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⑤장진호의 진로그룹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3.20 11: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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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 빚지고 해외서 호화 도피생활

[일요시사=경제1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잘 나가던 기업이 망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망한 재벌이 '깡통'을 찼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IMF 이후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공중분해 됐지만 해당 기업에서 중책을 맡았던 경영진과 그 가족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다. 미리 '주머니'를 채워놔서일까.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망한 기업' 수뇌부들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두꺼비 소주' 신화 진로는 1924년 10월 평안도 용강군에서 진천양조상회라는 이름으로 창업주 장학엽씨에 의해 설립됐다. 진천양조상회의 심벌은 '원숭이'였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원숭이가 복을 상징하는 영특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심벌로 선택되어진 것인데 원숭이 좌우로는 쌀이 있어서, 쌀로 빚은 복주를 마시면 복을 누리며 장수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회사
말아먹은 아들

장학엽씨는 50년 12월 월남해 1년 뒤 부산 동화양조, 52년에는 부산 구포양조를 설립했다. 54년 장학엽씨는 고향과 부산에서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서광주조를 차렸다. 원숭이가 '두꺼비'로 바뀐 때가 이때다. 장학엽씨는 61년 진로그룹의 최초 계열사인 서광산업이라는 피혁회사를 설립하고 회장직에 올랐다.

진로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은 66년. 서광주조는 66년 진로주조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75년 진로로 상호를 바꿨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소주 업계는 전남 목포에 기반을 둔 삼학소주가 장악하고 있었다. 한때 전국시장점유율 65%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던 삼학소주가 진로에게 밀리기 시작한 때는 65년 진로가 생산방식을 증류식에서 희석식으로 전환하면서부터다.

70년 12월 진로는 소주 시장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의 대표 주류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진로는 85년 장학엽씨가 사망하기 전인 84년 11월에 불거진 경영권 분쟁으로 일대위기를 맞았다.


이미 경영권 분쟁은 75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장학엽씨가 자신의 5형제 가운데 둘째인 학섭씨의 장남 익용씨에게 그룹을 맞길 때부터 예고돼 있었다. 장학엽씨의 아들 진호씨가 당시 나이 23세로 경영을 맡기에는 어린나이였기 때문이다. 익용씨는 ㈜진로 사장, 진로위스키 회장, ㈜서광 사장을 역임하면서 실질적인 회장직을 수행했다.

총수 과욕·탐욕으로 무너진 '두꺼비 신화'
장본인 장진호 캄보디아·중국서 호의호식

84년 말, 장학엽씨가 병환이 심해지자 진호씨와 장학엽씨의 이복형 봉용씨가 익용씨에게 이제 경영권을 넘겨줄 때가 됐다고 말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이에 진호씨는 익용씨몰래 주식을 매입하고 우호지분을 끌어 모아 85년 10월 주총에서 경영권을 손에 넣게 됐다. 그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다.

이후 익용씨는 ㈜서광을, 봉용씨는 소주 원료를 생산하는 진로발효를, 진호씨는 진로그룹을 맡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88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은 '탈주류'를 선언하고 빠른 속도로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80년대 후반에만 종합광고업에 진출하고 연합전선, 진로위스키, 진로종합유통, 진로백화점, 진로제약, 진로건설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91년에는 수출입 전문회자 JRI를 설립하고 식품회사인 펭귄과 진로음료를 합병해 진로종합식품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한국터미널과 진로유통을 합병해 진로종합유통을 설립했다.

92년에는 진로쿠어스맥주를 설립해 94년 '카스'를 생산개시했으며 영국 그랜트와 합작해 위스키 시장에 진출했다. 중국 북진그룹과 합작으로 총 20억달러 규모의 종합빌딩 타운 개발사업에도 진출했고 청주 제2백화점 착공, 홈비디오와 멀티미디어 사업에도 참여했다. 96년 말 기준 진로그룹은 총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순위 19위의 재벌로 급부상했다.

그룹 무너뜨린
'탈주류'선언


이러한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로는 계열사들에게 출자금, 대여금 등으로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97년 초부터 진로의 자금 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97년 4월 기준 진로그룹의 부채총액은 은행권 1조200억원, 제2금융권 2조5000억원 등 총 3조7000억원에 달했고 자기자본비율은 4.34%에 불과했다. 24개 계열사 중 10여 개 사는 적자였다.

위기탈출을 위해 진로는 트럭터미널과 남부터미널, 아크리스백화점 청주 진로백화점 등 계열사들을 대거 처분, 총 1조2000억원을 마련해 구조조정자금으로 사용키로 했고 상업은행과 서울은행에 추가융자를 요청, 각각 600억원, 400억원을 빌렸다.

"진로일가, 아직도 막강한 재력 자랑"

그러나 경기침체로 계열사와 부동산 매각은 쉽지 않았고 은행들은 추가지원을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정부가 나섰다. 강경식 당시 부총리는 막 구상단계에 있던 부도방지협약을 적용, 진로 살리기에 나섰다.

하지만 완성되지 않았던 부도방지협약은 은행권보다 제2금융권의 대출비중이 높은 기업에 부도방지협약이 적용되면 제2금융권이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고, 이를 의식한 제2금융권이 대출회수에 나설 경우, 오히려 부도를 촉진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진로그룹이 여기에 딱 들어맞았다.

검찰 수배 받고도
술집·카지노 운영

예상대로 채권은행들은 진로그룹의 모든 어음 지급을 동결하고 긴급자금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제2금융권은 경쟁적으로 어음을 돌려 자금을 회수하려 했다.

마침내 진로는 97년 4월21일 조흥은행 서초동지점에 돌아온 어음 213억원과 상업은행 서초동지점에 지급 제시된 당좌수표 83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되고 말았다. 이후 채권단에 의해 화의 인가 결정을 받았지만, 결국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진로그룹의 계열사들은 청산절차를 밟거나 타사에 인수되거나 일부 사업부문이 양도되는 형식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주력 기업인 진로는 하이트그룹에 인수되어 하이트진로그룹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진로건설은 대우조선해양에 인수되어 대우조선해양건설로 새롭게 태어났다.

진로쿠어스맥주는 OB맥주에 인수되었다가 OB맥주 또한 구조조정 차원에서 폴란드 인터브루사에 지분을 넘겨 실질적 소유권은 외국의 다국적 맥주회사로 넘어간 상태다. 진로엔지니어링은 LG그룹으로 넘어가 LG ENC로 새출발했고 청주진로백화점과 진로하이리빙은 개인 소유로 넘어갔다. 기타 계열사들은 대부분 청산됐다.

2003년 9월 자신이 소유하던 진로 주식 119만9474주(8.14%)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경영권에서 물러난 장진호 전 회장은 5496억원을 사기 대출받고 비자금 7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수차례 재판 끝에 장 전 회장은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2005년 2월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그 직후 다른 비자금 건으로 검찰의 수배를 받았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장 전 회장은 이미 2002년 '찬삼락'이라는 현지 이름을 취득한 상태로 진로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캄보디아행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분별한 사업다각화로 그룹 공중분해
소주는 경쟁사, 맥주는 외국사에 매각


캄보디아에서 장 전 회장은 'ABA은행'을 운영했다. ABA은행은 지난 1996년 진로그룹에 의해 설립된 은행으로 현지에서는 '한국의 은행'으로 통했다. 그러나 이 은행은 진로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채권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장 전 회장은 은행 뿐 아니라 부동산 개발회사, 경견장, 스몰카지노, 단란주점까지 손을 댔다. 금융 브로커로 알려진 김재록씨와 함께 소주회사를 설립하는 '55 프로젝트'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회장은 현재 세금 미납액과 각종 금융 기관의 체납액, 벌금 등 수백억원이 넘는 빚이 있다. 그럼에도 장 전 회장이 아무 제약 없이 현지에서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훈센 총리의 장녀 '훈마나'의 비호 덕분이었다. 훈마나는 캄보디아에서 정치권력은 물론 언론까지 장악하고 있어 장 전 회장은 훈마나와 모종의 거래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장 전 회장은 ABA은행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탈세를 하는 등 '먹튀' 전략을 쓰는 바람에 캄보디아 관리들에게 신뢰를 잃어 그는 현재 캄보디아를 떠나 중국으로 건너간 상태다.

지난해 2월에는 장 전 회장이 중국 북경 왕진 소재에 체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장 전 회장은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인 사장을 앞세워 법인을 둔 게임 업체 '이다양광'에 투자, 운영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장 전 회장의 근황을 보도한 언론에 따르면 장 전 회장이 투자한 이다양광 게임사에서 최근 게임 개발에 착수했던 개발자들이 몇 개월 동안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 국내로 복귀한 상태다. 장 전 회장은 현재 중국 게임업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에 투자를 하고 있으며 현지인 법인을 통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80년 역사의 진로그룹을 공중 분해시킨 장본인은 아무 걱정 없이 화려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서 해외서도
잘 먹고 잘 산다


국내에 남아있는 장 전 회장의 가족들도 탄탄한 재력을 자랑하고 있다. 2011년 사망한 장 전 회장의 이복형인 장봉용 전 진로발효 회장의 부인 서태선씨는 27.%의 진로발효 주식을 보유해 최대주주에 올라있으며 올해 21억원을 배당받아 여성 배당부자 7위에 올랐고 자녀 진혁씨와 진이씨는 각각 18.3%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사촌형인 장익용 회장은 여성 정장 제조업을 하는 ㈜서광을 이끌고 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진로그룹은?>

▲1924년 진천양조상회 설립
▲1954년 서광주조(진로) 설립
▲1970년 소주시장 1위
▲1985년 장학엽 창업주 사망
▲1988년 장진호 회장 취임
▲1980년대 새그린, 연합전선, 진로위스키, 진로종합유통, 진로백화점, 진로제약, 진로건설 인수 및 설립
▲1990년대 초 진로쿠어스맥주, 진로베스토아, 진로종합식품, 진로인터스트리즈, 여성전문 케이블 텔레비전, 진로하이리빙, 진로지리산샘물 등 계열사 확장
▲1997년 부도
▲1998년 화의 인가 결정
▲2003년 4월 이후 법정관리, 계열사 매각 및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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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