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절 대란’ 의약품 유통구조 실태

텅텅 비는 약국들 이유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아픈 몸을 이끌고 약국을 찾은 환자들은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약국 입구에 붙은 ‘항생제·해열제 품절’이라는 안내문 때문이다. 그 흔하던 감기약조차 재고가 끊기면서, 환자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약사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전국 약국에서 감기약·항생제·혈압약 등 필수 의약품이 품절되는 사태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감기약과 항생제 같은 기본적인 치료제부터 ADHD 치료제·정신과 약까지 재고가 끊기면서, 약국과 환자 모두가 겪는 불편이 커지고 있다.

수급 불안정
회복은 아직

올해 들어 품절은 더욱 심화됐다. 수도권은 물론 지방 약국에서도 약을 구하지 못해 환자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발생했던 의약품 수급 불안정 현상이 현재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약사들은 “몇 군데 업체에 전화를 돌렸지만 전부 ‘없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품절 및 공급 중단 사태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 자료에 따르면, 의약품의 공급 중단 및 부족 보고 건수는 매년 급증하고 있다. 2021년 288건이었던 보고 건수는 2022년 315건을 넘어섰으며, 2023년에는 432건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약 37.1% 폭증했다.


최근 보건의료계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이 생산 부족이나 일시적 수요 급증 때문이 아니라 ‘의약품 유통구조 전반의 결함’에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계절성 겨울철 감기·호흡기 질환 유행으로 수요가 급증한 영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업계에서는 근본 원인이 수요 증가가 아니라 유통구조에 쌓여온 문제라는 것이다.

국내 의약품은 제조사가 만들었다고 해서 바로 약국으로 공급되지 않는다. 즉 대부분의 제약사가 약을 주문하면 도매업체를 통해 약국으로 공급되는 다단계 유통을 거친다. 약국은 수십에서 수백개 업체가 취급하는 의약품을 한곳에서 받을 수 없어, 필요할 때마다 여러 도매업체와 각각 거래해야 해야 한다.

먼저 제약사는 생산한 의약품을 도매업체에 공급한다. 일부 품목은 제약사가 직접 병·의원이나 일부 약국에 공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도매업체를 통한다. 1차 도매업체는 제약사로부터 대량으로 물량을 확보한 뒤, 이를 다시 지역별 중소 도매업체나 약국으로 공급한다.

일부 품목은 2차·3차 도매를 거치기도 한다. 도매업체는 이 과정에서 물량을 배정하고, 특정 약의 재고를 먼저 확보한 뒤 약국에 나눠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도매업체 간 규모·자본·전산 수준에 따라 재고 확보 능력에 큰 차이가 있어, 같은 약이라도 어느 도매업체와 거래하느냐에 따라 공급 상황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감기약·항생제 수개월째 모자라
의약품 공급 중단 사태 매년 급증

약국은 필요한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도매업체와 동시에 거래를 유지한다. 감기약, 항생제, 전문의약품 등 품목군마다 취급 도매처가 다르고, 도매처마다 확보하고 있는 재고도 제각각이라 한곳에서 모든 약을 조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국이 아침마다 여러 업체의 재고를 확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의약품 재고를 한눈에 확인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현재 국내에는 통합된 의약품 재고 전산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약품 생산부터 배송, 약국 도착까지 모든 단계가 분리된 채 운영되고 있어, 어느 도매업체가 어떤 약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는 도매업체 간 재고 정보가 서로 공유되지 않는 구조기 때문에 특정 도매업체에 약이 없을 경우,  다른 도매업체에 재고가 남아 있어도 현실적으로 약국은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에 반해 해외 주요 국가들은 이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미 재고·유통 실태를 투명하게 관리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미국은 2013년 ‘의약품 공급망 보안법(DSCSA)’을 제정해 처방 의약품의 생산부터 약국에 도착하기까지 모든 유통 과정을 전자적으로 기록하고 추적하도록 의무화했다.

제약사는 제품 포장마다 고유 식별번호를 부여하고, 도매업체와 약국 등 공급망 참여자는 거래 이력과 거래 정보를 전산 시스템을 통해 주고받는다. 이를 통해 특정 의약품이 어느 제조사에서 출고돼 어떤 도매처를 거쳐 어느 약국으로 이동했는지 확인이 가능하도록 했다.

위조약 방지 목적이 크지만, 자연스럽게 공급망 전체의 재고 흐름도 함께 관리되는 구조다.

유럽연합 역시 ‘위조 의약품 방지 지침(FMD)’을 시행해, 대부분의 처방약 포장에 2차원 바코드와 고유 식별번호를 의무적으로 부착하고 있다. 약국과 도매업체는 의약품을 취급할 때마다 이를 스캔해 중앙 데이터베이스에서 진위 여부와 유통 경로를 확인한다.

파악 불가
품절 심화

일련번호가 데이터베이스와 일치하지 않거나 중복 등록될 경우 즉시 경고가 뜨는 시스템으로, 유럽 내에서는 의약품의 이동 경로가 거의 실시간으로 관리되는 셈이다.

위조약 유통을 막기 위해 도입됐지만, 결과적으로 의약품 재고 파악과 공급 안정성 확보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어느 구간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특정 지역의 공급이 부족하면 다른 지역 재고를 재배치하는 조치도 가능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의약품 추적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약국은 필요할 때마다 여러 도매업체 사이트를 각각 확인하거나 직접 전화를 걸어 재고를 묻는 방식으로 재고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한국의 유통구조 특성상 재고 파악 문제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많다.

실시간 재고 파악이 어려운 이유는 유통 단계가 여러 겹으로 나뉜 구조 때문이다. 일부 품목은 1차 도매업체에서 2차·3차 도매업체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단계별로 재고 흐름이 따로 기록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실제 어느 단계에서 병목이 발생했는지 확인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는 품절이지만, 다른 지역이나 다른 도매처에는 재고가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를 확인할 통합 시스템이 없어 약국은 매번 개별적으로 재고를 찾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통 단계의 복잡성뿐만 아니라 도매업체가 제공하는 재고 시스템이 모두 다르다는 문제도 있다. 국내 의약품 유통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도매업체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국가통계포털(KOSIS) 기준 의약품 도매업체는 약 4000곳 수준으로, 같은 시기 의약품 제조소가 300여곳 정도인 것에 비교하면 10배 이상 많은 규모다.

이 때문에 각 업체가 사용하는 전산 방식·재고관리 방식도 제각각이다. 일부 대형 도매업체는 자체 재고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중소 도매업체는 수기 관리·부분 전산화 등 수준이 크게 달라 재고 데이터를 표준화하기 어렵다.

시스템도
제각각

이처럼 도매업체가 급증한 이유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 의약품 도매업 진입장벽이 낮다는 점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의약품 도매업은 일정한 시설 기준·전문 인력 요건 등 법적 조건을 충족하면 비교적 쉽게 영업이 가능하다.

제조업과 달리 설비투자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중소 규모의 업체도 시장에 진입할 수 있어, 도매업체 수가 꾸준히 늘어났다.


지역 단위의 공급 구조가 강하게 형성된 점도 도매 난립을 부추겼다. 약국은 대부분 인근 지역 도매업체와 거래를 유지해 왔고, 각 지역별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도매업체가 세분화돼 설립됐다. 그 결과 전국에 소규모 도매업체가 촘촘하게 분포하는 형태가 만들어졌다.

병·의원·약국의 의약품 구매 구조가 도매 중심으로 고착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제약사로부터 직접 공급받기보다 도매업체를 통해 주문·결제·배송을 처리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도매업체가 자연스럽게 시장의 핵심 공급망 역할을 맡게 됐다. 이 과정에서 신규 도매업체가 계속 시장에 진입했다.

유통 마진 구조가 도매업체 생존을 가능하게 한 점도 난립을 만든 배경으로 꼽힌다. 약국이 여러 도매업체와 동시 거래하는 관행 속에서, 도매업체들은 경쟁적으로 할인·물량 제공 등을 내세워 거래처를 확보해 왔고, 이 과정에서 규모가 작더라도 일정 수준의 거래만 유지하면 영업 지속이 가능했다.

이 같은 요인들이 누적되면서 국내 의약품 도매업은 제조업 대비 매우 많은 사업자가 존재하는 구조로 고착됐다.

이처럼 제약사에서 생산된 의약품이 약국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고, 각 단계마다 운영 방식이 달라 통합적인 관리가 어렵다는 점이 현재 의약품 유통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바로 이 구조적 특성이, 품절 사태가 반복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도매업체 4000곳 재고 파악 어려워
유통구조 불투명해 편법행위 반복

의약품 품절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인기 품목을 둘러싸고 도매업체와 약국 간 ‘선점 경쟁’이 반복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특정 감기약·해열제·항생제처럼 수요가 몰리는 품목은 도매 단계에서 물량이 확보되자마자 바로 소진되는 경우가 많아 약국에서는 정상 공급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도매업체가 먼저 확보한 물량부터 우선 배정하면서, 일부 대형 거래처로 공급이 집중되고 중소 약국은 주문 자체가 어려워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쟁여두기’, 즉 재고를 비축해두는 관행이다. 특정 약이 품절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면, 도매업체뿐 아니라 일부 약국까지 앞다퉈 평소보다 많은 물량을 주문해 보유하려는 경우가 생긴다. 수요보다 심리적 불안이 앞서면서 재고 편중이 더 심해지는 구조다.

의약품 품목별 공급 불안정이 길어지면서 이른바 ‘끼워팔기’ 문제도 다시 불거지고 있다. 끼워팔기는 특정 인기 약을 주문할 때 다른 약까지 함께 구매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문제로 지적되돼온 관행이다.

공급이 불규칙해지자 일부 도매업체가 흔한 품목이나 판매가 빠르지 않은 품목을 같이 구매해야만 인기 약을 공급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진 탓이다.

지난 5월에는 GLP-1 계열 비만치료제 삭센다 공급이 부족해지자, 한 유통업체가 상대적으로 재고가 충분한 위고비와 묶어 판매했다는 논란이 있었고, 약사회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이런 행위가 공급망 왜곡을 심화시키고, 정상적으로 약을 확보할 권리가 있는 약국에까지 불이익이 돌아가게 한다는 비판 목소리가 나온다.

심지어 최근에는 소문을 만들어 품절을 시키는 이른바 ‘가짜 품절’ 문제도 생기고 있다.

실제로 한 도매업체 영업사원이 “추석 이후 특정 진해거담제 시럽이 품절될 수 있다”는 문자메시지를 약국 여러 곳에 발송했다. 해당 문자가 발송된 뒤 약국 주문이 폭증했고, 이후 해당 제품은 실제로 품절됐다. 유통업체는 개인 일탈이라고 해명했지만, 약사회는 “소문이 품절을 만든 전형적인 가짜 품절 사례”라고 규정했다.

판치는
편법행위

이 같은 편법행위들이 발생하는 근본은 재고·유통 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는 데에 기인한다. 어느 도매처에 재고가 남아 있는지, 실제 공급이 중단된 것인지 약국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소문이나 문자 한 통이 시장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결국 품절 상황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실제 품절인지, 일시적 부족인지조차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환경이 불필요한 혼란을 키우고 있다”며 “유통구조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