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재계는 지금 '차남 전성시대'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01.11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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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보다 잘나가는 ‘아우 회장’ 뜬다

[일요시사=경제1팀] 재벌가에선 장남이 곧 기업을 잇는다는 장자계승 공식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 조금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차남들은 늘 형보다 못한 2위 자리에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재계는 지금 ‘차남 전성시대’다. 누구의 동생, 누구의 둘째아들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경영수완을 발휘하며 경영전면에 나선 ‘실세 차남’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다.

 

 

‘차남 경영시대’를 써가는 대표적인 인물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다. 서 회장은 새해 첫날 사장에서 회장으로 전격 승진하면서 오는 2020년까지 세계 7대 화장품 회사로 발돋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고 서성환 창업주의 차남인 서 회장은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 코넬대학교 경영대학원을 마친 수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87년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전신인 태평양화학에 입사하면서 2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탁월한 성과로
경영능력 입증

서 회장의 경영능력은 1992년 경영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던 태평양제약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빛을 발했다. 붙이는 관절염 치료제 ‘케토톱’을 개발해 흑자로 전환시키는 등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

이후 그는 1994년부터 3년 동안 태평양 기획조정실을 총괄하면서 체계적인 경영 시스템을 만드는 등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부친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서 회장은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1997년에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명돼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사장 취임 후 서 회장은 아모레퍼시픽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명품 기업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설화수, 헤라, 라네즈, 아이오페, 마몽드 등 기존 제품을 잇달아 히트 브랜드로 변신시키며 업계의 부러움을 샀다.

이후 2002년 3월 글로벌기업으로서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영문 상호인 아모레퍼시픽 코퍼레이션을 처음 선보였고 2003년 1월 부친이 숙환으로 별세한 이후에는 자신만의 패러다임으로 회사를 이끌어 갔다.

그는 창업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기존의 보수적인 경영에서 벗 어나 능력급제 등 개혁정책을 펼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혁신은 곧 성과로 이어졌다. 서 회장은 사장 취임 후 12년 만인 2010년엔 회사 규모를 네 배로 키워냈다. 회사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서 회장 자신도 지난해 말 자산 2조원 이상의 부자클럽에 이름을 올리는 경사를 맛봤다.

경영권 승계 ‘세컨드’바람…“내가 제일 잘나가”
형 그림자에 가려있다 뒤늦게 급부상 지휘봉 잡아

지난해 초 1조7950억원이었던 서 회장의 자산총액이 연말에 2조8380억원으로 58.1%나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상장 및 비상장 주식부자 100명 중 9위였던 서 회장의 순위는 1년 만에 4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반면 동생보다 5년 먼저 회사에 입사해 후계 경영수업을 받던 장남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은 탁월한 경영성과를 낸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긴 뒤 종합산업, 금속, 용기 등 기술 소재분야를 물려받았으나, 서 회장이 이끌고 있는 회사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너무 초라한 수준이다.


국내 재계 5위 규모인 롯데그룹의 후계자 역시 신격호 총괄회장의 차남 신동빈 회장이다. 신 회장은 신 총괄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인 일본인 시게미쓰 하츠코 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MBA를 마치고 1981년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

롯데에 몸을 담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일본 롯데상사 입사 하면서 부터다. 2년 뒤 한국 롯데그룹에 합류해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입사했고, 코리아세븐 전무를 거쳐 1997년 그룹 기획조정실 부회장으로 임명됐다.

신 회장은 이때부터 사실상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혔다. 2004년 기획조정실이 정책본부로 격상됐고 신 회장이 본부장을 맡으며 실질적 사령탑으로 그룹 경영을 진두지휘해온 것이다.

신 회장은 노무라 증권에서 쌓은 국제 금융 감각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M&A를 단행하며 그룹의 외형 성장도 주도했다. 그의 공격적인 M&A는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과 인도네시아 대형마트 마크로, 벨기에 초콜릿 회사 길리안, 말레이시아 석유화학 기업 타이탄 등을 인수해 해외 시장을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갔다.

롯데그룹은 나날이 덩치를 키우면서 2010년 사상 최대 규모인 61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매출 기준으로 삼성-현대기아차-SK-LG에 이어 국내 재계 5위 그룹의 자리를 확고히 굳혔다.

불리한 여건서
출발해 성공

이후 2011년 2월, 신 회장은 롯데그룹 정기 임원인사에서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의 적통을 이어 받았다.
이에 반해 신 총괄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부회장은 한국롯데에 비해 규모가 10배 이상 작은 일본 롯데를 맡고 있다.

신 회장이 형을 제치고 한국롯데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공격적인 경영스타일이 한 몫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인 신 부회장은 내성적인 성격에다 학자풍인 반면 신동빈 회장은 보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스타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바게뜨로 유명한 SPC그룹 허영인 회장도 허창성 창업주의 차남이다. 삼립식품 창업주인 허창성 회장은 장남인 허영선씨에게 삼립식품을 물려주고, 차남 허 회장에게는 삼립식품의 자회사였던 샤니를 넘겨줬다.

당시 샤니는 삼립식품에 비해 회사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회사였다. 매출 규모도 삼립식품의 10%정도로 초라했다.

샤니를 물려받은 허 회장은 미국 대학 경영학과(MBA)를 포기하고 한우물만 파기 시작했다. 미국 제빵학교에서 빵과 과자에 대해 배웠고, 귀국 후 파리크라상과 파리바게뜨를 설립, 태극당과 고려당이 장악했던 한국 제빵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허 회장은 손대는 브랜드마다 모두 1위로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식품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샤니를 모태로 성장한 허 회장호 SPC그룹은 2000년 매출액이 4800억원이었던 작은 기업에서 3조 원을 넘어서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SPC그룹은 파리크라상,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 던킨도너츠, 빚은, 파스쿠찌 등 5000여개의 점포를 운영 중이다.

반면 삼립식품 본체를 넘겨받은 형 허씨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리조트 사업에 크게 투자했다가 부도를 막지 못했다. 1997년 부도 후 5년여에 걸친 법정관리 기간에 마이너스 성장과 적자를 지속하던 삼립식품은 결국 동생 허 회장이 운영하던 샤니가 2002년 말 인수했다.

대권 받은 동생
‘형제의 난’도

국내 주류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하이트-진로그룹의 경우도 박경복 조선맥주 창업주를 이어 차남인 박문덕 회장이 이끌고 있다. 박 회장은 만년 2위에 머물던 하이트맥주를 업계 1위로 올려 논 장본인이다.

1991년 박 회장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할 당시만 해도 조선맥주는 시장점유율 20%, 부채비율 1600%로 회생가능성이 없는 부실회사였다. 그러나 박 회장은 사장 취임 2년 만에 회장에 오르며 하이트맥주를 개발, 시장에 선보였고 조선맥주를 완전히 변모시켰다.


그 결과 업계1위던 OB맥주를 밀어내고 선두 자리에 올라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 회장은 2005년 소주 시장 1위 업체 진로를 인수하면서 소주와 맥주 시장 최강자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반면 박 회장의 형인 박문효 하이트산업 대표는 동생의 성공으로 덕을 본 케이스다. 하이트산업은 맥주병과 포장제조 등을 담당하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동생인 고 정인영 창업주가 설립한 한라그룹 역시 차남인 정몽원 회장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정 회장은 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라해운에 입사, 일찌감치 경영 수업을 쌓아온 인물이다. 그는 만도기계 차장, 한라공조 대표, 만도기계와 한라건설 대표이사 사장을 거치면서 1992년 그룹 부회장직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한라그룹의 전체 총괄 책임자는 형 정몽국 회장의 몫이었다. 1989년 부회장에 오른 뒤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한라레미콘 등의 그룹 주요 계열사를 지휘해 정 회장이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할 것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세대교체·위기극복 두 마리 토끼
경영능력 시험 통해 회사 대물림

그러나 1995년 3월 창업주는 돌연 정몽국 회장을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으로 내보내고 정몽원 회장을 총괄 경영자로 새롭게 선임하면서 그간 그려온 후계구도를 뒤엎었다. 정 회장이  임원인사 및 경영상의 문제로 실점을 한 것이 창업주의 눈 밖에 난 원인이었다. 

장자 승계가 돌연 차남인 정 회장에게 돌아가자 형제간의 앙금은 소송으로 번졌다. 경영악화에 의해 한라시멘트 등 부도처리된 계열사를 정리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 때문이다.

형은 동생으로부터 한라시멘트 등 주식반환 소송을 제기하며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지만 2009년 9월 한라건설 주식을 전량 처분 하면서 일단락됐다.

이 밖에도 형을 제치고 그룹 대권을 차지한 재계 케이스는 무수히 많다. 우선 참치캔으로 잘 알려진 동원그룹의 경우 김재철 회장의 차남인 김남정 부사장이 동원엔터브라이즈를 이끌며 실질적인 식품분야 후계자로 낙점을 받은 상황이다.

반면 김 회장의 장남인 김남구씨는 그룹의 비주류인 금융분야를 물려받아 현재 한국투자금융지주 대표로 재직 중이다.

우루사로 유명한 대웅제약도 장남이 아닌 차남 윤재훈 부회장이 그룹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위치에 올라 있다.

이 회사 창업주인 윤영환 회장이 장남에게는 대웅식품을 맡기고, 차남인 윤재훈 부회장에게는 그룹의 중추인 제약부문을 일임한 것이다. 반면 윤 회장의 삼남인 윤재승 부회장은 지주회사와 신규·해외사업을 담당하고 이다.

삼형제간 경영권 경쟁구도가 명확하게 드러난 효성그룹의 경우도 장남인 조현준 사장보다는 차남인 조현문 부사장이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조현준 사장은 미국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세간의 질타를 받은 것은 물론 등기이사로 재직 중이던 진흥기업이 워크아웃에 처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 6개의 IT기업을 엮어 만든 ‘갤럭시아그룹’도 지난해 수백억원의 적자를 내며 경영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조현문 부사장은 그룹의 주력사업인 중공업 부문장으로 재직하며 지난해 말 눈에 띄는 경영성과를 일궈 냈다.

‘형이냐 아우냐’
그것이 문제로다

특히 그는 2006년부터 중공업 부문을 도맡아 오며 매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는데, 중국 남통우방 변압기 기업 인수나 750kW 및 2MW 급 풍력발전시스템 국내 최초 인증 등은 업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재계 관계자는 “섬유와 중공업, 산업자재 등 2세들이 각자 맡은 부문을 잘 이끌어가고 있지만 특히 조 부사장은 그룹 전체 실적 악화의 주요 원인이었던 중공업 부문의 흑자전환에 성공하면서 경영능력에 대한 재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고 말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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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