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홀 한 구석쪽에 붙은 주방으로 다가섰다. 하얗고 투명한 커튼이 반쯤 쳐진 창문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안쪽에서 어떤 소리가 새어나왔다. 비명은 아니지만 겁에 질려 허덕거리며 떨리는 목소리였다.
청운은 슬쩍 훔쳐보았다. 바깥 홀의 현란함에 비해 의외로 어두워 보이는 공간 속에서 어떤 자가 식칼을 든 채 킬킬거리고 있었다.
칼을 숨기고
“너 계속 그렇게 멍청하게 굴래? 왜 아직도 메뉴를 제대로 못 외어서 이 주방궁의 황제인 나를 욕먹이냐구! 뱃대길 콱 찔러 버릴까, 응?”
“아으으…… 주방장님…… 한번만 살려 주시면 다음엔 잘할게요. 흐으…….”
식칼의 퍼런 날 앞에 선 소년이 주춤주춤 구석쪽으로 물러나며 애걸했다. 식칼을 쥔 사내는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점점 공포에 질린 소년 쪽으로 다가서며 위협을 했다. 소년은 털썩 무릎을 꿇곤 두 손을 모아 비벼댔다.
“제발…… 앞으론 제왕님의 명령대로 따를게요. 미라 누나에게 편지도 잘 전달하고 팬티도 자주 훔쳐 올 테니…….”
“쌍놈 새끼, 넌 항상 피맛을 좀 봐야만 정신을 차리니까 어쩔 수 없어.”
사내의 칼날이 소년의 목에 닿는 순간 청운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사내는 피를 보겠다며 위협하던 칼을 마술처럼 숨기고 돌아서 도마 위의 오이를 재빨리 썰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서 벗어난 소년이 창 쪽으로 다가왔다. 키는 어린애 같아도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혹시 김순식 형을 아세요?”
청운은 부드럽게 물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천사 같은 그 얼굴을 보자 어조가 저절로 바뀌었다.
“혹시, 그 형, 친구세유?”
늙은 소년이 더듬더듬 물었다.
“어, 그래요.”
“보니까, 바로, 알겄네유. 순식이 형이, 자주, 얘길, 했었지유.”
“그랬군요. 혹시 그 형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소년은 머리를 끄떡거렸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접혀진 편지봉투를 꺼냈다.
청운은 손목에다 주소를 옮겨 적고는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피에로 형을, 찾아가려는, 거예유?”
소년이 어눌하게 물었다.
“그래요.”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그럼 그렇게 해요.”
“아, 지금은, 안 되구, 나중에, 꼭, 간다구, 좀 전해주세요…….”
“그럴게요.”
청운은 소년의 손을 잡고 흔든 후 목청을 좀 높였다.
“여보시우, 형씨…… 혹시 소림사 주방장이란 영화 보았수?”
과일을 깎고 있던 사내가 고개만 돌린 채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거기서는 사람을 썰어 죽이지만…… 만일 이 사람을 또 다시 괴롭히면…… 댁을 산 채로 끌고 가서 온몸에 대못을 서른 개쯤 박아 버리겠어. 눈알과 혀와 생식기에도 한 개씩…… 명심하라구.”
절룩절룩 걸음 옮겨 588 골목 쪽으로
붉은 입술로 껌 짝짝 씹으며 눈웃음
사내의 입술이 말없이 푸르르 떨리는 것을 본 청운은 발길을 돌려 절뚝절뚝 광란의 인파 속을 헤쳐 나갔다.
인간의 오감과 정신마저 바꿔 놓을 듯 현란하게 돌아가는 홀의 조명을 겨우 벗어나 아스팔트 위에 섰을 땐 왠지 계단 밑의 아비지옥이 슬쩍 그리워지기도 했다.
청량리역 광장의 탑시계 바늘은 이미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하긴 글렀다. 이 부근에서 적당히 보내고 내일 출발해야지. 그런데 왜 굳이 여길 다시…….’
청운은 혼잣말을 하며 찬바람이 불어대는 광장을 거닐었다.
‘청량리는 삭막한 동네지만 왠지 삶의 희비애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느껴져. 명동이나 종로와는 쪼끔 다른 듯해. 어릴 때부터 서울의 밑바닥을 헤매 다녀서 그럴까? 혹은…….’
청운은 문득 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더니 절룩절룩 걸음을 옮겨 588 골목 쪽으로 다가갔다. 어둑한 어둠 속에 분홍빛 조명이 비쳐 나와 섞여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골목 입구에서 망설이는 건 그곳이 범죄를 유혹하는 듯한 추악한 사창가 소굴이라서가 아니었다. 범죄는 오히려 휘황찬란하고 번듯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더 음험하게 저질러지는 세상이었다.
청운은 그곳에 선 채 겨울바람의 회오리가 아닌 정신 속의 회오리를 체감하고 있었다.
1년 전인지 2년 전인지 정확히 계산하긴 어렵지만 그때도 그는 이곳에 서 있었다. 돌고 도는 시간의 회오리가 그의 뇌수를 어지럽혔다.
1여 년 전의 시간이 마치 어제처럼 돌아와 오늘의 어깨를 슬쩍 두드리고 막힌 내일 앞에서 주춤거리는 성싶었다.
그날은 특수부대에 입대하기 전날이었다. 어떤 여자에게 이끌려 이곳까지 왔었다. 그 창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
‘그 슬픈 여인은 지금도 과연 이곳에 있을까? 한두 해 사이에 난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과연 기억이나 하려나?’
청운은 불그죽죽한 늪 안쪽으로 절뚝절뚝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전신주를 휘이윙 울리고 홍등의 그림자를 설핏 흔들면서 음산한 골목을 휩쓸어 갔다.
유리창 속에 정육처럼 진열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자들을 지나쳐 청운은 좁은 갈래길 앞에서 주춤거렸다.
불쑥 팔을
“아리송하군.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하든 더 아리송해질 것 같아. 어차피 만나도 좀 서글플 듯하니 그냥 아무데로나 가 보자.”
청운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어떤 여자가 불쑥 팔을 붙잡았다.
쥐 잡아먹은 듯한 붉은 입술로 껌을 짝짝 씹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