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헌병은 청운을 한동안 주시했으나 별 말없이 뒤쪽으로 걸어갔다 청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허약한 심정에 대해 비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 헌병의 가죽 장갑 낀 손이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헌병의 등장
“주민등록증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헌병은 이미 그의 앞에 와 서서 엄중히 훑어보며 말했다.
청운은 잠바 안주머니에서 귀향증을 꺼내 가죽 손에게 내밀었다. 헌병은 잠시 살펴보고 되돌려 주며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실례했습니다.”
헌병이 내려가고 나자 고물 버스는 다시 털털거리며 행로를 짚어 나갔다. 마치 나무 지팡이를 짚고 바쁜 길을 가는 노인네처럼.
또록하다면 또록하고 흐릿하다면 흐릿한 기억하지만, 청운에겐 검문소에 의한 아픈 상흔이 있었다. 여섯 일곱 살쯤 된 어린 시절이었던 듯싶다. 지금과는 다른 여름철,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외갓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젖어 있었지만 제정신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조금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긴 했으나 가끔 큼직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강을 따라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더니 군모를 쓴 어떤 아저씨가 올라왔다.
그는 청운의 볼을 슬며시 쓰다듬은 다음 아버지에게 민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잠바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깜빡 잊었다고 변명했다. 냉정한 군인 아저씨는 “잠시만 내려주십시오” 하고 거듭 재촉했다.
왕년엔 아버지 자신도 순경으로서 수상쩍은 사람을 닦달하며 끌고 간 적도 있었고 그런 사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도 했지만 군인 헌병에겐 통하지 않았다.
“뭘 죄가 없으면 왜 그리 자꾸 뒤로 빼는 거여. 다들 바쁜 길인데…….”
승객들의 구시렁거림을 못 이겨 아버지는 결국 주춤주춤 버스에서 내렸다.
청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눈짓하면서……
하지만 아버지가 버스 문을 내려 사라지는 순간 청운은 질린 표정으로 곧장 뛰따라 내렸다.
푸른 강 위에 긴 철제 다리가 놓였고 그 앞쪽에 검문소가 설치돼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던 청운은 깜짝 놀랐다.
기다리마던 버스가 아무 말도 없이 출발해 다리 위를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운은 두 손을 들어 내저으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 차의 선반 위엔 소중한 물건이 든 가방이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다행히 별일 없이 풀려나왔지만 꿈이 든 그 가방은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청운은 다급히 아버지를 밀치고 검문소 안으로 들어가서 울먹이며 실상을 알렸다. 아버지는 뒤늦게 깨닫곤 헌병에게 화를 냈으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기껏 헌병이 세워 준 다른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 봤지만 끝내 가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불뚝성까지 내어가며 따지긴 따졌으되 차부 앞 술집에서 대포 한잔을 들이켜고는 시나브로 잊고 야릇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 아빠가 초능력을 쓰면 저절로 돌아오고말고, 허헛허…….”
청운은 그런 얘길 믿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어쩜 저럴 수 있을까 하고 외려 증오하고픈 심정이었다.
하긴 오랜만에 처갓집에 간다는 자가 제멋대로 자란 수염도 깎지 않고 후줄근한 꼴로 거들먹거리는 데야 누군들 믿을까 싶었다.
그 가방 속엔 약소하나마 어린 소년의 부푼 꿈이 담겨 있었다.
멋진 그림이 들어간 신기로운 옛이야기 책과 정글북, 피노키오, 보물섬 같은 미지의 동화…… 그리고 앙징맞은 만화경과 망원경, 산새가 지저귀는 듯한 옥색 호루가기, 예쁜 딱지, 돋보기 따위의 장난감…… 엄마가 그걸 마련해 주었을 때 미리 좀 슬쩍 살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가방 속에 챙겨 넣었었다.
외할머니 집에 가서 하나씩 꺼내 호기심을 풀고 산마을의 동무들과 함께 가지고 놀면 한층 더 즐거울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젠 날아가 버린 파랑새가 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것이기에 더욱 신비롭고 그립고 아쉬운지도 몰랐다.
어린 소년의 부푼 꿈 담긴
소중한 가방을 잃어버리다
‘아, 그때 그 향긋한 자연 속에서 그 멋진 동화를 읽으며 예쁜 꿈을 키우고, 신기로운 장난감들과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면…… 혹시 그랬다면 내 미래는 좀더 밝게 변화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선감도에도 끌려가지 않고…….’
청운은 그 잃어버린 가방만 생각하면 언제라도 안타까운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소중한 물건을 상실한 외로운 아이는 모종의 자책감과 무기력증에 빠져 서글픈 여름을 보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도박과 폭행죄로 경찰에 구속되었고 석방된 다음엔 술병에 걸려 집안 형편은 서서히 내리막길에 놓였다.
그리고 청운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어 세상의 밑바닥을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백주 대낮에 무장간첩이 날뛰고 살인 강도 강간범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이니 검문검색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잠시면 된다며 끌고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영원히 조각내 버리는 짓은 하지 말았으며 좋겠어. 자기들 멋대로! 차라리…… 겉모양을 점잖게 꾸민 채 한밤중에 나라 돈을 쥐새끼처럼 솔솔 빼 처먹는 높으신 분네들이나 제대로 검문검색해서 그 잘난 상반신 혹은 하반신을 상실케 했으면 좋겠네. 무엇을 하든 상하 한쪽이 격심한 갈증과 낙망을 느끼도록…….’
청운은 생각에 잠겨 차창을 열곤 밖을 내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답답한 심정을 조금쯤 날려보내 주었다.
버스가 종착지에 도착해 가래 끓는 듯한 괴로운 호흡을 겨우 멈추었다. 청운은 아직껏 잠에 빠져 있는 옆자리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뒤 버스에서 내렸다.
음습한 터미널을 벗어나 일단 한길가로 나선 청운은 갑자기 삭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겨울이라지만 아직 해가 많이 남은 세 시경인데도 길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소읍 같은 인상을 풍겼다.
냉랭한 바람만이 전신주를 윙윙 울리며 불어대면서 먼지와 종이 조각 따위를 이리저리 흩날렸다. 빈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으스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차도 그다지 다니지 않았다.
청운은 천천히 길 건너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급한 건 없으니까 방랑자처럼 슬슬 구경이나 해보지 뭐. 사심 없이 걷다 보면 의외로 목적지가 더 가까워지기도 할 테니 말야. 애써 찾으려 들면 길이 일부러 실타래처럼 꼬인 양 헤매게 되는 경우도 많더군.’
청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지의 딴세상에 온 듯 걸었다.
멋대가리라곤 없이 단조롭게 뻗은 길이지만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엔 허바허바 사진관, 뉴욕 미장원, 마미 제과점, 샤인 금은방, 미미 양품점, 보이스 전파사, 러브 레스토랑, 신세계 극장, 로얄 애견숍, 샤론 의상실, 바우 전축, 동두천 제1직업소개소, 오쇼 복덕방, 법류사무소와 대서소, 친선 결혼상담소, 아델라이다 꽃집 등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ㄱ자로 꺾어 돌자 병원, 잡화점 같은 간판도 보였다. 그런데도 행인이 드물어서인지 유령 마을 같은 첫 인상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청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바로 그때, 요란스런 굉음이 지축을 울리며 멀찍이서 들려왔다. 이어 일군의 군용 차량이 줄지어 아스팔트를 지나갔다.
탱크, 장갑차, 검은 괴물 같은 트레일러, 뭔지 잔뜩 적재한 대형 트럭, 오일탱크를 실은 차량 등 기나길 수송행렬이었다.
성조기와 ‘U.S.A. Army’라는 흰 표식이 찍힌 그 차량들은 한국의 하늘에 뜬 태양을 무시하듯 아직 한낮인데도 굳이 인위적인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다.
그건 거대한 드래곤의 눈알처럼 의뭉스럽고 자만심으로 무장된 듯이 보였다.
거대한 드래곤
잠시 후 저쪽 하늘 높이 헬리콥터 편대가 나타나더니 요란스런 프로펠러 회전음으로 공기를 찢고 햇빛을 조각조각내어 반사하면서 줄지어 날아갔다.
겨울 하늘 한구석에 떠 있던, 얇게 썰어 놓은 배의 속살 같은 희미한 반쪽 낮달이 불안감을 못 이겨 파르르 떠는 듯이 느껴졌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