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경제민주화 기조 후퇴 논란 전말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9.02 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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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옥죄기' 일단 멈춤 "6개월 만에 '백기'?"

[일요시사=경제1팀] 박근혜 대통령이 10대그룹 총수들과 청와대 오찬을 가졌다. 대통령은 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당부했고 참석자들은 향후 투자계획을 설명하면서 정부 측의 지원을 요청했다. 일단은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은 모양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재벌 달래기'를 두고 경제민주화가 대폭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실상 경제민주화를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청와대로 국내 민간 10대그룹 총수들을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했다. 이 자리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김창근 SK 의장, 구본무 LG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이재성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조양호 한진 회장, 홍기준 한화 부회장, 박용만 두산 회장, 허창수 GS 회장 등이 참석했다.

모두발언 요점
재계 기 살리기

박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그동안 어려운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투자확대와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줘 감사하다"며 "지난 4월초 30대그룹이 149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과 12만8000명의 신규채용 계획을 발표한 것이 경기부양 노력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 "이러한 기업들의 노력과 정부의 추경을 비롯한 경기활력 회복을 위한 정책을 통해 최근 취업자 수가 2개월 연속 30만명 이상 늘어났고 2.4분기 성장률도 9분기 만에 0%대 성장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창조경제 구현과 일감 나누기·동반성장 노력을 통해 경제민주화에 협조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은 어려운 점이 많다며 기업들의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투자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과감한 선제적 투자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를 새롭게 일으키는 동력이 되어왔다"며 "규제 전반을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꾸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불합리한 규제가 새로 도입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경제민주화 입법과정에 대해서는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정부는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고 본래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개정안에 대한 우려도 잘 알고 있다"며 "정부가 신중히 검토하고 더 많은 의견을 청취해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상법개정안은 감사위원을 맡을 이사는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임하도록 하고 대주주 의결권을 최대 3%까지만 허용하며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무화하는 게 골자다. 감사위원의 독립성을 높여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견제할 수 있도록 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게 취지다. 집중투표제는 1개의 주식에 선임될 이사의 수만큼 투표권을 부여해 소액주주가 지금보다 쉽게 이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10대그룹 총수와 오찬 엇갈린 평가
경제 살리기에 밀려난 경제민주화

재계는 현재 상법개정안이 현실화되면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에서도 재계의 반발이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

이날 오찬에서 박 대통령은 경제 활성화와 기업투자 요구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지난 대선과 현정부 경제분야의 핵심화두였던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기업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설득 정도의 수준만 언급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하반기 국정 성과 창출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투자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정재계는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반드시 기업들의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고 보는 것.

박 대통령은 지난 7월10일 언론사 논설·해설실장들을 만나 "(경제민주화 관련) 중점 법안들이 7개 정도였는데 6개가 통과됐다"며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제는 투자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들은 그동안 지속돼온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상법개정안' 완화
"사실상 항복 선언"

실제로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후퇴를 선언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날 오후 야당은 박 대통령의 청와대 오찬간담회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자리였다"고 비난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 중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겠다" "상법개정안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겠다" "일자리 창출은 기업의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 등은 사실상 대기업에 항복 선언을 한 것이라는 것.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를 포기할 테니 대기업 투자를 늘려달라고,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 대변인은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업의 의지를 당부한 발언을 두고 "화룡점정이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며 "박 대통령 논리대로라면, 정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의 무능을 스스로 자인한 꼴"이라고 꼬집었다.

야당 "대통령 핵심공약 사실상 포기"
새누리당 "좀 더 논의하겠다는 취지"

그는 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에 대해 "재벌들은 투자보다 현금성 자산을 늘리는 것에몰두했다"며 "재벌들이 곳간을 채워가는 동안, 청년들은 88만원에 인생을 저당 잡혔다. 중장년층은 실업과 노후불안에 시달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 대통령은 '오답노트'부터 만들기 바란다. 전임 대통령의 실패에서 정말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인가"라며 "재벌 투자를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재벌들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주거나 경제민주화를 후퇴시키는 것은 경제 살리기와 전혀 상관없다는 점을 명심하셔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의당 김제남 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박 대통령이 재벌들의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청취하다시피 한 이번 청와대 오찬은 박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의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친기업적 태도를 표명하는 터닝포인트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김 대변인은 "투자활성화가 규제정책 때문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지난 10여년간 정부는 일관되게 규제완화조치를 추구해왔고, 그 혜택은 대부분 재벌대기업들에게 돌아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대기업은 지금까지 국내투자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해왔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과 10대그룹 총수들의 오찬이 경제민주화 후퇴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새누리당 유일호 대변인은 국회 정론관에서 야당의 경제민주화 포기 관련 비판에 대해 "오찬간담회를 함께하면서 재계의 현안과 경제 활성화를 위한 의견을 듣고, 올 하반기 국정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업들의 협력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상법개정안·집중투표제 '백지화' 가닥?


유 대변인은 박 대통령 발언에 대해 "우리가 경제민주화를 이뤄내는 동시에 현재의 어려운 경제환경의 개선을 위해 기업들이 솔선수범하여 투자해 우리 경제가 살아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정부 또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유 대변인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위한 공정거래법,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한 하도급법 등 경제민주화 관련 핵심법안들은 국회를 통과했다"며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나머지 경제민주화 완성을 위한 법안들도 국회에 제출되어 논의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야당도 잘 알고 있다"며 경제민주화 후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오찬간담회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대기업의 협조를 위해 정책적 과제를 지연시켰다는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라는 용어 자체가 여권의 공식석상에서 사라졌고 핵심법안들은 아직 국회 상임위 문턱도 밟지 못했다.

대기업의 신규 순환출자 금지 법안과 보험·증권 등 제2금융권으로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확대하는 법안은 6월국회 처리가 목표였지만 정무위에 계류 중이다. 횡령·배임 등 재벌 총수의 중대 범죄에 대해 집행유예를 금지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 형 확정 이후 대통령 사면을 차단하는 사면법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에 머물러 있다. 이런 법안들은 국회에 장기 계류될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도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부동산 거래 활성화에 정기국회 초점을 맞추는 등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처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핵심법안 대부분
국회 계류 중

정부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대상기업은 '모든 계열사'에서 '총수 일가가 일정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로 축소됐고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제한 강화, 지주회사 전환촉진을 위한 금융 자회사 규제개편, 집단소송제, 사인의 금지청구제 등도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박근혜정부의 제1국정기조는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성장이다. 그런데 취임 첫해, 그것도 새 정부 출범 6개월 만에 박 대통령의 핵심공약인 경제민주화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흐지부지될 위기에 처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10대그룹 총수들 무슨 말 했나

말씀들은 그럴싸한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세계 경제가 어렵다. 규제를 풀어준 것은 기업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창조경제는 한국경제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이며 기업들이 앞장서서 실행하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 (삼성의) 투자 고용 계획은 차질 없이 추진하고 있으며 SW 인재육성에 노력하고 기초과학을 육성하고 융복합 기술개발에 노력할 계획이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연 740만대 생산 중이며 해외 생산도 늘고 있다. 국내 임금과 물류비용의 상승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지만 열심히 노력한다면 연 1000만대 생산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자동차, 철강 등 투자를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 친환경과 첨단소재 개발도 노력 중이며 해외 협력업체 동반진출 지원에 힘쓰고 있다.

▲구본무 LG 회장=융복합 IT 기술, 에너지 저장장치, 전기자동차 등에 있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필요가 있으며 이중 전기차 시장 활성화를 위해 전기차 보조금 지원확대가 필요하다. (LG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읽어주는 휴대폰 사업, 저성장아동을 위한 성장호르몬 보급 등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동빈 롯데 회장=(롯데는) 여성이나 지방대 출신 채용을 확대할 계획이며 지역 전통시장과 중소상인과의 상생에도 노력하겠다. 이를 위해 비닐 장바구니를 5만개 제작·배포하기로 했다. 잠실 제2롯데월드 등 관광산업 활성화에도 적극 나서겠다.

▲조양호 한진 회장=사회적 보상시스템 부재 등으로 고용시장 수급이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무인항공기 등 방위산업의 경우 사업연속성의 부족으로 어려움이 있다. 인천공항 허브화와 중국인 비자확대, 특급관광호텔 건립 규제 완화 등이 필요하다. (한진은) 60대의 신규 항공기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로 인해 1대당 250명의 고용창출효과를 예상하고 있다.

▲김창근 SK 의장=대중소기업 동반성장지수 평가가 줄 세우기 평가보다는 기업별로 자발적으로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중국의 석유국유기업인 시노펙과 합작투자가 상업생산에 돌입하는데 국가 지도자간 신뢰필요성에 대한 긍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스마트 그리드, 빌딩관리시스템, 에너지저장장치 등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 신 시장 창출을 추진하고 있다. 외국인투자촉진법 합작투자가 조속한 처리가 되면 이를 통해 울산에 1만개 일자리 창출효과가 있을 것이다.

▲허창수 GS 회장=외국인투자촉진법 처리가 시급하다. (GS는) 신재생에너지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GS홈쇼핑이 중소기업 제품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동반성장의 주요 사례다.

▲박용만 두산 회장=72개 지방상공회의소 회장들을 모두 만나본 결과 투자와 일자리 창출 의지는 있지만 투자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눈이 너무 좁고 턱이 너무 높다. 통상임금은 공멸의 문제다. 입법이 개별 기업의 경우 어디에 해당되는지 모를 만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업들의 해외 진출 지원과 실패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 솔선수범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분위기를 만드는 등 상공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원자력발전소 수출 등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정부 금융 지원도 필요하다.

▲홍기준 한화 부회장=(한화는) 80억달러 프로젝트인 이라크 주택 10만호 건설을 진행 중이다. 중소업체와 동반진출을 통해 제2의 중동 붐을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차원의 보증과 보험지원이 필요하다. 태양광산업에 대한 기회도 찾고 있다.

▲이재성 현대중공업 대표이사=심해저 자원개발과 해양플랜트에 대한 자원외교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데 대통령께서 직접 나서서 물꼬를 터주기 바란다. 이제 골드러쉬에서 블루러쉬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호주, 브라질 등에 대한 경쟁이 치열하다. 세일즈 외교가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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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