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방파 대굴욕 전말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2.18 14: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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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두목님 개망신…김태촌 뜨니 '동네북'

[일요시사=사회팀] 서울 청담동 유명 고깃집 사장이 서울 도심 한 가운데서 납치됐다. 고깃집 사장의 정체는 유명 조폭이었다. 연예계는 물론 정·재계에도 발을 뻗친 이 거물을 누가 납치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80년대 전국구 주먹시대를 열었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가 지난달 5일 세상을 떠났다. 김씨를 기억하는 이들은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김씨의 빈소로 시시각각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범서방파 조직원 나모(48)씨도 있었다. 나씨는 김씨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인물로 유족들과 함께 김씨의 장례식을 도맡아 옛 보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킨 심복 중의 심복이다.

김태촌 사후
최측근 납치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나씨는 범서방파와 경쟁 관계에 있는 국제PJ파 조직원 조모(54)씨 등에게 납치·폭행을 당했다. 나씨의 납치 사건은 지난 3일 벌어졌다. 범서방파 조직원으로 전해진 익명의 제보자 A씨에 따르면 이날 가해자 조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나씨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만나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와 나씨는 과거 금전거래를 하는 등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서울 강남구 청담사거리 인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청담사거리에는 나씨가 운영하는 유명 고깃집이 있었다. 특별한 의심 없이 조씨를 만나러 간 나씨는 이날 오후 9시께 차를 몰고 나타난 조씨를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조씨는 나씨에게 "나와 이야기 좀 하자"며 나씨의 승차를 권했고, 차에 탄 나씨는 조씨에게 납치당했다.

조씨의 차량은 경기도 용인 기흥 방면으로 향했다. 이동 과정에서 조씨는 조폭 5명과 함께 나씨를 폭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함께 있던 조폭 5명이 국제PJ파 소속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나씨를 납치한 차량은 서울을 떠난 지 약 5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 1시50분께 기흥 휴게소에 도착했다. 나씨는 그곳에서 조씨 등에게 "소변이 마려우니 내려달라"고 말한 뒤 차량 밖으로 급히 빠져나왔다. 휴게실 식당에 숨은 나씨는 곧장 경찰에 납치·폭행사실을 신고했고, 신고 사실을 눈치 챈 조씨 일당은 즉각 사건 현장에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3대 패밀리 주축 악명 높은 전국구 조직
사실상 1인자 국제PJ파에 납치·폭행

사건 관련 진술에서 A씨는 "조씨가 나씨에게 '곧 큰 도박판이 열리니 2억원을 준비하라'고 전했다"면서 "국제PJ파는 오래 전부터 범서방파와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다가 이번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씨는 경찰 조사에서 개인적 채무 관계로 일어난 말다툼이 커진 사건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 간의 세력 다툼을 말한 A씨와 개인 원한을 말한 나씨의 진술이 상호 엇갈리는 상황. 현재 경찰은 금전 관계로 인한 납치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조폭 간 세력 다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나씨와 조씨 모두 오래 전부터 거대 조직의 실력자로 지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 A씨는 이번 사건을 전하며 "나씨가 최근 범서방파 새 두목으로 추대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나씨가 새 두목으로 추대돼 조직을 이끌어왔다는 소문은 와전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씨와 고인인 김씨가 워낙 친밀했다 보니 "나씨가 조직을 다시 추스르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확대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씨 주변을 수년간 취재해 온 한 기자는 "나씨가 범서방파에서 행동대장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복수 언론에 이미 확인된 내용으로 나씨는 김씨가 전성기를 맞았던 1980년대부터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86년 7월 인천에서 벌어진 뉴송도호텔 사건에 개입한 김씨는 나씨에게 사주해 뉴송도호텔 H모 사장을 습격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은 서울고검 P모 부장검사의 이권개입 파문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검사와 조폭간의 검은 커넥션이 드러났고, 이는 국민적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P검사는 결국 옷을 벗었고 폭행을 사주한 김씨는 수감됐다. 특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김씨는 수감 이후 많은 수하를 잃었는데 약해진 범서방파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씨는 계속 김씨 곁을 지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가 수감과 출소를 반복하던 90년대. 범서방파 출신 조직원들은 차례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연예매니지먼트, 외식 사업 등에서 성공을 거뒀다. 사업가로 변신해 큰 성공을 거둔 나씨 역시 고깃집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항간에서는 김씨가 출소 후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자 몇몇 후배들이 김씨에게 예우 차원에서 돈봉투를 건넸다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김씨 주변에서는 "김씨가 잘 모르는 돈을 받았다가 또다시 사정기관의 표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같다"는 증언도 들렸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김씨는 돈봉투를 거의 받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씨 곁을 꾸준히 지킨 나씨는 김씨 투병 중에도 남몰래 수천만원의 치료비를 수차례 건넸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의심이 많았던 김씨지만 그런 김씨도 나씨에게만큼은 마음을 터놨던 것으로 보였다.

은퇴한 실력자
최대조직 보스

김씨가 대외적으로는 손을 씻고 신앙 활동에 전념한 사이 나씨는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다. 특히 나씨가 1999년부터 운영했던 고깃집은 명사들의 단골집으로 더욱 유명세를 치렀다. 2000년대 초반 연예인들이 즐겨 찾는 고깃집으로 수차례 전파를 탔던 P고깃집은 분점을 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집의 단골 명사로 알려진 배우는 한류스타 B씨, 남자 배우 S씨, P씨, K씨, L씨, 여자배우 L씨, S씨, C씨, H씨 등이며, 가수 L씨와 J씨, 개그맨 L씨와 Y씨도 이 고깃집에 자주 나타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깃집 사장인 나씨의 휴대폰에는 4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주로 연예계 종사자들이 많은데 웬만한 방송 드라마 종영 파티도 이 고깃집에서 열릴 정도로 연예계와 나씨의 친분은 두텁다.

특히 가수 K씨는 나씨의 고깃집 운영이 어려워지자 수천만원을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등 나씨와 각별한 우정을 과시해 눈길을 끌었었다. 한때는 의형제라고 불릴 정도로 붙어 다니며, K씨 측근들과 자주 술자리를 갖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2004년 나씨는 수입 소고기를 한우로 둔갑시켜 팔다가 경찰에 탈세 혐의로 체포됐는데 이때 탄원서를 제출한 것도 바로 K씨다. K씨 외에도 L씨와 Y씨 등이 "나씨는 예술을 이해할 줄 아는 분"이라며 법원의 선처를 호소했다. 나씨는 수입 갈빗살과 안창살을 한우로 속여 팔아 모두 42억여원의 부당이득을 챙기고, 10억여원에 이르는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받았다.

나씨는 지난 2007년 H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도 연루됐다. 당시 행동책이었던 범서방파 출신 오모씨가 그룹 측 관계자와 나씨가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만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나씨가 직접 폭행에 관여한 건 아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나씨의 마당발 인맥은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됐다. 나씨가 지금도 조폭계 거물로 분류되는 건 이 같은 넓은 인맥에 기인한다는 것이 사정기관의 중론이다.

이와 관련 한 경찰 관계자는 "나씨가 과거 '3대 패밀리'로 불렸던 범서방파 출신인 건 사실이나 실질적인 역할은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나씨가) 아마도 사업이 잘 풀리면서 오래전 현역을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실제 경찰은 현재 범서방파 조직원을 11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50대에 가깝거나 이미 50대를 넘긴 원로급으로 일선에서 조직 활동을 벌이기에는 다소 나이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나씨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 때문에 주변에서는 늘 나씨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씨가 한우를 공급받았던 호남 일대의 축산 농장도 조폭들의 은신처로 의심받았을 정도다.

특히 과거 범서방파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조폭들은 돈벌이가 여의치 않을 때면 과거 조직원들을 찾아가 '반강제적인 도움'을 요청했는데 주로 성공한 사업가들이 그 타깃이 됐다. 그리고 이들 사업가 중 일부는 현역들의 꾀임에 넘어가 다시 조폭 사업에 발을 들이는데 나씨가 지금도 이들 조폭의 이권다툼에 개입됐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은퇴 했다니까
돈만 내놓으쇼

이런 나씨를 납치한 국제PJ파는 호남을 근거로 한 광주지역 최대폭력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PJ파는 1986년 무렵, 광주 충정로에 있는 국제당구장과 PJ음악감상실을 주 집결지로 애용했는데 이를 수사하던 당국은 이들을 묶어 국제PJ파로 분류했다. 그러면서 국제PJ파라는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제PJ파의 탄생 배경과 관련 한편에서는 범서방파 일원이었던 김모씨가 서열 문제로 조직을 나와 국제PJ파를 만들었다는 설이 들린다. 하지만 호남을 근거로 한 조직이 워낙 많은 탓에 이들의 계보가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현재 범서방파와 국제PJ파 전쟁설이 도는 이유는 양 조직 모두 호남 출신 조폭이라는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찍이 전국구 반열에 올라선 범서방파와 달리 국제PJ파는 호남에 남아 세를 키웠다. 이는 양 조직 간의 격차를 불러왔다. 범서방파 김씨가 정·관계를 주무르며 사업의 스케일을 불린 것과 달리 국제PJ파의 조씨 등은 독자 사업에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것. 실제 조직원 규모에서는 두 조직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굴리는 돈다발'이 다르다 보니 양 조직 간 격차가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김씨 수감 후 범서방파는 대부분 서울에 자리 잡고 안정적인 소득원을 찾았다. 하지만 국제PJ파는 1990년대부터 광주지검의 집중 수사를 받으며 사실상 와해 수순을 밟았다.

개인적인 원한? 조직 세력다툼?
"조만간 피 튀는 전쟁 일어난다"
범서방파 vs 국제PJ파 혈전 임박

재계와의 커넥션을 담당했던 현모씨, 여모씨 등이 구속됐고 이번 납치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조씨도 수감됐다. 국제PJ파가 이제 막 전국구로 올라설 무렵이었다.

그러다보니 국제PJ파는 늘 범서방파에 대해 '매스컴이 만들어 낸 조폭'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세력도 약하고 깜냥도 안 되는 조직이 한 마디로 너무 과대 포장됐다'는 푸념이었다.

국제PJ파는 호남에 남아 다른 조직과 '전쟁'도 하고 조직 보존을 위해 여러 활로를 개척하는 등 나름 조직범죄를 벌여왔다. 하지만 범서방파는 알려진 것에 비해 조직 활동도 전무하고, 그 흔한 업소 관리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다는 주장이다.

실제 2000년대 중반까지 조직원이 12명으로 축소된 범서방파와 달리 국제PJ파는 58명을 유지하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조씨 등 수뇌부는 이미 너무 많이 사정기관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서울에 기반이 있는 조직들은 손을 씻고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지방 조직들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자리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제PJ파가 하우스 도박 등을 서울 인근에서 벌여온 것은 바로 본격적인 서울 진출의 신호로 해석됐다. 지방에서 안 되는 장사를 하느니 위험부담이 좀 있더라도 서울에서 돈 되는 장사를 하겠다는 속셈이다.

지난 2011년 나씨가 모친상을 당하자 김씨는 빈소로 조화를 보냈다. 국제PJ파도 조화와 함께 빈소에 방문했다. "내가 친하거나 존경하진 않아도 지킬 땐 지키는 게 건달들의 룰"이라고 한 전직 조폭은 얘기했다. 이렇듯 김씨 생전까지만 해도 양 조직 간 전쟁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김씨가 그들 세계에서 분명한 '선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성이 다르다고 한 관계자는 얘기한다. 이 관계자는 거듭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 경찰 관계자는 "서울 한복판에서 조직 대 조직 간의 전쟁은 힘들지 않겠냐"고 예상했다. 조직으로 움직이면 형량도 배가 되는데 그것도 현행범으로 체포될만한 일을 누가 하겠냐는 것이다.

전쟁보다
조직보존

이렇듯 이번 사건을 둘러싼 여러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조씨 등은 현재 나씨 납치·폭행 외에도 공갈 등의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고 있다. 그들은 현재 비닐하우스 등에서 속칭 '산도박'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고, 오피스텔 등을 빌려 '하우스 도박'을 펼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 분명한 건 최근 국제PJ파 자금줄이 여의치 않다는 사실적 정황이다. 이 같은 전제 하에 '조직 대 조직'의 전쟁은 힘들어도 '조직 대 개인'의 린치는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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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