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성형 부작용 '천태만상'

깎고 세우고 늘리다…녹아내린 얼굴들

[일요시사=사회팀]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멘탈붕괴 된 사람들이 있다. 예뻐지기 위해 얼굴에 칼을 대고 뼈를 깎는 극심한 고통을 참았지만, 그녀들에게 돌아온 건 성형 후 부작용. 이에 그들은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심해지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현대 여성의 필수코스인 성형. 그리고 이에 따른 부작용과 극심한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들을 취재했다.



“세상에…. 저 사람 얼굴 괴물 같아.”

30대 중반, 미혼의 김모씨는 살아오면서 평생 콤플렉스로 남을 것 같았던 조금 비뚤어진 턱을 교정하기 위해 양악수술을 결심했다. 그는 거액에 이르는 수술비용과 후유증이 극심할 것이라는 주위의 만류와 부담에도 ‘평생 후회하는 것보다 낫지’라는 생각이 더 크게 앞서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강남 압구정의 모 성형외과에서 양악수술을 받았다. 그 병원은 일부 연예인들도 양악수술 받았던 곳이었기에 당시에는 꽤 유명한 병원으로 입소문이 자자했다.

턱 교정 하려다
오랑우탄 몰골로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첫 번째 양악수술은 실패하고 말았다. 턱 교정이 잘못돼 모든 발음이 새는 불편을 겪었고 비뚤어진 턱 또한 제대로 교정되지 않았다. 첫 수술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김씨는 허탈감과 실망감에 휩싸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양악수술만 전문으로 하는 병원 2∼3군데를 수소문해 상담을 받고 재수술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옮긴 병원의 담당 원장은 김씨의 상태를 본 후 차트에 ‘치아가 잘 보이게 양악을 앞으로 빼고 앞턱 길이 짧게, 무턱이니 볼륨감 있게 교정하고 전 병원에서 양악수술 후 발음이 안 좋아 발음 좋아지게’라고 적은 뒤, “심각하게 새는 발음을 완벽하게 교정시켜주고 무턱 교정도 함께 해줄 테니 믿고 수술해라”라며 신뢰감을 심어줬다. 김씨는 양악 재수술을 받은 뒤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부기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양악 후유증 시달리다 손목 긋고 자살 시도
수차례 재수술 끝에 코끝 무너져 호흡 곤란


그렇게 기다린 지 5개월. 재수술의 기적을 맛보려 했던 김씨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그의 턱 상태는 재수술 이후 더 심각해졌다. 양악을 너무 집어넣어 윗입술은 끝도 없이 말려들어갔고, 특히 웃을 때는 틀니 빠진 할머니상으로 변해버려 맘껏 웃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차트에 적어뒀던 담당 의사의 말과 달리 수술 후 피해자는 구강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무턱교정은커녕 하악은 꺼져 있어 되레 오랑우탄 같은 얼굴로 변해버렸다.

자신이 봐도 흉측한 몰골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긴 김씨에게 양악수술 후 생긴 불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식사 한 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치아가 맞물려있어 음식을 먹으면 음식물이 모두 끼어 양치만으로는 음식물 제거도 힘든 상황에 놓였다. 이에 그는 매번 작은 티스푼으로 치아 사이사이를 일일이 긁어내 양치해야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발음이 좋아진다는 말 때문에 더욱 양악수술을 결심했던 김씨는 수술 후 ‘숫자 2’는 전혀 발음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발음도 나빠졌다. 무턱교정 또한 되지 않았다. 보형물을 넣었음에도 무턱은 여전했고 ‘가가멜’ ‘마귀할멈’ 등 괴이한 별명을 달고 살아야 했다.

양악수술 후 한순간에 사람들의 놀림거리로 전락된 김씨의 얼굴은 스스로를 자괴감에 빠뜨리게 만들었고, 재수술한 병원 측에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술을 집도했던 원장은 오히려 “애초에 수술이 잘못된 것이다. 전 병원에서 수술해서 이상해진 걸 왜 자신한테 그러느냐”라고 반박했다.

거울 파편조각으로
손목 그어 자살시도

다른 병원에서도 3차 재수술 상담을 받아봤으나 도저히 바꾸기엔 불가능하다고 얘기만 들었을 뿐, 간호조무사를 비롯한 병원 내 사람들은 김씨의 웃는 모습을 보며 “어머어머, 세상에 완전 괴물이다. 영화 <스크림>에 나오는 하얀 가면 같아. 무서워”라며 수군댔다. 심지어 김씨의 가족들마저도 그에게 “어디 가서 절대 웃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초리와 언급에 큰 충격을 받은 김씨는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지 않으면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댓글알바나 펫시터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 마치 ‘히키코모리(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처럼 집에서 은둔생활 했다. 웃지 말라는 주위의 당부에 근 1년 동안 웃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웃는 모습이 어땠는지 궁금했던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말 그대로 괴물과도 같았다. 윗입술이 말려들어가면서 이 없는 80세 노인인상으로 바뀐 김씨는 그 자리에서 거울을 깨고 파편조각으로 손목을 그었다. 평생 이대로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호소한 그는 사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자살시도를 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남성 뿐 아니라 일반인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김씨. 양악 후 일찌감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 생계를 위해 사채까지 끌어 삶을 연명하고 있다는 그는 “양악수술은 제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한다”며 “건강상이 아닌 단지 미용목적으로 양악을 하려는 사람들은 직접 때려서라도 뜯어말리고 싶다”고 전했다.


대기업 비서로 근무하던 20대 중반의 임모씨는 자신의 낮은 매부리코와 심하게 낮은 코끝에 불만을 갖고 코 성형을 시도했다. 임씨는 큰 욕심 없이 단지 일반 사람들의 코 높이정도만 되길 원했다. 그는 발품을 팔아 강남 신사의 한 유명한 병원을 찾았고 의사에게 “저는 코끝은 뾰족하게 하되 콧대는 많이 안 높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했다. 임씨의 주문을 받은 담당 의사는 콧대는 실리콘, 코끝은 귀 연골을 넣어 높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코끝만 살짝 올라가길 원했던 그의 소망은 칼이 지나간 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수술 후 부기와 멍을 없애기 위해 주사를 맞고 약을 복용하며 사후관리에 철저했던 임씨는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부기가 빠지길 기다렸다. 소염제와 부기 제거에 좋다는 배즙을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먹은 지만 꼬박 한 달이 지났지만 임씨의 몰골은 여전히 멍 자국과 부푼 주먹코가 자리하고 있었다. 눈 밑 멍은 수술한 지 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부기 빠지기만을 기다린 지 3개월. 임씨의 코는 부기는 그대로에 콧대만 높고 코끝은 전혀 올라가지 않아서 코끝은 뭉툭하고 콧대만 높은 단지 큰 주먹코 형태로 변해버렸다. 오히려 수술 전인 낮았던 코보다 못한 무식한 코가 돼버린 것이다.

임씨의 코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코만 보인다. 코가 왜 그러냐. 무서워 보인다. 인상이 바뀌었다” 등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의 오랜 친구 중 1명은 “예전이 더 나은데 그냥 살지 왜 그랬냐. 나도 수술하고 싶었는데 네 코보고 수술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고 말했다. 친구의 말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임씨는 그 자리에서 절교를 선언했고, 다른 친구들과도 인연을 끊는 등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피해망상에
우울감 증폭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서직으로 사람들을 자주 마주하는 직종에서 근무하던 그는 수술 후 사람들을 마주하지 못함은 물론 그들이 볼 때마다 인사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궜다. 혹여 사람들이 웃을 때면 속으로 ‘저 사람이 내 코가 이상해서 비웃나?’라는 별별 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가량을 임씨는 집-회사-병원만 다니며 지인들과의 사적인 만남도 피해왔다. 그는 병원 측에 거듭된 항의를 통해 재수술에 성공했지만 재수술 후에도 코에 염증을 동반한 코끝 무너짐이 나타나는 등 거듭된 부작용에 고통을 호소했다. 수십 번에 걸쳐 주사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며 사후관리를 했음에도 결국 딸기코에 한쪽 콧구멍이 찌그러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벗어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진 임씨는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들에게 오만 짜증을 내며 심적 스트레스를 풀었다. 3번째 재수술을 받은 지금도 임씨의 코는 여전히 한쪽 콧구멍만 들린 상태로 비뚤어진 들창코로 살아가고 있다. 임씨는 해당 병원을 상대로 고소 준비 중이며 정신적 피해보상을 동반한 재수술 비용, 주사와 약물치료에 들어간 치료비 등을 보상받길 바라고 있다.

임씨는 “당장 정신병원에 가서 진단할 생각이다. 재수술에 매번 실패한 뒤 내 삶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그 좋은 직장도 그만둬야 했고, 사실상 생계를 이어나가기가 힘든 상태”라며 “매일 거울을 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지만 우울해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보상을 받을 때까지 열심히 싸울 생각이다”라고 단언했다.

국내 성인여성들이 가장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는 지방흡입. 가히 성형의 대세라고 칭할 수 있지만 부작용과 후유증이 심한 성형인 것도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 시술 후 피부가 썩는 등 피부괴사가 일어나기도 하며, 시술의사의 경험횟수에 따라 몸 구석구석에 쭈글쭈글한 노인주름을 평생 안고 가야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통증도 심할 뿐 아니라 시술비용도 만만치 않아 시술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 지방흡입은 과체중 여성들의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데 최근 한 30대 초반의 여성이 지방흡입을 하다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린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대인기피증으로 지인과 인연 끊고 외톨이 생활
마스크·모자 항시 착용…대출로 수술해 빚더미

익명을 요구한 이 여성은 상체는 비교적 마른반면 허벅지와 종아리에 지방이 집중적으로 뭉쳐있어 심각한 하체비만을 안고 살다 지인의 소개로 유명한 지방흡입전문 성형외과를 찾았다. 담당의는 여성의 허벅지와 종아리에서 약 2000cc에 달하는 지방을 제거했고, 두 달 후쯤엔 확연히 가늘어진 다리를 가질 수 있을 거라며 신뢰를 심어줬다.

제거 이후 그는 통증 완화를 위해 주사와 약물치료를 병행했고, 2주 뒤에는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병행하며 다리 살이 빠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달 이상을 보낸 여성은 자신의 다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술 후 잠깐 있다 없어질 흉터라고 생각했던 피부반점과 염증현상은 점점 커져서 그 공간을 넓혀갔다. 상처 또한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쁜 각선미를 뽐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의 바람이 착각으로 돌변해버린 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 피부흉터가 아닌 피부괴사였다. 지방을 흡입한 부분의 살이 썩어 벗겨진 피부에서 물집이 생겼던 것.    

여성은 시술받은 병원에 항의전화와 방문을 거듭하며 상처치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또한 곤욕이었다. 그는 여름 내내 썩은 냄새를 맡으면서 2개월 이상 하루에 2번 소독 치료를 하고, 12만원 짜리 테이핑도 항상 하고 다녀야했다. 4개월 이상 압박붕대에 긴 바지만 입는 불편도 동시에 겪었다. 상처에 땀나면 안 된다는 간호사의 말에 운동은 물론 한여름에 오른쪽 다리는 샤워 한번 하지 못했고, 무릎 옆쪽에는 시술 부작용에 따른 상처가 생겨 평생 짧은 치마한번 입지 못하는 신세에 놓였다. 제일 결정적인 문제점은 지방제거를 했는데도 살이 전혀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성은 지방흡입 부작용인 피부괴사에 따른 피해보상으로 재수술 및 치료비를 병원 측에 요구했지만 원장은 도리어 “네 피부가 원래 그런 거를 왜 내 책임으로 떠미느냐”며 화를 냈고 고소장을 내밀자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식의 안하무인 태도로 일관했다. 여성은 현재 성형외과 원장을 상대로 민사소송 중에 있으며 타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진행하고 있다.


전문의 약력
제대로 살펴야

이외에도 부작용에 고통을 호소,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전문의의 약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지 않고, 지인의 소개나 방송출연 등을 통해 유명해진 의원을 방문해 수술을 강행해 큰 부작용과 후유증에 시달렸다.

일례로 한 40대 주부가 해외의 모 아카데미에서 수술자격증을 불법으로 취득한 의료진에게 눈·코 성형을 받아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부작용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린 이 주부는 결국 방송에 도움을 요청했고, 해당 프로그램을 시청한 사람들 중 그 병원에서 수술 받다 부작용이 일었던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하지만 해당 병원 원장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 없이 지금도 당당하게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정규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고 시술경험만으로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의사들은 꽤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과대광고에 휘말려 무심코 지나쳐버린 전문의 약력확인. 이는 성형부작용을 예방하는 필수코스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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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