 병 사들고 통일전망대에서 밤새 통곡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고향에 공장 지은 안유수 에이스침대 회장
납북 경협 공신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도 이북 출신이다.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는 원산에서 다녔으나 다시 부친(고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주)의 전근으로 다시 함흥으로 이사 함흥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박 회장은 해방 직후 고향을 등졌다. 그가 24세 때인 1945년의 일이다. 단신으로 함흥을 떠나 철원에서 38선을 넘어 월남, 동두천에서 서울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왔다. 꼬박 1주일이 걸렸다고. 하지만 두 달 뒤 다시 월북, 먼저 부친을 설득해 단신 월남하게 하고, 이듬해 3월에는 6남매를 다 데리고 함께 월남했다. 반년 사이에 38선을 3번이나 오간 것.

올해 91세인 박 회장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왕성하고 정력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회사 경영은 97년 아들 박진선 사장에게 넘기고 물러났지만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한국식품공업협회장,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 한국 중견기업연합회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북한과 관련된 사업은 추진하지 않았으나 이북5도 행정자문위원, 함경남도중앙도민회 고문 등의 역할을 맡는 등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90년대 초에는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회장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를 역임하여 고통받는 북한 아동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전개했으며 샘표식품에서도 매년 극빈자용 음식을 지원하는 푸드 뱅크에 1억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7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향땅 한번 밟아보지 못했다. 지난 2000년 박 회장을 포함한 이북 출신 기업인들이 북한으로부터 정식 초청장을 받아 세부 계획까지 짰지만 북한 측의 급작스러운 변심으로 무산된 바 있다. 그가 명절에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남양주에 있는 선친 묘소가 전부다.

에이스침대 창업주 안유수 회장은 고향 땅에 공장까지 세웠다. 안 회장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다. 1951년 1·4후퇴 때 홀로 월남한 안 회장은 서울 노량진에서 침대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회사를 일구었다. 그는 1997년부터 사리원 일대에 도로정비와 민속거리 조성, 갈마국제호텔 가구공급 등을 펼쳐왔다. 2007년에는 침대공장 설립을 위한 첫 삽을 뜨기도 했다.

2008년 5월에는 58년 만에 처음 육로를 이용해 고향을 방문해 사리원의 예술극장에 의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안 회장은 개성공단에 입주하는 편한 길을 마다하고 고향에 공장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에이스 사리원 공장
경협 획기적 사례

자본금은 20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180억원)로 에이스가 70%(130억원), 북한 광명성총회사가 30%를 출자했다. 공장은 총 대지면적 12만m², 건물면적 2만3200m² 규모이며 침대의 매트리스와 프레임을 생산한다.

이 사업은 국내 최초로 남북 간 육로를 통한 물자와 인원의 상시 왕래를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남북 경협의 획기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장치혁 전 고합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대북 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평북 영변 출신의 장 회장은 고합그룹을 내세워 91년부터 대북 경협 활동을 해왔으며, 김영삼 정부 때의 금강산 유람선 사업과 김대중 정부 들어서의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분식회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경영뿐만 아니라 대북 활동까지 모두 접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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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6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서영교 의원을 누르고 22대 더불어민주당 2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김 원내대표는 내란 종식과 헌정 질서 회복, 권력기관 개혁을 외쳤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청래 신임 당 대표가 선출됐다. 이재명정부 첫 여당 지도부가 제모습을 갖추면서 안정 궤도에 접어드는 듯했다. 약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정청래 대표의 첫 갈등이 불거졌다. 정 대표가 지난 9월11일 여야 원내 지도부가 합의한 3대 특검법 합의안에 대해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고, 지도부 뜻과 달라 재협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다. 불안불안 이인삼각 특검법 개정안의 핵심인 기간 연장을 제외한 채 합의해 특검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게 정 대표의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곧바로 반박했다. 원내 지도부와의 긴급회의를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취재진을 향해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그래!”라며 소리쳤다. 이후 당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지자 김 원내대표는 오히려 취재진을 향해 “왜 자꾸 합의라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는 “(합의가 아니라) 1차로 논의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며 “수사 기간과 규모에 다른 의견에 있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제 총론만 (발표)하고 나갔는데 원내수석들이 각론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마치 합의가 된 것처럼 보도됐다”며 합의문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사흘 만인 13일 봉합됐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의 SNS에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 내란 종식과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이렇게 냉전은 끝났지만 지지층의 비난은 거셌다. 김 원내대표를 향해 ‘수박’ ‘변절자’ 등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당 대표를 지냈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행보와 비교하는가 하면 ‘역시 서영교 의원을 뽑아야 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지지층의 미묘한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검사 징계안을 놓고 두 번째 갈등이 터졌다. 법사위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장 18명을 고발한다고 밝힌 데 대해 “협의가 없었다”고 선을 그으면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지난달 19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무소속 등 범여권 의원들은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검사장 18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당 간사인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조직 기강과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검사장 18명의 집단 항명 행위에 대해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당심’이 뽑은 정, ‘의심’이 뽑은 김 연일 삐거덕…벌써 이재명 리더십 부재? 김 원내대표는 고발 소식이 알려진 뒤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봤다”며 “그렇게 민감한 것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해야 한다. 협의를 좀 해야 했다”고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 “뒷감당은 거기서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발장을 제출한 법사위 쪽에 책임을 물었다. 법사위의 검사장 고발은 원내 지도부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용민 의원은 검사장 고발 문제에 대해 “당의 기조와 흐름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고발장을 그날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뿐, (원내 지도부와) 소통이 없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원내(지도부)와 소통할 때 이 문제를 법사위는 고발할 예정이라는 걸 얘기했다”며 “원내가 많은 사안을 다루다 보니까 (고발 문제를) 진지하게 듣거나 기억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일이라면 원내대표는 말 그대로 원내 상황을 조율하고 총괄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으니 (민주당) 의원들도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조금씩 노출되면서 지지층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과 원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민주당의 배경에는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의 선출 방식이 거론된다. 강경 지지층이 밀어 올린 정 대표와 달리 김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당시 원내에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수 포진했던 만큼 김 원내대표 의중은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에 가깝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개혁을 외치는 정 대표의 지지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강성 지지층에게 김 원내대표는 이미 ‘투아웃’이다. 여기에 정 대표의 공약이었던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 반영 비율을 ‘1대 1’로 변경하는 당헌·당규 개정이 부결되면서 지지층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밑서 치솟고 위서 누르고 그동안 민주당은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규정해 왔다. ‘동등한 1인1표제’는 정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정책 중 하나로 “나라의 선거에서 국민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하듯 당의 선거에서도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 두 사람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정 대표 쪽에선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때부터 추진됐던 개혁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 ‘시기’와 ‘방법’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권리당원의 힘으로 대표직에 오른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1인1표제를 추진하자 친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와 일부 당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1인1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최고위원은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절차의 정당성·민주성 확보, 그리고 취약 지역(영남 등)에 대한 전략적 규제와 과소 대표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친명계인 윤종군 의원도 SNS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 방향에 동의한다”면서도 “전 지역 권리당원 표를 1인1표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TK(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당원 자긍심 저하, 당세 확장 장애 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과 관련해서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 대표는 당 컨트롤이 안 되고, 원내대표는 의원들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난 지도부(이재명 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가 워낙 합이 좋았고 당 대표 리더십도 강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중심축이 없으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반 발자국만 앞서도 자기 정치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정 대표의 1인1표제는 중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일 치러진 투표 결과 중앙위원 총 593명 중 373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77표, 반대 102표로 과반이 찬성하지 않아 부결된 것이다. 남은 고비 얼마나? 원내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인 ‘정청래발 개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의 고충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조차 몇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 대표는 ‘개혁 골든 타임’을 필두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그런 김 원내대표가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을 못 박으면서 ‘쓰리아웃’은 겨우 면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내란전담재판부는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치한다”며 “여기에 대해 더는 설왕설래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 제한’ 조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내란 사범이 사면돼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적극 관철하겠다”며 “내란 사범을 사면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만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 내란 주요 피의자에 대한 내란죄가 확정될 경우 사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로부터 약 일주일 뒤인 지난 4일 범여권의 주도로 ‘내란전담재판부(내란특별재판부)’ 설치법이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는 해당 법안을 이달 중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며 속도를 냈다. 해당 재판부는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내란 사건 전담을 골자로 한다.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및 영장전담법관 추천위원회는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법무부 장관과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총 9명으로 구성된다. 내란전담재판부로 성난 지지층 달래도… 위헌 폭탄 껴안고 걸어가는 ‘불’꽃길 구성을 마친 추천위원회는 2주 안에 영장전담법관과 전담재판부를 맡을 판사 후보자를 각각 정원의 2배수로 추천해야 하며 최종 임명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구속기간은 최대 6개월이지만 특별법에서는 내란·외환 관련 범죄에 대해 구속기간을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힘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한마디로 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 쓰겠다는 ‘지귀연 판사 바꾸자는 법’”이라며 “사법부의 무작위 배당 원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미 재판하는 사건도 뺏어서 다른 판사한테 맡기겠다는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날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역시 “1987년 헌법 아래 누렸던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법에 여러 가지 위헌 요소가 있다”고 반대했다. 천 처장은 “헌법재판소가 결국 이 법안에 대해 위헌 심판을 맡게 될 텐데 헌재소장이 추천권에 관여한다면 심판이 선수 역할을 하게 돼 룰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며 “헌법재판소장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위헌심판)을 맡을 수 없게 된다면 ‘내란특별헌법재판부’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이 예정하고 있는 바”라고 설명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으로 개혁 동력을 얻었지만 후폭풍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헌 가능성을 지닌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건 위험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원내대표로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중도층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출신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민주당은 집단 의존 증상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만 대거 유입되다 보니 여당이 된 지금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라며 “2차 종합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내란전담재판부를 어떻게 꾸릴 것인지,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서 국민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종합적인 전략을 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175석 버거웠나 그러면서 “내란전담재판부가 설치되면 국민의힘이 위헌을 걸 것이고, 법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려면 민심을 우리 편으로 끌고 와야 하는, 법률 싸움이 아닌 고도의 민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팀’ 원내대표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때아닌 ‘내 편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 문진석 당 원내운영 수석 부대표가 인사청탁 의혹에 휩싸였지만 ‘엄중 경고’에 그치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2일 문 수석이 본회의장에서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문자로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내가 추천하면 강훈식 실장이 반대할 거니까 아우가 추천해줘”라고 보냈고, 이에 김 비서관이 “제가 (강)훈식이 형이랑 (김)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인사 청탁 논란이 불거지자 문 수석은 “부적절한 처신에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의힘은 ‘김현지 실세’ 프레임을 다시 띄우며 이재명정부를 압박했다. 김 원내대표의 엄중 경고로 논란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강성 지지층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며 더 강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