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자동차인가, 자본인가, 아니면 시민인가.
신간 <도시혁신의 정치학>은 이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세계 주요 메가시티들이 어떻게 ‘사람의 도시’로 체질을 개선하고 있는지 추적한다. 이 책은 파리, 런던, 뉴욕, 바르셀로나, 시애틀 등 혁신의 아이콘이 된 도시들이 기후위기, 교통 혼잡, 불평등이라는 복합적 과제에 대응하는 과정을 정책·도시계획·정치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단순한 해외 사례 소개를 넘어, 도시혁신이 어떤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갈등 속에서 싹을 틔웠는지 성찰한다는 점이 이 책만의 독보적인 특징이다.
1997년 광화문, “횡단보도를 돌려다오”에서 시작된 여정
책의 뿌리는 1997년 서울 광화문 네거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광화문은 보행자가 지상으로 건널 수 없는 ‘자동차의 영토’였다. 시민 서명운동을 통해 횡단보도를 되찾았던 저자의 경험은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남겼다.
광화문 횡단보도 복원을 주도했던 임삼진 원장(녹색도시연구원)과 에너지 정의를 위해 헌신해온 김태호 대표(에너지나눔과평화)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도시혁신의 동력을 되찾기 위한 고뇌 어린 탐사 보고서이기도 하다.
세계의 도시들은 어떻게 거대한 전환을 이뤄냈나
책은 각 도시가 직면한 갈등과 이를 돌파한 전략을 심도 있게 다룬다.
파리 : 속도의 도시에서 삶의 도시로
안 이달고 시장의 ‘15분 도시’ 전략과 일드프랑스의 페크레스 의장이 주도한 혁신 움직임을 분석한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파리가 어떻게 쾌적한 삶터로 변모했는지 살핀다.
런던 : 기후와 보건을 결합한 녹색 정치
혼잡통행료를 넘어 초배출저감구역(ULEZ) 확대를 통해 대기질 개선과 교통 패러다임 전환을 이룬 과정을 담았다. 사딕 칸 시장의 3선 성공 배경과 녹색 정책이 어떻게 주류 정치가 됐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뉴욕 : 불완전하기에 더 위대한 실험
타임스퀘어 보행자전용공간화부터 건물 탄소 배출을 규제하는 ‘Local Law 97’, 험난했던 버스 개혁과 혼잡통행료 도입까지, 자동차 중심의 뉴욕을 바꾸기 위한 대담하고도 처절한 사투를 분석한다.
바르셀로나 : 공간 혁명과 디지털 민주주의
도로를 시민에게 돌려준 ‘슈퍼블록(Superblock)’ 모델과 시민 참여 플랫폼 ‘데시딤(Decidim)’을 통해 구현된 디지털 민주주의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 밖에도 시민 투표를 통해 대중교통 위기를 극복한 시애틀의 사례와 함께, 팬데믹 이후 세계적 화두가 된 ‘15분 도시’의 설계 원리와 지역 경제 파급 효과를 정리했다.
“도시혁신의 다이내믹이 죽은 도시에는 미래가 없다”
저자들은 “혁신은 갈등을 먹고 자란다”고 단언한다. 파리의 도로 재편이나 뉴욕의 혼잡통행료 도입은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 더 깨끗한 공기와 활력 넘치는 공간을 선물했다.
이 책은 도시혁신의 키워드로 ▲속도에서 삶으로 ▲성장에서 지속가능성으로 ▲효율에서 형평으로 ▲이동에서 머무름으로 ▲기술에서 참여로 등을 제시한다.
저자는 “도시혁신의 다이내믹이 죽은 도시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멈춰버린 도시혁신의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이끌 리더십의 전면적인 인식 전환과, 이를 견인할 시민사회의 치열한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지점은 지금 우리 곁에서 사라져버린 ‘공공의 기업가 정신’이다. 본래 시정(市政)은 과감한 도전을 통해 시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엔진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단편적인 치적 쌓기에 몰두하는 홍보의 하위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거시적 안목이나 사회적 형평성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담대한 모색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험도 사라진 도시는 결국 활력을 잃고 서서히 침잠하고 있다. 임삼진 박사는 이러한 ‘리더십의 부재’야말로 오늘날 도시혁신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라고 통렬히 비판한다.
도시가 미래를 향해 전진하려면 거버넌스의 세 축인 시민사회, 시장(Market), 행정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동시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혁신을 추동해야 한다. 도시는 고착된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며, 진정한 혁신은 깨어 있는 시민의 참여와 단호한 정치적 결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시민들의 대답이야말로 멈춰버린 도시혁신의 엔진을 다시 돌릴 유일한 열쇠라고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