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아 전성시대’ 제2막 풀스토리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06.17 12: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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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끈적 ‘인의 장막’…죽지않고 ‘살아있네’

[일요시사=경제1팀] ‘모피아’라 불리는 옛 재무부 관료 출신들이 박근혜 정부 출범 100일만에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금융권 알짜자리를 이들이 속속 접수하면서 모피아의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것. 금융 공기업과 금융단체는 물론 주요 민간 금융회사까지 거의 싹쓸이 수준이어서 관치금융 논란이 거세질 전망이다.



국내 재무 관료들은 다른 정부 부처 관료들과 격을 달리한다. 굳이 이들에게 ‘모피아’라 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다. ‘모피아’(MOFIA)는 재무부 출신 인사를 지칭하는 말로, 재정경제부(MOFE·Ministry of Finance & Economy)와 범죄조직인 마피아(MAFIA)의 합성어다. 끼리끼리 정부 고위직과 금융회사 주요 자리를 독식한다고 붙은 별칭이다.

한 번 모피아는
‘영원한 모피아’

이질적인 용어의 절묘한 화음 속에서도 유독 모피아 출신들은 기수 중심의 독특하고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해병대를 능가한다고 해서 ‘한 번 모피아는 영원한 모피아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모피아의 대부로는 여전히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꼽힌다. 이 전 부총리는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촉발된 IMF 관리체제에서 금융권 및 재벌 구조조정을 수행하는 등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분류된 인물이다. 그는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서도 경제부총리를 거치며 시장을 중시하는 모피아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경제의 정책과 감독을 좌지우지하던 그에게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 이 전 부총리는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 내 사람 챙기기로 주변 인사들을 매료시키며 인재풀을 확대시켰다. 이른바 ‘이헌재 사단’은 200여명의 모피아 출신이 정·재계와 금융계에 포진해 끈적끈적한 인적 고리를 만들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현직 중에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계보를 잇고 있다. 기획재정부 내에서는 은성수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과 국제통화기금(IMF)에 파견된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 전 부총리와 신 위원장 등 현직을 연결해주는 매개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다.

역대 정권은 대부분 초기 인사에서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모피아 출신’을 배제했다. 대신 대학 교수나 민간인을 발탁했지만, 정권 중반 이후에 재무 관료들을 중용하는 방향으로 기울곤 했다.

임영록·임종룡 귀환…금융권 수장 잇단 입성
거래소·신보 이사장에 최경수·홍영만 거론

정치권 출신의 전직 고위 인사는 “정권 초기 때마다 모피아는 일종의 ‘부패 권력’ ‘기득권 세력’ 등으로 치부되면서 통치권자들이 멀리하곤 하지만 집권 1년만 지나면 다시 찾게 된다”며 “서로 간에 밀고 당겨주는 묘한 화음 앞에서는 통치권자도 당할 수가 없다”고 털어 놨다. 

부활하는
‘패거리 금융’

박근혜 정부에서도 반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권 초기 전면에서 밀리는 듯하던 모피아들이 출범 100일이 지나고, 금융권 기관장이 물갈이 되는 틈을 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모양새다.

KB금융 회장에 임영록 전 기획재정부 2차관이 내정된 지 하루 만에 기재부 1차관 출신의 임종룡 전 국무조정실장이 NH농협금융 회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KB금융 회장 내정자는 행정고시 20회, 농협금융 회장 내정자는 행시 24회로 금융정책을 주로 맡았던 경제관료 출신이다.


이에 대한 금융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특히 민간 금융회사인 KB금융 회장 자리는 늘 민간의 몫으로, 모피아가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과정에서 신 금융위원장은 “관료도 능력과 전문성이 있으면 금융지주 회장을 할 수 있다”면서 임 내정자에게 힘을 실어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농협금융 회장 자리도 마찬가지다. 직전까지 행시 14회인 신동규씨가 맡았지만, 이번에는 농협 내부 출신에서 나오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막판에 이를 뒤집어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임 전 실장을 내정한 것은 금융당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정부 산하 기관과 각종 금융 공기업을 독식하던 모피아가 급기야 민간 금융회사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금융계 안팎에선 모피아들이 금융당국과의 소통이 원활하다는 장점을 토대로 알짜 보직을 싹쓸이 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금융지주를 넘어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최근 선임된 금융 관련 협회 7곳 중에서도 순수 금융인 출신인 박종수 금융투자협회 회장을 제외하면 모피아 일색이다.

국제금융센터 원장에는 행시 26회인 김익주씨가, 여신금융협회장에는 행시 23회 김근수씨가 선임됐다. 김 신임 국제금융센터 원장은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 무역협정 국내대책본부장 등을 거쳤고, 김 신임 여신금융협회 회장도 기재부 국고국장 출신이다.

이 자리에는 당초 모피아가 아닌 다른 공공기관 임원이 거론됐으나 “(낙하산으로) 나가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른 기관에 자리를 줄 수 없다”는 모피아의 논리에 밀렸다.

모피아들의 득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한국거래소 이사장 자리에는 최경수 전 현대증권 사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최 전 사장은 행시 14회로 재정경제부 국제심판원장, 세제실장을 거쳐 조달청장을 지냈다. 7월 중 결정될 신용보증기금 차기 이사장에는 홍영만 금융위원회 상임위원이 거론된다.

상명하복 익숙
‘그들만의 리그’

모피아가 금융권에 낙하산으로 계속 자리를 틀 수 있는 건 선후배간 밀고 끌어주기식의 끼리끼리 행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전ㆍ현직 모피아들은 다양한 사적 모임을 통해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이 속에서 절묘하게 권력을 유지해나간다.

모피아는 검찰에 버금갈 정도로 철저한 선후배 상명하복을 자랑한다. 더욱이 이른바 인맥을 형성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전통의 명문학교, 즉 경기고와 서울ㆍ경복고와 서울상대ㆍ법대 등으로 국한돼 있고 지역별로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기에 수직적 인맥 구조는 더욱 심해진다.

현직 한 관료는 “전직에 있음에도 현재 돌아가는 관계와 민간 금융회사의 인사 구도까지 훤히 꿰뚫고 있어 깜짝 놀랐다”며 “그들의 인적 호흡은 한마디로 ‘장막’에 비유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

‘대부’이헌재 이어 김석동·신제윤 계보
200여명 인적고리…곳곳서 막강한 영향력


또 다른 관료 역시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헌재 사단’ 역시 모피아의 네트워크 속에서 힘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며 “때로는 정치적 연줄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배가 잘 나가야 나도 산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돼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때로 민간 출신 인사에 대한 구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민간 출신의 한 고위인사가 들어오자 관료들 간에 일종의 따돌림 현상이 벌어지기는 사례도 있었다.

‘관치금융’
반발정서 확대

물론 모피아의 금융계 진출을 비판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대부분 업무능력이 탁월하고 일의 추진력과 돌파력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모피아 특유의 ‘끌어주고 밀어주는’ 단결력을 통해 어떤 일이든 매끄럽게 잘 처리하는 데 선수들이라는 것도 장점이다.

한 금융당국의 관계자는 “이번에 발탁된 관료 출신들의 면면을 보면 스펙(학력·경력)과 경험 면에서 민간 출신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피아가 금융계로 세력을 확장할수록 ‘관치’에 대한 우려도 커지기 마련이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최근 성명서를 통해 “금융당국 수장이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해 전직 고위관료 출신 인사를 민간 금융회사 회장으로 선임하라고 사외이사들을 압박하는 행위는 명백한 관치금융”이라고 비판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도 “모피아들이 퇴임 후 낙하산을 당연히 여기는 데는 자신들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선민의식도 자리잡고 있다”고 꼬집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의사 결정에 익숙하고 시장이나 민간의 논리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장기적으로 한국 금융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이장호 BS금융지주 회장에게 ‘장기 집권’의 문제를 거론하며 특정한 사유 없이 자진사퇴를 종용한 것도 ‘관치금융의 부활’에 대한 금융권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BS금융지주는 정부가 단 한 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은 민간 금융회사다. 금융당국의 압박에 이 회장 측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경남은행 인수를 마무리 지은 뒤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정부가 단 한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은 KB금융 인사에 종횡무진 개입했다”며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BS 금융 회장까지 바꾸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역시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번 인사와 흘러가는 흐름을 보면 정치색이 강하게 드러난다”며 “회장 교체에 따른 금융계열사의 연쇄 인사이동이 불가피한 만큼 향후 명확한 인사검증시스템을 거쳐야 이와 관련한 잡음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모피아 대부’이헌재는…
위기관리 대가? 관치금융 화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초대 금융감독위원장과 두 차례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이다.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와 “관치금융의 화신”이라는 평가가 양립하는 인물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이 전 부총리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동안 ‘천재’ 소리를 들었고, 1968년 행정고시(6회)에 수석 합격했다.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시절인 1972년 8·3사채 동결조치를 입안했고, 1974년 1차 석유파동 당시 외환문제 해결에도 참여했다. 1979년 율산그룹 파동에 휘말려 공직에서 물러났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임명돼 20년 만에 공직에 복귀했다.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3년여간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지휘해 ‘금융계의 황제’ ‘구조조정 전도사’ 등으로 불렸다. 시중은행이 망할 수 있으며, 대기업도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부총리로 복귀한 이 전 부총리는 정보기술(IT)과 사회간접자본(SOC)에 10조원을 집중 투자하는 ‘한국형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주택과 토목공사를 늘려 반짝 효과만 내게 하고 근본 처방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전 부총리는 부인의 토지거래 관련 위장전입 의혹을 받자 2005년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법무법인 김앤장 고문을 거쳐 사촌동생인 이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이 운영하는 코레이에서 이사회 의장을 맡아왔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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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