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 무소속 박주선 의원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8.26 15: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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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과 천당 오간 14년…또 기사회생

[일요시사=사회팀] 무소속 박주선(광주 동구) 의원이 지난 22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을 면했다. 의원직 상실을 면한 건 이번이 네 번째다. 박주선 의원은 ‘4전5기’로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지난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무소속 박주선(광주 동구) 의원이 파기환송심에서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는 형량을 선고받으면서 다시 부활했다. 광주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김대웅)는 지난 22일 박 의원에 대해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그는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또 살아난 박주선
불사조 국회의원?

박 의원은 지난해 4·11 총선 때 유태명 당시 광주 동구청장 등과 함께 사조직을 통해 불법선거운동과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6월29일 광주지법의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법정구속됐으나 지난 22일 항소심에서 벌금 80만원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재판부는 박 의원이 전남 화순에서 있었던 광구 동구 동장 모임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한 부분(불법 선거운동)만 유죄로 인정하고 사전선거운동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벌금 80만원은 의원직을 상실하는 기준인 벌금 100만원보다 낮은 형량이기 때문에 박 의원은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박 의원은 앞서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세 번 구속돼 재판을 받은 바 있지만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에는 지난해 6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네 번째 구속됐다가 항소심에서 벌금 80만원으로 형량이 줄면서 풀려났다. 이어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1, 2심 모두 사전선거운동에 대한 판단을 빠뜨렸다”며 파기환송했고, 다시 열린 재판에서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은 것이다. 이날 재판이 끝난 뒤 박 의원은 “네 번 구속에 네 번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민주당 배기운(전남·나주·화순) 의원은 항소심에서도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았다. 무소속 박 의원과 민주당 배기운 의원의 정치적 운명이 엇갈린 것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두 의원은 지난 22일 같은 법정에 섰지만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됐다. 박 의원은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는 형을, 배 의원은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기소된 회계책임자 김모씨에게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배 의원은 항소심 선고 직후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한 3500만원은 선거와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항소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대법원에 즉시 상고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나주시민과 화순군민,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면서도 “억울함이 해소되도록 보다 철저히 준비해 무죄를 입증 하겠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박 의원의 사건과 관련 “박 의원이 모바일 경선인단 모집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설립한 것이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박 의원이 대책위 설립과 경선인단 모집에 공모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재판부는 ‘계림1동 비대위’와 ‘지원2동 경선대책위’라는 유사기관 설립 및 사조직 설치와 동시에 기소된 사전선거운동 부분의 판단을 누락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한 사전선거운동 부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경선운동방법 위반으로 예비적으로 추가된 공소사실에 대해서도 무죄를 내렸다.

재판부는 다만 “박 의원이 동장 모임에 참석해 한 발언이 사전 선거운동에 해당해 이 부분은 유죄로 인정했다”며 “모임 도중 참석해 동장들이 술 취해 이야기하는 분위기에서 발언했고 일부는 자신을 칭찬하는 데 대한 답변과정에서 나온 점은 감안했다”고 양형사유를 밝혔다.

박 의원은 이날 판결 직후 ‘판결에 대한 소회’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진실과 정의를 찾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나 억울한 누명을 벗어 기쁘다”고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2월, 박 의원이 연루된 전직 동장 투신사망 사건으로 광주 동구청장, 동구의원, 통장, 가정주부 등 29명이 무더기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박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당선돼 여태껏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으나, 유태명 광주 동구청장은 구속된 뒤 재판 과정에서 자진 사퇴한 바 있다.

박 의원의 파란만장한 정치역경은 1999년 옷 로비 사건에 휘말려 처음으로 구속되면서 시작됐다. 박 의원은 당시 구속 이후 보석으로 풀려나 16대 총선에서 보성·화순 지역구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어 2000년 나라종금 사건과 2004년 현대건설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잇따라 구속됐지만, 두 차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4번 구속, 4번 무죄’파란만장 정치역경
민주당에 팽 당하고 부활 성공에 ‘쾌재’

박 의원은 세 차례 구속되면서 재판과정에서 수감되어 있던 기간만 모두 336일이나 됐다.  그는 이 과정에 제17대 총선에서 옥중 출마해 고배를 마시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박 의원은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광주 동구로 선거구를 바꿔 출마해 전국 최고 득표율(88.7%)로 당선되며 정치적 기지개를 폈다. 또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두 차례 선출되는 등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는 지난해 7월, 4번째 구속됐다. 민주당 모바일 경선인단을 모집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됐고, 전직 동장이 투신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으면서 정치권 안팎에서는 그의 정치인생이 끝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박 의원은 다시 ‘정치적 부활’의 신호탄을 쐈고, 파기환송심에서도 의원직 상실형을 면하면서 역경의 마침표를 찍고 결국 다시 일어서게 됐다.

박 의원이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마음고생을 털어버리게 됨으로써 향후 정치권에 어떤 바람이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오뚜기 3선 의원
4전5기 금배지 유지

박 의원은 1949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 캠브리지대 법학과를 수료했다. 1974년에는 제16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이후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 법무비서관을 지낸 바 있다.

그는 1999년 옷로비 사건, 2003년 나라종금 뇌물수수 혐의, 2004년 현대 비자금 수수 혐의로 세 차례 구속됐다가 모두 무죄를 선고 받는 국내 사법사상 초유의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또한 박 의원은 지난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제19대 국회의원 가운데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 받은 건 박 의원이 처음이었다. 당시 사건은 4.11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광주 동구의 한 주민자치센터에서 전직 동장 조모씨가 투신자살하면서 시작됐다.

광주 동구 민주통합당 예비후보의 선거인단을 모집하는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던 동장 조모씨는 ‘공무원 조직이 민주당 국민경선 선거인단을 대리 등록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한 선관위 직원들이 들이닥치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건물 6층으로 올라가 투신했다. 이 사건으로 민주당은 도덕성 논란에 휩싸이며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박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동장 조모씨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박 의원은 민주통합당 경선 과정에서 측근과 공모해 불법적으로 모바일 경선인단을 모집하도록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박 의원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박 의원에게 진행상황을 보고했다는 실무자의 진술이 있고, 최측근이 불법선거운동 전반에 관여한 점 등에 비춰볼 때 박 의원만 이런 사실을 몰랐거나 반대했다는 것은 경험칙에 반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문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들이 민주주의의 축제가 돼야 할 선거를 피와 눈물, 돈으로 얼룩지게 했다”며 일갈하고 “조직적 범죄의 특성상 실행은 하급자가 하고, 상급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최소한의 지시나 묵인만 하더라도 이익은 상급자에게 가는 만큼 (상급자가) 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정치권서 존재감 부상하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재판 과정을 보면 박 의원과 검찰 간의 질긴 악연을 볼 수 있다. 사실 박 의원은 지난 1974년 제16회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하고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부장검사를 지내는 등 검찰의 엘리트코스를 밟아 온 인물이다. 하지만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로는 옷로비 사건, 나라종금 뇌물수수 혐의, 현대 비자금 수수 혐의 등에 잇따라 휘말리며 후배들에게 세 번이나 구속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지난해 사건을 비롯한 세 번의 무죄에 대해 박 의원의 지지자들은 “박 의원이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무죄선고를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충분한 증거도 없이 박 의원을 모함하려는 음모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 의원이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동안 범법행위를 하고도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갔던 것”이라며 “자신의 선거캠프 사람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뻔뻔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박 의원에게 비록 1심이지만 징역 2년을 선고한 판결이 속시원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사실이야 어찌됐건 그와 검찰 간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 것은 1999년 발생한 옷로비 사건이다. 옷로비 사건은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던 당시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씨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아내 연정희씨에게 고급 옷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촉발됐다.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재직 중이던 박 의원은 ‘옷 로비 의혹사건’ 내사보고서를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에게 유출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 등)로 기소됐었다. 그러나 당시 재판부는 지난 2001년 11월 “김 전 총장의 부탁을 받고 보고서를 전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씨는 이 보고서가 신동아 측으로 유출될지 몰랐던 것으로 판단돼 무죄”라고 판결했다.


검찰과 질긴 악연
진기록의 주인공

무죄로 한 숨 돌리긴 했지만 검찰과의 악연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옷로비 사건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고 불과 3년 만인 지난 2004년 1월 안상태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퇴출을 막아달라는 청탁과 함께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와 현대그룹으로부터 고(故)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이 국회 정무위 증인으로 채택되는 것을 막아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3000만원을 받은 두 가지 혐의로 또다시 구속됐다. 1심에서는 현대비자금 수수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6월에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받고 구속 8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두 달 후인 2004년 11월, 2심 재판부가 그의 항소를 기각하고 보석을 취소했다. 그는 다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세 번째 구속이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박 의원은 2005년 5월20일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히는 것은 무척 이례적이었다.

이로써 그는 1999년 옷로비 사건과 2004년 나라종금 사건, 현대건설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3번 구속됐으나 3번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낸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재판과정에서 수감 기간만 336일이나 됐다.

출소 후 박 의원은 “3번의 구속과 연속적인 무죄판결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가 어려운 사례”라며 “검찰이 정치권력의 시녀역을 자임했다”고 비판했다.

검찰에게도 박 의원은 악연이었다. 3번의 구속, 3번의 무죄라는 진기록은 박 의원의 주장대로 검찰이 증거도 없이 정치적으로 표적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했다. 또 만약 박 의원에게 정말 죄가 있었다면 세 번씩이나 죄를 밝혀내지 못한 무능한 검찰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느 쪽이든 검찰로서는 치욕스러운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승리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 재판부는 박 의원이 현대와 안상태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대가성이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돈은 받았지만 죄는 없다’는 판결은 오히려 사법부가 농락을 당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는 부분이다. 이제 그는 무려 네 번째 재판에서 무죄를 입증 받았고 결국 의원직을 유지하게 됐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박주선 의원은?

▲전남 보성
▲광주고, 서울대 법학 학사, 캠브리지대 법학 수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실 법무비서관
▲제16대 국회의원
▲조선대학교 초빙교수
▲제18대 국회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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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