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놀다 가. 잘해줄게, 응?”
“찾는 사람이 있어서…….”
“아이 참, 장미나 백합만 꽃인가 뭐.”
여자는 아양을 떨었다.
“무슨……?”
폐병 든 찔레꽃
“아이 참, 코스모스나 맨드라미도 개성이 있고 치자꽃은 향기로워 좋잖아, 응?”
“그럼 혹시 폐병 든 찔레꽃을 알아요? 다리를 절룩거렸는데…….”
여자는 입에서 껌을 꺼내 무심중에 매만져 딱딱 소리를 내면서 청운을 흘겨보았다.
“혹시 그 찔레 언닐 잘 알어? 흠, 단골은 아닌 것 같고…… 고향 동생이야, 아님 고이 숨겨둔 기둥서방이셨나?”
여자는 자기 말이 실없는지 깔깔 웃어댔다.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요?”
“어디? 흠, 알면 꽃 천지로 데려다가 살게?”
“…….”
“여기 없어.”
“그럼?”
“서너 달 전에 동백꽃 지듯 피를 머금고 죽어 버렸어.”
여자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랬군요. 그럼 이만…….”
청운은 돌아섰다. 그때 여자가 아까보다 더 완강하게 그의 팔을 낚아챘다.
“그냥 가려구? 매정한 남자!”
“그럼……?”
“내가 그 언니의 뼛가룰 산에 뿌려 주었단 말야. 그쪽이 궁금해 할 얘길 더 해줄 수도 있구…….”
“음.”
여자는 청운의 표정을 흘낏 보곤 낚시에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손아귀를 푼 뒤 앞장서 골목 안쪽으로 스며 들어갔다.
허름한 건물 앞에서야 청운은 겨우 전에 한번 와 본 곳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자를 따라 삐걱거리는 마루를 지나 한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불을 켜자 화사한 분홍빛이 좁은 공간을 에로틱한 분위기로 물들였다.
“좀 앉아 있어. 음료수 한잔 가져올게. 혹시…… 술도 좀 사올까?”
“그래요. 소주든 맥주든 좋을 대로…….”
“화끈해서 좋아. 역시 전설의 순정파답군.”
“뭔 소리유?”
“아, 그런 게 있어. 우선 돈부터 좀 줘.”
청운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아이, 마음통도 참 크셔라.”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뛰어나갔다.
‘난 과연 죽은 폐병쟁이 창녀의 얘기를 얻어 듣기 위해 여기 앉아 있는 것일까?
혹시…… 육욕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모르겠다. 그걸 따져 봤자 뭘 하나. 내 인생은 돌고 도는 만화경처럼 허망했는걸…….’
청운은 불그무레한 방안에 홀로 남자 생각에 잠겼다. 그는 마치 멜랑콜리한 감상에 젖은 노인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입귀로만 슬쩍 웃었다.
얼마 후 여자가 검은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몸에서 추위의 비늘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카운터에도 있는데 너무 비싸게 후려 처먹기 땜에 살짝 가게에 가서 사왔어.”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비닐봉지에서 소주와 구운 오징어를 꺼냈다. 그녀는 두 잔에 찰랑찰랑 술을 따르고 나서, 잠시 낡은 레코드 판을 조작해 구슬픈 노래를 흘려 내었다.
화사한 분홍빛 에로틱한 분위기
가장 큰 미군 기지촌 동두천으로
“자, 일단 건배! 대단한 척하는 세상도 한 찰나뿐이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삶을 위해 건배!”
청운은 잔을 맞대곤 묵묵히 소주를 들이켰다.
“고통 속에 살다가 동백꽃 같은 피를 흘리며 저승으로 갔지만, 만약 영혼이란 게 있다면 그 언닌 그나마 기분이 괜찮겠네. 젊은 신랑이 순정을 걸고 찾아왔으니 말야.”
여자는 짓궂은 눈길을 던지며 웃었다.
“화장해서 뼛가루를 뿌려 줬다구요?”
“그랬었지.”
그녀는 새 담뱃갑의 은테를 돌려 개봉한 후 한 개비 피워 물곤 연기를 휘 내뿜었다.
“그 언닌 별명이 찔레 아니랄까 봐 은근히 톡 쏘는 면이 있었지. 폐병까지 들어 피를 한 모금씩 토하는 주제에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니? 결국엔 무정한 세상에 낙엽보다 못한 신세가 되어 길바닥을 떠돌다가…… 마지막 며칠 동안은 이 방에서 나하구 함께 어렵사리 지냈어.”
“그랬구나.”
“응, 그 언니가 평소엔 얌전한데도, 한번씩 술에 취해 양반집 고명딸이었네 어쩌네 허풍을 떨면 별로 보기 좋진 않았지.”
여자는 술잔을 들어 홀짝 마셨다.
“음, 이제 세상 떠난 사람 얘긴 그만하죠.”
“그래요. 이제부턴 산 사람들을 위해 건배!”
둘은 잔이 깨질 듯 쨍 부딪쳤다.
“그럼 자긴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이젠 여기 청량리에 정착할 거야?”
여자는 자기가 반쯤 마신 술잔을 청운의 입에 대어 주며 물었다.
“난 일년 전에 청량리역 시계탑 앞에 온 후로 아무곳에도 가지 않았어. 냉동돼 있었던 것만 같아.”
“뭐?”
“내게 청량리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어딘가로 찾아 떠나려고 준비하는 곳일 뿐…….”
“어딜 가려고?”
“동두천.”
청운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긴 왜?”
“아는 형을 만나러…….”
“거기가 어떤 곳인 줄 알어?”
“사람 사는 동네겠지 뭐.”
“사람은 살지만, 인간 지옥이란 얘기두 있어.”
“왜요?”
인간 지옥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거긴 미군부대가 들어서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기지촌이래. 양갈보들이 우글우글한다더구먼. 변소의 구더기 같은 것들…….”
여자는 혀를 쯧쯧 찼다. 마치 자신은 갈보나 창녀가 아닌 듯……
그러나 속마음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지 상을 잔뜩 찡그린 채 소주를 입속에 털어넣었다. 그러고는 짐짓 이중 감정 속에서 갈등하는 양 머리카락을 파르르 흔들었다.
“괜히 흥분하는 것 같네. 여기나 거기나 뭐 크게 다를 게 있다구…….”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