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 ⑨김의철의 뉴코아그룹

스스로 힘없이 무너진 '유통공룡 원조'

[일요시사=경제1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잘 나가던 기업이 망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망한 재벌이 '깡통'을 찼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IMF 이후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공중분해 됐지만 해당 기업에서 중책을 맡았던 경영진과 그 가족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다. 미리 '주머니'를 채워놔서일까.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망한 기업' 수뇌부들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이마트, 홈플러스 그리고 롯데마트. 국내 할인점 시장 '3강'들이다. 신세계그룹이 이마트라는 브랜드로 할인점 시장에 뛰어든 시점은 1993년. 롯데그룹이 롯데마트라는 브랜드로 할인점에 뛰어든 시점은 95년. 삼성물산과 영국 유통기업인 테스코가 홈플러스라는 브랜드로 할인점에 뛰어든 시점은 97년이다.

할인점 원조
킴스클럽

하지만 원조는 따로 있다. '킴스클럽'이라는 브랜드로 '박리다매'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한 뉴코아그룹이다. 뉴코아그룹은 백화점과 슈퍼마켓의 중도 시장을 겨냥해서 유통업계에 새바람을 일으킨 선두그룹. 그 중심에는 김의철 전 뉴코아그룹 회장이 있었다.

42년생인 김 전 회장은 고려대 역도부 출신으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보일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 김형종 한신공영 창업주의 눈에 띄어 69년 한신공영에 평사원으로 입사하면서 그의 인생은 첫 번째 터닝포인트를 맞게 됐다.

한신공영은 김 창업주가 50년 설립, 건설업체로서 70년대 중반 대규모 아파트 분양과 중동건설 붐으로 크게 성장했던 기업이다. 건설부가 발표하는 도급 한도액 순위를 보면 한신공영은 72년 44위에서 73년 19위, 74년 10위까지 성장하지만 97년 법정관리 대상이 된다.

김 전 회장은 입사 2년 만인 71년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맏사위 자리에 앉게 됐다. 과장 직함을 단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큰딸을 내어줄 정도라면 김 창업주가 얼마나 김 전 회장을 신임했는지 상상이 된다.


김 전 회장은 79년대 초반 사람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강남 반포 일대의 땅을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거 사들였다. 70년대 초반은 강남 개발 붐이 불기 이전이기 때문에 반대는 당연했다. 하지만 76년부터 김 전 회장이 매입한 토지에 1∼11차로 이어지는 한신공영 신반포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김 전 회장의 통찰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박리다매·24시 연중무휴 국내 최초 도입
무서운 사업 확장…빚 늘더니 IMF때 발목

78년부터 한신공영은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아파트 내 상가 분양 이외에 직접적인 유통업 참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신공영은 같은 해 ㈜뉴코아유통이라는 별도 법인을 설립하고 반포에서 30평짜리 뉴코아슈퍼마켓으로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80년 한신공영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옆에 연건평 9000평 규모의 뉴코아쇼핑센터를 개점하고 1층 슈퍼마켓을 김 전 회장이 직접 운영하게 했다. 영업 개시 후 5개월이 지나면서 하루 매출이 1000만원을 돌파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81년 한신공영 내 상가사업부가 인력 보강과 동시에 별도의 법인인 ㈜뉴코아로 분리되면서 김 전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게 김 전 회장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였다. 김 창업주의 장남 태영씨가 한신공영의 경영권을 승계받기 위한 경영 수업을 받는 중이었기에 사위인 김 전 회장의 분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회장직에 오른 태영씨는 뉴코아가 분가된 후 한신공영 내 유통사업부를 두고 83년부터 한신코아백화점 전주점을 시작으로 노원점, 광명점, 성남점, 대전점으로 이어지는 5개의 백화점을 별도로 경영했다. 백화점 명칭은 '한신코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한신코아는 추후 한신공영의 해체로 타 유통업체에 인수되어 현재는 '세이브존'이라는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다.

두 번의 터닝포인트
한신공영과 분가


한신공영과 뉴코아의 분리가 마무리된 시점은 93년. 이후 김 전 회장은 무서운 속도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94년 인첨점과 평촌점에 백화점을 늘렸고 95년 킴스클럽을 설립하면서 창고형 할인점 사업에 진출했다. 94년부터 96까지 3년간 신규 개설한 백화점과 할인점은 17개에 이른다. 김 전 회장에게는 '일벌레' '미스터 불도저' 등과 같은 닉네임이 따라 붙었다. 일에만 매달리는 김 전 회장을 보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62학번 동기들이 왕복항공권을 구입해 거의 강제로 말레이시아로 휴가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김 전 회장은 기존 유통업계 판도를 뒤흔들었다. '외삼촌 떡도 싸야 산다'는 뉴코아의 사훈처럼 철저한 '박리다매' 방식을 고수했다. 킴스클럽은 국내 최초로 24시간 연중무휴 영업을 도입했고 뉴코아에서는 고졸 출신도 능력만 있으면 점포장에 오를 수 있었다. 매년 설에는 김 전 회장이 전국 사업장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계장급 이상 직원에게 '떡값'을 직접 나눠주었으며 월급을 현금으로 줘 월급날에는 총무부서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이런 독특한 조직문화는 직원들에게 단합과 애사심을 가져왔지만 분명 조직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월급을 현금으로 줬다는 것은 유통업체에는 필수적인 전산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며 회장이 직접 사업장을 일일이 돌며 직원들을 챙겼다는 것은 오너가 아니면 직원들은 뭐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재계 27위이자 계열사만 18개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 회장 1명의 '원맨쇼'로 운영됐다는 얘기다.

무리한 사업확장에 '제동'을 걸어줄 직원이 없었으니 점포망 확장에 따른 차입금은 무섭게 늘어났다. 무엇보다 입지가 중요한 유통업의 특성상 당시 기준으로 1개 점포를 확장하는데 최소 1000억원 이상이 소요됐다. 96년까지 확장한 17개 점포만 따져도 최소 1조7000억원 이상이 차입금으로 묶여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저기서 쓴
막대한 차입금

96년 말 기준 뉴코아그룹의 재무상황을 보면 자본금 2117억원, 매출액 2조2788억원, 부채총계 2조5912억원, 자기자본비율 8%, 부채비율 1223%를 기록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 미금백화점, 미금킴스클럽, 화정백화점, 창원백화점, 창원킴스클럽, 일산백화점, 의정부백화점 등이 97년 말 개장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이었다. 이 역시 막대한 차입금에 의존한 공사였다.

결국 뉴코아그룹은 97년 11월 ㈜뉴코아, 뉴코아종합기획, 뉴타운건설, 뉴타운기획, 시대종합건설, 시대물산, 시대유통, 시대축산 등에 대한 화의신청에 들어가면서 해체되기 시작했다. 주력 기업인 뉴코아는 99년 법정관리를 거쳐 2003년 이랜드가 인수하고 2004년 6월 법정관리에서 벗어나 정상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98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김 전 회장은 뉴코아 계열사 가운데 살아남은 뉴타운산업(씨마유통)과 온라인 쇼핑몰 업체인 비투올네트를 발판으로 재기를 시도했다. 씨마유통을 통해 98년 부천에 패션쇼핑몰 '씨마1020'을 열었으며 비투올네트를 통해 국내 최초 인터넷 할인쇼핑몰 문을 여는 등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94년 8월부터 95년까지 허위 리스계약서를 작성, 10개 리스사로부터 24차례에 걸쳐 357억여원을 대출받아 빼돌렸으며 1억5000여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2002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2003년 말에는 계열사였던 하이웨이유통과 시대종합건설을 통해 허위재무제표를 작성, 94년 7월부터 96년 11월까지 금융회사로부터 1490억원을 대출받았고 1374억원 상당의 공모 보증 회사채를 발행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2004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회장에게는 무리한 점포확장과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대출, 독선적인 기업경영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씨마유통·비투올네트로 재기시도하다 무산
오너일가는 커머스재팬·마이토이월드 운영

이후 김 전 회장은 철저한 은둔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전직 임원들이나 측근들도 그의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언론 등 각종 매체에서 들리는 소식을 종합하면 자택에서 경제·경영관련 서적을 읽거나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역 시절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골프도 가끔 즐긴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나 현재는 당뇨와 심장병으로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던 씨마유통은 외국계 투자회사로 이미 넘어간 상태이며 비투올네트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2007년 해산간주, 2010년 12월 청산종결됐다. 해산 전까지 김 전 회장의 사위인 박종채씨가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딸 재연씨가 이사를, 외동아들인 태훤씨가 감사를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먼저 종채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유식·베이비푸드 유통업체인 커머스파크는 일본 이유식 1위 업체인 와코도의 국내 독입 수입·판매권을 가지고 있다.

2001년 커머스재팬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2011년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했으며 신세계몰, 롯데마트, GS슈퍼마켓, 이마트, 코오롱 W스토어, 홈플러스, CJ올리브영, 농협중앙회 등 국내 대부분의 유통업체와 거래를 이어오고 있다. 종채씨의 부인이자 김 전 회장의 딸인 재연씨는 이 회사의 감사 자리에 올라있다.

먹고 살만한
회장님 일가

재연씨는 얼마 전까지 인터넷 육아·완구용춤 쇼핑몰인 마이토이월드 사장자리에 올라 있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본사가 있는 마이토이월드는 한때 업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2002년 모 신문사로부터 업계 최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들 태훤씨는 이사를 맡고 있었다. 태휜씨는 2006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토이월드에 대해 "김 전 회장이 가끔 경영자문을 해주시지만 직접적 관련이 없는 독립회사"라며 "아직은 작은 업체들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는 재연씨 대신 김모씨가 사장자리에, 태훤씨 대신 정모씨가 이사자리에 올라 있다.


한종해 기자 <han1028@ilyosisa.co.kr>

 

<뉴코아그룹은?>


▲1950년 한신공영 설립
▲1978년 ㈜뉴코아유통(별도 법인) 설립
▲1980년 뉴코아쇼핑센터 개점, 뉴코아슈퍼마켓 영업 개시
▲1981년 ㈜뉴코아, 한신공영에서 불리, 김의철 전 회장 대표이사 취임
▲1995년 킴스클럽 설립, 백화점·할인점 등 본격 확장
▲1997년 화의신청 및 그룹 해체
▲2003년 뉴코아, 이랜드에 인수
▲2003년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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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