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몽키하우스’ 미군 위안부 수용소 ⑧모종의 자책감과 무기력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6.01.05 04:53:47
  • 호수 15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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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헌병은 청운을 한동안 주시했으나 별 말없이 뒤쪽으로 걸어갔다 청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허약한 심정에 대해 비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 헌병의 가죽 장갑 낀 손이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헌병의 등장

“주민등록증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헌병은 이미 그의 앞에 와 서서 엄중히 훑어보며 말했다.

청운은 잠바 안주머니에서 귀향증을 꺼내 가죽 손에게 내밀었다. 헌병은 잠시 살펴보고 되돌려 주며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실례했습니다.”

헌병이 내려가고 나자 고물 버스는 다시 털털거리며 행로를 짚어 나갔다. 마치 나무 지팡이를 짚고 바쁜 길을 가는 노인네처럼.

또록하다면 또록하고 흐릿하다면 흐릿한 기억하지만, 청운에겐 검문소에 의한 아픈 상흔이 있었다. 여섯 일곱 살쯤 된 어린 시절이었던 듯싶다. 지금과는 다른 여름철,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외갓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젖어 있었지만 제정신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조금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긴 했으나 가끔 큼직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강을 따라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더니 군모를 쓴 어떤 아저씨가 올라왔다.

그는 청운의 볼을 슬며시 쓰다듬은 다음 아버지에게 민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잠바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깜빡 잊었다고 변명했다. 냉정한 군인 아저씨는 “잠시만 내려주십시오” 하고 거듭 재촉했다.


왕년엔 아버지 자신도 순경으로서 수상쩍은 사람을 닦달하며 끌고 간 적도 있었고 그런 사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도 했지만 군인 헌병에겐 통하지 않았다.

“뭘 죄가 없으면 왜 그리 자꾸 뒤로 빼는 거여. 다들 바쁜 길인데…….”

승객들의 구시렁거림을 못 이겨 아버지는 결국 주춤주춤 버스에서 내렸다.

청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눈짓하면서……

하지만 아버지가 버스 문을 내려 사라지는 순간 청운은 질린 표정으로 곧장 뛰따라 내렸다.

푸른 강 위에 긴 철제 다리가 놓였고 그 앞쪽에 검문소가 설치돼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던 청운은 깜짝 놀랐다.

기다리마던 버스가 아무 말도 없이 출발해 다리 위를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운은 두 손을 들어 내저으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 차의 선반 위엔 소중한 물건이 든 가방이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다행히 별일 없이 풀려나왔지만 꿈이 든 그 가방은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청운은 다급히 아버지를 밀치고 검문소 안으로 들어가서 울먹이며 실상을 알렸다. 아버지는 뒤늦게 깨닫곤 헌병에게 화를 냈으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기껏 헌병이 세워 준 다른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 봤지만 끝내 가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불뚝성까지 내어가며 따지긴 따졌으되 차부 앞 술집에서 대포 한잔을 들이켜고는 시나브로 잊고 야릇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 아빠가 초능력을 쓰면 저절로 돌아오고말고, 허헛허…….”

청운은 그런 얘길 믿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어쩜 저럴 수 있을까 하고 외려 증오하고픈 심정이었다.

하긴 오랜만에 처갓집에 간다는 자가 제멋대로 자란 수염도 깎지 않고 후줄근한 꼴로 거들먹거리는 데야 누군들 믿을까 싶었다.

그 가방 속엔 약소하나마 어린 소년의 부푼 꿈이 담겨 있었다.

멋진 그림이 들어간 신기로운 옛이야기 책과 정글북, 피노키오, 보물섬 같은 미지의 동화…… 그리고 앙징맞은 만화경과 망원경, 산새가 지저귀는 듯한 옥색 호루가기, 예쁜 딱지, 돋보기 따위의 장난감…… 엄마가 그걸 마련해 주었을 때 미리 좀 슬쩍 살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가방 속에 챙겨 넣었었다.

외할머니 집에 가서 하나씩 꺼내 호기심을 풀고 산마을의 동무들과 함께 가지고 놀면 한층 더 즐거울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젠 날아가 버린 파랑새가 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것이기에 더욱 신비롭고 그립고 아쉬운지도 몰랐다.

어린 소년의 부푼 꿈 담긴
소중한 가방을 잃어버리다

‘아, 그때 그 향긋한 자연 속에서 그 멋진 동화를 읽으며 예쁜 꿈을 키우고, 신기로운 장난감들과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면…… 혹시 그랬다면 내 미래는 좀더 밝게 변화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선감도에도 끌려가지 않고…….’

청운은 그 잃어버린 가방만 생각하면 언제라도 안타까운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소중한 물건을 상실한 외로운 아이는 모종의 자책감과 무기력증에 빠져 서글픈 여름을 보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도박과 폭행죄로 경찰에 구속되었고 석방된 다음엔 술병에 걸려 집안 형편은 서서히 내리막길에 놓였다.

그리고 청운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어 세상의 밑바닥을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백주 대낮에 무장간첩이 날뛰고 살인 강도 강간범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이니 검문검색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잠시면 된다며 끌고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영원히 조각내 버리는 짓은 하지 말았으며 좋겠어. 자기들 멋대로! 차라리…… 겉모양을 점잖게 꾸민 채 한밤중에 나라 돈을 쥐새끼처럼 솔솔 빼 처먹는 높으신 분네들이나 제대로 검문검색해서 그 잘난 상반신 혹은 하반신을 상실케 했으면 좋겠네. 무엇을 하든 상하 한쪽이 격심한 갈증과 낙망을 느끼도록…….’

청운은 생각에 잠겨 차창을 열곤 밖을 내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답답한 심정을 조금쯤 날려보내 주었다.

버스가 종착지에 도착해 가래 끓는 듯한 괴로운 호흡을 겨우 멈추었다. 청운은 아직껏 잠에 빠져 있는 옆자리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뒤 버스에서 내렸다.

음습한 터미널을 벗어나 일단 한길가로 나선 청운은 갑자기 삭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겨울이라지만 아직 해가 많이 남은 세 시경인데도 길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소읍 같은 인상을 풍겼다.

냉랭한 바람만이 전신주를 윙윙 울리며 불어대면서 먼지와 종이 조각 따위를 이리저리 흩날렸다. 빈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으스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차도 그다지 다니지 않았다.

청운은 천천히 길 건너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급한 건 없으니까 방랑자처럼 슬슬 구경이나 해보지 뭐. 사심 없이 걷다 보면 의외로 목적지가 더 가까워지기도 할 테니 말야. 애써 찾으려 들면 길이 일부러 실타래처럼 꼬인 양 헤매게 되는 경우도 많더군.’

청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지의 딴세상에 온 듯 걸었다.

멋대가리라곤 없이 단조롭게 뻗은 길이지만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엔 허바허바 사진관, 뉴욕 미장원, 마미 제과점, 샤인 금은방, 미미 양품점, 보이스 전파사, 러브 레스토랑, 신세계 극장, 로얄 애견숍, 샤론 의상실, 바우 전축, 동두천 제1직업소개소, 오쇼 복덕방, 법류사무소와 대서소, 친선 결혼상담소, 아델라이다 꽃집 등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ㄱ자로 꺾어 돌자 병원, 잡화점 같은 간판도 보였다. 그런데도 행인이 드물어서인지 유령 마을 같은 첫 인상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청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바로 그때, 요란스런 굉음이 지축을 울리며 멀찍이서 들려왔다. 이어 일군의 군용 차량이 줄지어 아스팔트를 지나갔다.

탱크, 장갑차, 검은 괴물 같은 트레일러, 뭔지 잔뜩 적재한 대형 트럭, 오일탱크를 실은 차량 등 기나길 수송행렬이었다.

성조기와 ‘U.S.A. Army’라는 흰 표식이 찍힌 그 차량들은 한국의 하늘에 뜬 태양을 무시하듯 아직 한낮인데도 굳이 인위적인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다.

그건 거대한 드래곤의 눈알처럼 의뭉스럽고 자만심으로 무장된 듯이 보였다.

거대한 드래곤

잠시 후 저쪽 하늘 높이 헬리콥터 편대가 나타나더니 요란스런 프로펠러 회전음으로 공기를 찢고 햇빛을 조각조각내어 반사하면서 줄지어 날아갔다.

겨울 하늘 한구석에 떠 있던, 얇게 썰어 놓은 배의 속살 같은 희미한 반쪽 낮달이 불안감을 못 이겨 파르르 떠는 듯이 느껴졌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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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