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추천] 가족 온천여행 ④충주

‘왕의 온천’에 몸담그면 “나는 왕이로소이다”

수안보온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 용출 온천이다. 시추 과정 없이 온천수가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는 말이다. 그만큼 물의 힘과 성분이 뛰어나다. 53℃ 온천수는 pH8.3의 약알칼리성을 띠며, 칼슘과 나트륨, 불소, 마그네슘 등 무기질이 풍부하고, 라듐 성분이 포함되었다. 수안보온천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자체가 온천수를 관리하는 중앙 집중 방식을 고집한다. 충주시에서 온천수를 확보한 뒤 대중탕이나 호텔 등으로 온천수를 제공하는 것이다. 수질 관리와 온천수 보호를 위해서다. 수안보온천지구에 자리한 대다수 호텔과 콘도, 모텔 등이 이런 식으로 온천수를 공급받는다. 대중탕은 물론 모텔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도 이렇게 제공된 온천수다. 덕분에 이용객은 어디에서든 양질의 온천수를 즐길 수 있다.

지하250m 암반에서 솟아나는 왕의 물, 수안보온천
충주호의 수려한 경관과 문화재 등 볼거리 ‘다채’

 수안보 하면 온천이다. 전국 곳곳에 온천이며 테마 워터파크가 우후죽순 생겨나도 중·장년의 뇌리에는 ‘수안보=온천’이라는 공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수안보온천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해도 찬바람 부는 이즈음이면 생각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자연 속 힐링
시린 마음이 사르르

수안보온천의 역사는 유구하다. 수안보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문종 때 편찬한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종 9년(1018년), 상모현에 온천이 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상모현은 수안보의 고려 시대 지명. 이후에도 수안보는 온천으로 유명했다.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청구선표도> <대동여지도> 등 많은 문헌에 거론된 수안보온천에 대한 내용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이성계가 피부염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내용이, 충북 사료인 <청풍향교지>에는 숙종이 휴양과 요양을 위해 수안보에서 온천을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수안보온천을 ‘왕의 온천’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안보 지역이 온천지로 본격 개발된 것은 조선 말기 일본인에 의해서다. 1885년 노천식 온천이 생겨났으며, 1908년에는 초보적인 욕사(浴舍)가 등장했다. 근대식 대중탕은 8년 뒤인 1916년에 선보였다.

1926년에는 몰려드는 욕객을 감당할 수 없어 근대식 장비를 사용해 온천공을 뚫었는데, 이듬해 수안보를 찾은 욕객이 2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수안보 인구가 1000명 남짓하던 시절이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해방 이후에도 수안보온천의 인기는 꾸준했다.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등 역대 대통령도 수안보온천을 즐겨 찾았으며, 1970년대에는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1980년대에는 최고의 가족 여행지로 성황을 누렸다.

수안보온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 용출 온천이다. 시추 과정 없이 온천수가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는 말이다. 그만큼 물의 힘과 성분이 뛰어나다. 지하 250m 암반층에서 솟는 온천수는 53℃로, pH8.3의 약알칼리성을 띤다.

칼슘과 나트륨, 불소, 마그네슘 등 무기질이 풍부하고 라듐 성분이 포함되어 피부 질환이나 부인병, 위장 장애와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무색·무미·무취한 온천수는 식수로 음용도 가능하다.

수안보온천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자체가 온천수를 관리하는 중앙 집중 방식을 고집한다. 수질 관리와 온천수 보호를 위해 충주시에서 온천수를 확보한 뒤 대중탕이나 호텔 등에 제공한다. 수안보온천지구에 자리한 대다수 호텔과 콘도, 모텔 등이 이런 식으로 온천수를 공급받는다.

대중탕은 물론 모텔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도 이렇게 공급받은 온천수이다 보니 이용객은 어디서든 양질의 온천수를 즐길 수 있다. 자그마한 모텔이라도 욕조에 물만 채우면 온천탕이 되는 셈이다. 호텔급 숙소에서는 객실과 별도로 대욕탕을 운영해 보다 여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수안보온천지구의 모든 숙소에서 온천수를 제공하는 건 아니다. 최근에 생긴 곳이나 다른 이유로 온천수를 제공하지 못하는 곳도 더러 있다. 온천수를 제공하지 않는 곳을 숙소로 정한 경우 대중 온천탕을 찾으면 된다.

하이스파는 (사)수안보온천관광협의회가 충주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온천장이다. 수돗물을 일절 섞지 않고 자연 냉각 방식을 통해 온천수의 온도를 조절하는데, 이를 위해 옥상에 거대한 냉각 수조 두 개를 마련해두었다.

볼거리 풍성
흥미진진

수안보에는 대중 온천 외에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워터파크식 온천, 가족과 연인을 위한 가족탕도 있어 입맛 따라 즐기면 그만이다. 물론 알싸한 겨울 공기를 맞으며 즐기는 노천탕도 빼놓을 수 없다. 각 숙박 시설의 온천수 제공 여부는 온천수 사용 허가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충주 여행에서 온천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충주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드는 충주호를 즐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월악나루나 충주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충주호를 둘러보는 것이다. 옥순봉과 구담봉 등 충주호가 품은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둘째, 대미산에 올라 충주호의 모습을 감상하는 방법이다. 구불구불한 충주호의 모습이 꼭 물가로 기어 나오는 악어를 닮았다고 해서 ‘악어섬’이라 불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대미산 등산로는 내비게이션에 ‘월악도토리묵밥’을 검색한 뒤 찾아가면 된다. 묵밥집에서 도로를 지나 전봇대 뒤로 돌아가면 등산로가 나온다.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는 수안보온천지구에서 차로 15분이면 닿을 수 있다. 고려 초에 세워진 이 절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향한 구조로, 대원지에는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95호)과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이, 대원지 인근에는 고려 시대 제작된 삼층석탑과 불두가 있다.

수안보온천이 있는 수안보면에서 충주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나는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512호)도 놓치기 아깝다.

지난 2012년 7월 개관한 충주 고구려비전시관에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국보 205호)를 비롯해, 고구려에 대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결정적 유물이다. 전시관 관람은 무료,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월요일 휴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은 탄금호가 내려다보이는 중앙탑공원에 있으며, 신라 원성왕 때 국토 중앙에 조성되었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불린다. 중앙탑공원에는 ‘술박물관 리쿼리움’도 있다. 지난 2005년 개관한 세계 최초 종합 술박물관 리쿼리움에는 설립자 이종기 관장이 수년에 걸쳐 수집한 술 관련 자료 5000여 점이 전시됐다.


자료출처 :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여행정보]

당일 코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리쿼리움 →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 충주 미륵대원지 → 수안보온천

1박2일 코스
첫째 날 : 충주고구려비전시관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리쿼리움 → 월악나루 → 수안보온천
둘째 날 : 충주 미륵대원지 → 하늘재 → 충주호 악어섬 조망 →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 충주공예전시관

관련 웹사이트
충주시청 문화관광 http://cj100.net/tour 
수안보온천 www.suanbo.or.kr
술박물관 리쿼리움 www.liquorium.com
충주공예전시관 www.cjcraft.net

문의전화
충주시청 관광과 043)850-6731 
(사)수안보온천관광협의회 043)846-3605
술박물관 리쿼리움 043)855-7333 
충주공예전시관 043)854-0281
충주고구려비전시관 043)850-7301

대중교통
버스   
서울-충주 :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매일 20~30분 간격 운행
(첫차 06:00, 막차 23:00), 1시간 50분 소요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매일 약 20분 간격 운행
(첫차 06:00, 막차 21:40) 1시간 40분 소요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 → 괴산교차로 충주 방면 좌회전 → 추점삼거리 직진 → 수안보온천

숙박
조선관광호텔 : 수안보면 조산공원길 99, 043)848-8833, http://www.suanbo.co.kr/
수안보상록호텔 : 수안보면 주정산로 22, 043)845-3500, http://www.sangnokhotel.co.kr/
수안보파크호텔 : 수안보면 탑골1길 36, 043)846-2331, http://www.suanbopark.co.kr/
수안보대림호텔 : 수안보면 온천천변길, 043)846-3111, www.suanbo.ne.kr
동양온천호텔 : 수안보면 주정산로, 043)846-1155
수안보성시스파호텔 : 수안보면 수안보로, 043)843-2001, www.hotelsuanbo.com
수안보온천랜드 : 수안보면 주정산로, 043)855-8400, www.suanbo.pe.kr

식당
감나무집 : 꿩 요리, 수안보면 미륵송계로, 043)846-0608
소라가든 : 꿩 요리, 수안보면 노포란길, 043)846-7819
대장군 : 꿩 요리, 수안보면 미륵송계로, 043)846-1757, http://daejanggun.oir.co.kr
느티나무가든 : 꿩 요리·올갱이해장국, 수안보면 주정산로, 043)847-4676
대동식당 : 버섯전골·흑돼지, 수안보면 온천리, 043)846-3406

주변 볼거리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 최함월고택, 충주시택견전수관, 향산리미술촌(향산리 미술체험학교), 수주팔봉, 탄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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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