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그는 누구인가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9.09 14: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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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사냥? 빨갱이 소탕?…이석기는 불행했다

[일요시사=사회팀] 바람 잘 날 없는 정국이다.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그는 현재 국정원과 여야의 뭇매를 맞으며 절벽 끝에 간신히 서 있다. 논란의 주인공, 이 의원의 행적을 살펴봤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핵심에 오르기까지의 정치적인 과정과 사상적 실체는 이번 국가정보원 수사로 상당 부분 드러났지만, 그가 그 같은 사상을 갖게 된 데 영향을 미쳤을 인생 궤적은 베일에 가려진 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굴곡 많았던 여정…
음지에서 양지로…

1962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이 의원은 1980년 성남 성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는 선후배 사이가 돈독하기로 유명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렇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선배가 운동을 함께했던 후배를 책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용인은 인근 성남과 함께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집결지로 유명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영세한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다. 서울의 난개발에 쫓겨난 도시 빈민들이 몰려온 곳이었기 때문. 이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며 한국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의원은 현장 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치열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불태웠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이 의원은 한국외대 재학 당시 대학가요제에 참여한 타대학 학생인 부인을 TV로 보고 반해 직접 찾아가 교제를 청했고, 결국 1990년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2002년 부인과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좌파성향의 사회변혁·정치활동을 하는 인사들 가운데는 부부가 함께 같은 길을 걷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 의원의 전 부인은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혼자서 가계를 꾸려가던 부인이 2002년 이혼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혼 후 전 부인은 자녀들(1남 1녀)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이민생활을 했다. 일각에서는 이 의원의 장남이 24세 이전에 출국한 것으로 병무청에 신고돼 있는 점을 토대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이 의원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아파트 경비원에 따르면 이 의원은 올 5월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비원은 “오전 6시 반쯤 출근해 오후 11시 넘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혼자 살았던 걸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항상 기사가 집 앞에 데려다 줬는데 주차는 아파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했다”고 덧붙였다. 아파트 주민인 한 40대 남성은 “이곳에 사는지조차 몰랐다. 조용히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사를 보면 이 의원은 대체로 불행했다. 국방부 부이사관이던 누나는 수배생활을 하던 이 의원에게 생활비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후 “징계가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을 받았지만 기무사 조사 뒤 팔다리에 힘이 풀리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은 끝에 2005년 6월 숨졌다. 암투병 중 그를 옥바라지했던 모친도 2008년 3월 유명을 달리했다.

반면 이 의원은 꾸준히 개인 재산을 증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5월 사당동 아파트, 2009년 4월 여의동 J빌딩 6층을 각각 구매했다. 구매 당시 이석기가 운영하는 CNP전략그룹(현 CN커뮤니케이션즈)은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 2008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매출이 연 20억원대 이상으로 성장하였고, 이로 인해 민노당을 통해 개인 재산 증식을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인간 이석기’에서
‘양심수 이석기’로

이 의원이 현 정국의 중심에 서기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혁당 사건은 그에게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민혁당 사건은 ‘인간 이석기’를 ‘양심수 이석기’로 만들었고 이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의 초석이 됐기 때문이다.

민혁당은 1989년 결성된 반제청년동맹의 중앙위원장 김영환씨(<강철서신> 저자)가 1991년 잠수함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1992년 3월 결성한 지하 전위 조직이다. 민혁당을 주도했던 김씨가 이후 북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1997년 7월 해체를 선언했지만, 김씨와 함께 창설을 주도했던 하영옥씨 등은 이에 반대하며 민혁당을 유지했다.

한국외대 중국어통번역과 82학번인 이 의원은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으며 함께했다. 당시 재판부 기록에 따르면 민혁당 사건으로 이 의원의 수배 생활이 시작된 때가 1999년 8월이고, 도피 생활 끝에 체포된 때가 2002년 5월이다. 이 의원은 2003년 3월 반국가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6월 형을 선고받았다.


하씨와 이 의원의 관계는 돈독했다. 2003년 4월30일 민혁당의 중심이었던 하씨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먼저 석방됐다. 반면 이 의원은 당시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암 투병 중인 모친 김복순씨가 위독하자 특별휴가를 받고 일주일간 나올 수 있었다.

하씨는 지난해 이 의원의 부정 경선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소한 이후에는 이 의원과 만난 적이 없다”며 “제 부친상 때 문상을 와서 한 번 본 게 전부”라고 밝혔다. 이 의원 역시 지난해 5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수배 중이어서 민혁당에 가담해 활동한 적이 없다. 하영옥씨와는 10년 넘게 연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서 ‘동지애’불태워 
과거 민혁당 사건으로 정치입문 초석 마련

2003년 석방된 이석기 의원은 이후 정치권과 연을 맺는다. 그가 대표로 재직했던 정치 컨설팅업체인 CN커뮤니케이션즈(구 CNP전략그룹)를 통해서다. CN커뮤니케이션즈는 통진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노당의 사업을 독점했는데 그 때문에 “당권파의 자금줄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과거 당 정치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이석기 의원이 당시 직접 행사장에서 강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주로 강조한 부분이 동지애다. 동지와 조직이 함께하면 현재의 장애물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동지애’적 관점에서 이 의원은 수혜자이기도 하다. 이 의원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진당의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에 연루된 바 있다. 그는 통진당의 비례대표 경선에서 27%로 1위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경선 이후 제기된 부정의혹이 당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사실로 입증됨에 따라 통진당 내 특정계파의 개입과 주도에 의한 조직적인 표몰이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경선 과정 자체가 부정이었던 만큼 경선 과정에서 선출된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총 사퇴시켜야 한다는 것이 통합진보당의 공식입장이었다. 이에 이 의원을 비롯한 당권파는 재조사를 촉구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당시 부정선거 진상조사 위원회는 이 의원에 투표한 IP 60% 이상이 중복투표였으며, 소스코드가 개방된 직후, 이석기 후보의 득표가 73% 몰리는 비정상 상황이 연출되었음을 근거로, 이 의원 측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밝혀냈다. 비례대표에 1등으로 당선된 이 의원은 정작 통합진보당 당사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지 3개월밖에 안된 시기에 비례대표 후보에 등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이 의원은 자신의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통합진보당에 정계 진출의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들어온 것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동일 IP에서 투표한 비율이 가장 높은 후보는 나순자 후보로 밝혀졌다. 다른 후보들 역시 동일 IP 투표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당권파라 불리는 계파에서는 이 의원 한 사람만 출마했고, 참여계와 민주노총에서는 여러 명의 비례대표가 나와서 표가 분산됐다. 또한 통합연대의 요구에 따라 당권(투표권)을 한달만 당비를 내면 주기로 했고, 이를 이용하여 경선용 당원불리기에 적극 나선 후보들이 이런 문제를 야기한 측면이 있다. 적어도 이러한 전후맥락을 파악하면서 부정선거에 대한 진상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모두의 잘못이란 말과 당권파만의 잘못이란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의원은 과거 인터뷰를 통해 “국민은 이석기의 사퇴를 원하지 않으며 이석기 사퇴 운동은 야당연대를 음모하려는 수구세력의 공격”이라고 말했다. 선거와 관련하여 강기갑 비대위원장은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이 의원과 만나 사퇴를 종용할 예정이었으나, 이 의원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이 의원이 부정선거 의혹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만난 한 당권파 인사는 “민혁당 사건으로 수배와 수감 생활을 겪는 동안 이 의원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겠나. 아내와 이혼했고 어머니와 누나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서운한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 정치를 걱정한 사람이다. 고생한 사람에게 더운밥을 대접하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보여준 헌신 때문에 이 의원을 도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당권파의 핵심으로…
경기동부연합=이석기

지금 통진당 당권파를 지칭하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명칭이 외부로 알려진 때는 1990년대 중반이다. 1991년 전국연합이 결성됐을 당시 12개 지역 단체에 ‘경기동부연합’은 등장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에서야 전국연합이 공식적인 지역 단체로 이름을 올렸고 이후 세력을 넓혀갔다.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전국연합 아래 있던 경기동부연합은 진보 정당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을 해산했다. 그 이후 민노당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직적 측면에서 경기동부연합은 사라졌지만 인적 자원으로는 여전히 활동하며 진보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2011년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진보 대통합 논의 과정에서는 강경 노선을 유지하고, 반면 국민참여당(참여당)과의 합당을 주도했던 세력이 당권파였던 경기동부연합이다. 권영길 전 대표 등은 참여당과의 합당을 반대했지만, 당권파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통진당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5월 비례대표 부정 경선 논란에 섰던 이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참여당과의 통합을 먼저 제기하고 엄청난 논쟁을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가 당권파의 핵심 브레인임을 시인하는 발언이었다. 진보 정치를 또 한 번 뒤흔든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은 아직도 그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과 이 의원에게는 ‘종북’ ‘패권’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자연스레 다른 정치 세력과 여론이 외면했고 고립됐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의원은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진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불행한 가족사와 갖가지 의혹들
우여곡절 끝에 국회 입성했지만…

어렵게 여의도에 입성한 이 의원의 의정 활동은 과연 어땠을까. 그의 활동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증언이 많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재연 의원의 경우는 종종 집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의원은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의 존재감은 토론회 같은 곳에 출석하며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런 활동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입법 활동도 다른 의원들에 비해 미진했다. 법안 발의를 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10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통진당의 현역 의원 수는 6명이다. 때문에 다른 당 의원들의 서명이 필요했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이석기라는 이름이 법안에 들어가 있다면 어떤 의원이 서명을 하려고 하겠나. 이 의원과 함께 기록으로 남는 것에 부담감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5일 국회에 첫 출근한 이 의원은 “정의감으로 불타는 20대 운동권의 심정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채 안된 지난 5월12일 경기도당 간부들과 가진 회합에서 비현실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위기에 처했다. 깜짝 등원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뒤 ‘국가내란죄’로 추락하기까지 불과 1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석기의 몰락
예고된 시나리오

지난달 28일, 국정원과 수원지방검찰청은 이 의원의 사무실과 자택에 대해 형법상 내란예비음모 혐의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 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이기 때문에 체포영장은 청구되지 않았으나, 신체를 포함한 압수수색 영장은 발부됐다.

여러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국정원은 이석기 등 경기동부연합 계열 활동가들이 지난 5월 경기도 용인의 모처에서 모임을 갖고 경기남부지역의 통신시설과 유류시설 파괴를 모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국정원은 이석기가 2004년 산악회 형식의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을 결성해 1년에 1번씩 회의를 가졌다고 보고 있다.

당시 언론은 이석기가 도피했다고 보도했으나 이튿날 이 의원은 통합진보당의 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해 입장을 밝혔다. 이석기는 이 자리에서 “나에 대한 혐의내용 전체가 날조”라며 “유사 이래 있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탄압책동”이라고 발언했지만 결국 과반수가 넘는 국회의원들의 찬성으로 인해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다. 그는 현재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수원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이석기 의원은?

▲성남 성일고 졸업
▲한국외대 중국어통번역학과 졸업
▲한 과테말라 의원친선협회 이사
▲한 EU 의원외교협의회 회원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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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 오세훈 한강버스, 아라호 흑역사 오버랩

1000억 오세훈 한강버스, 아라호 흑역사 오버랩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시가 돛을 올린 한강버스가 고장 끝에 결국 멈췄다. 과거 ‘아라호 사업’도 재조명되고 있다. 아라호 사업은 2010년대 초반 경인 아라뱃길을 중심으로 관광 활성화와 교통난 해소를 위해 인천시와 공동으로 수백억원을 들여 기획한 수상 교통 프로젝트였다. 아라호는 시민들의 외면과 운영 적자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반면교사’로 삼았던 걸까? 서울시는 한강을 따라 운행되는 수상 교통수단으로, 서울 전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으로 지난 18일 한강버스 운항을 시작했다. 여의도, 잠실, 뚝섬 등 주요 한강변 거점과 지하철역을 연계해 시민과 관광객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게 핵심이다. 관광이냐 출퇴근이냐 서울시는 한강버스를 통해 관광 교통수단을 넘어 서울을 ‘한강 중심의 스마트 모빌리티 도시’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식 운항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운항이 중단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9일 오전 시청에서 열린 주택 공급 대책 관련 브리핑 도중 “한강버스 관련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며 “시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열흘 정도 운행 통해 기계적·전기적 결함이 몇 번 발생하다 보니 시민들 사이에서 약간 불안감 생긴 것도 사실”이라며 “이번 기회에 (운항을) 중단하고 충분히 안정화시킬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시는 이날부터 10월 말까지 한강버스 시민 탑승을 중단하고 성능 고도화와 안정화를 위한 무승객 시범 운항을 한다. 시는 국내 최초로 한강에 친환경 선박 한강버스를 도입해 지난 18일 정식 운항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22일에는 잠실행 한강버스가 운항 중 방향타 고장이 발생했고, 같은 날 마곡행도 운항 준비 중 전기 계통에 문제가 생겨 결항했다. 26일에도 운항 중 방향타 고장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운항 중단과 재개가 반복되자 운항 중단을 결정했다. 과거 아라호의 값비싼 교훈을 남겼지만, 실패 요인을 분석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결과다. 한강버스 역시 또 하나의 혈세 낭비 사례가 될 수 있다. 서울시 한 관계자는 “아라호 사례를 철저히 분석해 이번에는 실질적인 시민 편익을 제공하고 지속 가능한 운영 모델을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한강버스가 서울의 새로운 교통 패러다임으로 자릴 잡을지, 아라호의 전철을 밟을지는 향후 몇 년간의 운영 성과에 달려 있다. 서울시 아라호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첫 임기 때인 2010년 서울시가 예산 112억원을 들여 만든 2층 유람선으로 지난 2009년 5월부터 1년5개월을 들여 건조됐다. 오 시장의 지시로 건조된 아라호는 시민들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연과 한강특화공원 관람이 동시에 가능한 선상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한다는 영리 목적보다 공공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민자 유치 대신 재정이 투입된 사업이었다. 당초 아라호를 한강에서 인천 앞바다까지 운항하는 관광 크루즈선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여덟 차례 시범 운항과 21회 시험 운항만 했을 뿐 사실상 사업은 중단됐다. 제작 당시부터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논란을 빚었던 아라호는 정식 취항도 해보지 못한 채 팔렸다. 실제 운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보험료와 유지비 등 관리 비용에만 연간 1억원이 들어간다는 점도 매각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12억원 들여 29억원에 판 아라호 출항 나흘 만에 고장…오, 좌불안석 아라호가 정식 운항에 나서지 못했던 배경에는 서해뱃길 사업을 둘러싼 서울시와 시의회의 갈등도 있었다. 오 시장의 아라호 활용 계획에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다수인 시의회가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10월 고 박원순 전 시장이 취임 후 사업 타당성 문제로 매각을 결정하면서 오 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이 백지화됐다. 결국 서울시는 아라호 매각을 결정한 후 지난 2013년 5월, 106억원의 예정 가격으로 매각 입찰에 나섰으나 응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이후 2차 입찰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알만한 이들은 알겠지만, 선박 사업은 수요를 찾기 어려운 사업 중 하나다. 결국 서울시는 3차 매각 입찰에서 최초 예정 가격에서 10% 인하된 95억원으로 깎았지만 이마저도 입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같은 해 11월, 4차 매각에서 15% 인하된 90억원에 입찰을 시도했지만 응찰자가 없어 가격 인하의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 서울시는 지난 2016년 아라호를 매각하지 못하자 결국 임대 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아라호가 정식 운항도 못한 채 6년 넘게 여의도 한강공원 선착장에 방치되면서다. 서울시가 제시한 사업 기간은 연말까지 8개월이고 한 차례 1년간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다. 당시 최저 임대료는 2억6300만원이었다. 아라호는 임대 사업을 시작해 건조 6년 만에 빛을 봤지만, 운항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강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아라호는 지난 2016년 민간업체인 레츠고코리아가 임대사업권을 낙찰받아 3년간 운영하다가 2018년 이랜드그룹 계열사 이랜드크루즈로 사업권을 넘겨줬다. 이랜드크루즈가 사업권을 따낸 시점은 지난 2018년 3월이지만 실제 운영은 2019년 6월부터 시작됐다. 이전 사업자인 레츠고코리아가 서울시의 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유람선과 시설물 반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랜드크루즈는 1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지난 2019년 6월부터 운영을 시작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수익성 악화로 아라호의 임대 운영 사업을 1년 만에 접어야 했다. 애물단지 전락하나 이랜드크루즈는 임대계약 갱신청구권(1년)마저 포기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무렵부터는 주식회사 수가 임대사업권을 이어받았다. 이후 마지막으로 인더라인25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사업하는 조건으로 서울시와 지난 2022년 12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년 단기 임대계약이 종료된 이후에도 인더라인25가 철거하지 않아 서울시는 골머리를 앓았다. 아라호 운항은 멈췄지만, 선착장을 한 달째 무단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더라인25는 계약 연장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서울시는 인더라인25를 상대로 명도소송, 점유 이전 금지 가처분, 행정 가처분 등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아라호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수요 예측 실패와 운영비 부담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아라호가 연간 수십만명의 승객을 유치할 수 있다고 예상했으나, 실제 이용객은 예측치의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 노선 설계가 시민들의 일상적인 통근이나 이동과 잘 맞지 않았고, 요금 역시 육상 교통수단에 비해 비쌌다. 결과적으로 관광객 유치에도 한계가 있었고,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아라호는 철수될 수밖에 없었다. 아라호는 건조한 지 15년 만에 민간에 팔렸다. 지난 1월 서울시 한강 유람선 아라호는 5차례 입찰 끝에 약 28억5780만원에 팔려 민간업체에 인도됐다. 2013년부터 총 9번의 입찰을 시도한 결과 3분의 1 가격에 달하는 헐값에 팔린 셈이다. 당시 서울시에 따르면 아라호는 2024년 11월 말 공개입찰을 진행한 뒤 지난달 주식회사 마이랜드와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 길이 58m에 688톤 규모의 아라호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과 서강대교 남단을 오갔다. 승객은 총 310명까지 태울 수 있다. 음악회, 공연, 결혼식, 영화 상영을 위한 시설도 보유했다. 선착장에는 편의점, 치킨집 등 부대시설도 있었다. 아라호는 건조 후 15년 만에 매각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후임 고 박원순 시장이 2012년 사업을 백지화하면서 5년간 방치됐다. 2013년 5월 처음으로 공개입찰에 넘겨졌다. 시는 같은 해에만 총 4번의 입찰을 추진했으나, 입찰자가 없어 매번 무산됐다. 실패했지만 이번엔 달라? 서울시는 수의계약 방식으로도 매각을 시도했으나, 매각사의 자금 동원 문제로 불발됐다. 이에 시는 2016년 아라호를 매각하는 대신 민간 위탁하는 방향을 택했고, 2017년부터 민간 위탁을 통해 운영했다. 하지만 임대계약이 만료되면서 지난해 5월 말부터 운항이 중단됐다. 그러자 시는 다시 매각을 시도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총 5차례의 입찰을 진행했고, 같은 해 11월 말 입찰자가 나와 12월 매각 계약을 맺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그간 아라호의 위탁 운영은 선박 운항이 아닌 선착장 내 치킨집 등 부대시설 위주로 돌아갔다”며 “자연스레 선박도 노후화되고, 전반적으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다시 매각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법적 분쟁으로 얼룩진 아라호를 통해 한강에 배 띄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지만, 이번엔 다르다고 한다. 서울시는 이번 한강버스 사업에서 아라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3가지 전략적 과제를 내세우고 있다. 먼저, 실제 수요 기반의 노선 설계를 강조했다. 또 관광 중심이 아닌, 출퇴근·생활 교통을 고려한 정류장 배치, 그리고 지하철·버스 환승과의 연계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요금 체계를 내세우기도 했다. 기존 대중교통과의 환승 할인을 적용하고, 관광·레저용 프리미엄 서비스와 생활 교통 요금제의 이원화를 강조했다. 또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 전기·수소 하이브리드 선박을 도입했고, 실시간 교통 정보 제공 및 안전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서울시가 한강버스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난해 들인 초기 사업비는 약 542억원으로 향후 발생할 총 사업비는 약 1500억~1750억원으로 예상된다. 아라호 사업비보다 10배가량 많은 혈세가 투입될 예정이다. 한강버스는 출·퇴근용 선박인 만큼 이용객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척의 선박이 필요하다. 지난해 3월 한강버스 운영사는 6척의 선박을 납품받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현재는 첫 출항 이후 3척이 운항 중이며, 향후 6척의 선박이 모두 납품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도 선착장 시설, 운영 시스템, 접근성 개선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가 포함돼 총사업비가 1000억원대 중반까지 증가한다. 묻지 마 10배로 베팅 6시에 나와야 9시 출근 아라호는 ‘유람선 제작’이 중심이고, 공연시설 등이 포함된 문화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의 선박이었다. 시설 설계가 크고 복잡한 부분이 있지만, 수량이 하나라 규모 면에서 제한적이기에 한강버스와 다르다는 결론이다. 반면, 한강버스는 여러 척의 선박을 건조해야 하고, 선착장 설치 또는 보수도 그만큼 갖춰져야 한다. 또 전기 또는 하이브리드 선박을 도입한 만큼, 유지비용도 클 뿐만 아니라 홍보, 안전, 시험 운항 등 여타 부대 비용에 민간투자금 및 보조금 등이 혼합돼있어 사업비 증액은 여러 원인으로 발생한다. 한강버스 사업비가 초기 대비 크게 증가한 이유로 업체 선정 과정에서 계약 조건, 예상보다 오래 걸린 공정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선박 제작 능력이 있는 업체와 없는 업체 간의 차이를 분석했는데, 일부 업체는 인프라가 부족하거나 준비가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아 계약이 무산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강버스는 대중교통 기능이 강조되면서 ‘출퇴근 수단’ ‘교통망 보완’ 등의 역할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초기 투자비가 크더라도 지속 운영을 통한 수요 확보가 전제된다. 하지만 계획 대비 수요가 예상만큼 확보될지, 운영비와 적자 보전 부담이 얼마나 될지는 논란 중이다. 한편, 한강버스는 정식 운항 나흘 만에 선박의 방향타 고장 등으로 잇따라 멈춰 승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지난 23일 기준 누적 탑승객이 1만명을 돌파하는 등 시민들의 큰 관심을 받은 한강버스가 정시성 확보가 중요한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매체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7시쯤 옥수선착장을 출발한 잠실행 한강버스가 강 한가운데서 20여분간 멈춰섰다. 결국 승객들은 종착지까지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 내려야 했다. 한강버스 운영사는 고장 선박을 뚝섬 선착장에 접안한 뒤 승객들을 모두 하선시켰고, 뚝섬에서 잠실까지 구간의 운항을 취소했다. 지난 18일 정식 운항을 시작한 지 나흘 만에 발생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안내 방송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탑승객은 “20분이 넘게 서 있었고, 안내 방송이 안 나오고 승무원도 안 계시고…. (뚝섬 선착장) 도착하기 2~3분 전에 승무원이 ‘이 배 잠실까지 안 간다’고 뚝섬에 다 내리셔야 된다고…”라고 말했다. 이 사고와 별개로 같은 날 오후 7시30분에 잠실 선착장을 출발할 예정이었던 마곡행 한강버스는 선박 고장으로 아예 결항됐다. 그 바람에 강서 방향으로 이동하려던 시민들은 황급히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다. 승부수? 무리수? 서울시는 두 선박 모두 전날 밤 안정화 조치를 거쳐 다음 날인 23일 운항에는 차질이 없다고 밝혔다. 또 선내 안내 방송이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선 한강버스 운영사가 이상을 감지한 뒤 원인을 파악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려 안내에 일부 지연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현재 한강버스는 마곡-망원-여의도-압구정-옥수-뚝섬-잠실 28.9km 구간을 상하행 7회씩 총 14회(첫차 11시) 운항하고 있다. 소요 시간은 마곡에서 잠실까지 127분이다. 여의도에서 잠실까지는 80분이다. 추석 연휴 이후인 다음 달 10일부터는 출퇴근 시간 급행 노선(15분 간격)을 포함, 평일 기준 왕복 30회로 증편한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