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61년 억울한 인생 최말자

1964년 채워진 족쇄 풀었다

[일요시사 취재 1팀] 안예리 기자 = 성폭행에 저항하다가 가해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가 61년 만에 검찰로부터 무죄를 구형받았다. 최근 검찰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구형했고, 피해자였던 최씨에게 “마땅히 보호받았어야 했음에도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부산지방법원 형사5부(부장판사 김현순)는 지난 23일 오전 11시, 부산지법 352호 법정에서 최말자씨의 재심 첫 공판과 결심공판을 동시에 진행했다. 보통 재심 사건은 수차례에 걸쳐 공판 준비기일, 본안 심리, 결심공판을 진행하지만 이번 재판은 두 차례 공판 준비기일을 거쳐 당사자 간 쟁점을 좁힌 뒤 곧바로 본안 심리와 구형 절차까지 함께 진행했다.

오랜 기다림
이제야 무죄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무죄 구형과 함께 공개적으로 최씨에게 사과했다. 피고인 최씨에 대한 형사 책임이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수사와 공소 과정에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아간 사법 당국의 책임을 검찰이 직접 인정한 것이다. 구형은 정명원 부산지검 공판부 부장검사가 맡았다.

정 검사는 검찰석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이 사건은 생면부지의 남성으로부터,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갑자기 가해진 성폭력 범죄에 대해 피해자가 즉각적으로 대응한 상황”이라며 “피고인이 행한 방어 행위는 정당방위로서 과하지도, 위법하지도 않다고 판단되며 이에 무죄를 선고해주시기를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검찰 조직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책임을 언급했다.


그는 “검찰은 피해자를 단순히 범죄 피해자로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사회적 편견과 2차 피해로부터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도 “그러나 과거 이 사건에서는 검찰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았어야 할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사죄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 검사는 발언을 마친 뒤 다시 한번 피고인을 향해 몸을 숙이며 직접 사과의 뜻을 전했다. 공판은 피고인 심문 절차를 생략한 채 곧바로 결심 단계로 이어졌다. 피고인 최씨에 대한 심문 없이 형사 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검찰 구형이 곧바로 진행된 것은, 검찰이 사건의 성격을 정당방위로 명확히 판단했기 때문이다.

변호인 측은 이날 결심 의견에서 “이 사건은 1964년이라는 시대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법리상 무죄가 나와야 했던 사건”이라며 “검찰과 법원의 초기 판단 착오로 60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바로잡히는 사법적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법원이 응답할 차례”라며 무죄 선고를 재판부에 촉구했다.

재판 말미에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마지막으로 진술 기회를 부여하자, 최씨는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A4용지 한 장을 펼쳤다. 그 안에는 직접 작성한 최후 진술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국가는 1964년, 생사를 오가는 악마 같은 그날의 사건을 어떤 대가로도 책임질 수 없다. 피해자 가족의 피를 토하는 심정을 끝까지 잊지 말고, 꼭 기억해주시길 바란다”고 운을 뗀 최씨는 “지난 61년간 죄인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의 소망은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성폭행범 혀 깨물어 ‘유죄’
가해자와 결혼까지 종용당해


이어 “후손들이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인권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법이 만들어지기를, 두 손 모아 빌겠다”고 마무리했다. 최후 진술을 마친 최씨는 고개를 숙여 재판부를 향해 깊이 인사했다.

최씨 사건은 1964년 5월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남 김해군 대동면 예안리의 한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날 오후, 당시 만 19세였던 최씨는 친구 몇 명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오후 4시께, 인근 마을에 사는 노모씨가 최씨의 집 앞에 불쑥 나타났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던 노씨는 ‘할 말이 있으니 꼭 만나자’며 집 앞에서 기다렸다.

당황한 최씨는 “할 말이 없으니 돌아가라”며 거절했지만, 노씨는 지속해서 보자고 고집을 부렸다. 집요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친구들에게 불필요한 위협이 가지 않도록 상황을 정리하려던 최씨는 그를 큰길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마을 안쪽의 좁은 골목이 아닌,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이면 곧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씨의 생각과는 달리, 두 사람이 큰길을 향해 걷는 도중 노씨는 갑자기 황당한 말을 꺼냈다. 그는 “키스만이라도 하자”며 애원했고,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최씨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길가에서 벌어진 실랑이는 20여분 가까이 이어졌다. 노씨는 급기야 최씨를 억지로 붙잡고 바닥에 넘어뜨려 강제로 입을 맞추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세 차례나 최씨를 땅에 쓰러뜨렸다. 위기감을 느낀 최씨는 노씨가 억지로 자신의 입에 혀를 넣은 순간, 강하게 이를 깨물었다. 혀 끝 약 1.5㎝가량이 절단되며 노씨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틈을 타 최씨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투성이가 된 노씨가 최씨의 집까지 뒤따라왔다. 그는 문 앞에서 “내 혀를 찾아달라”며 울부짖었고, 최씨는 무섭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남동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스스로를
지켰는데…

두 남매는 바닥을 뒤져 잘려나간 혀 조각을 찾아냈고, 노씨는 그것을 들고 2㎞가량 떨어진 병원으로 달려가 봉합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노씨는 당분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사건 발생 직후 마을 사람들은 이 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피해자인 최씨는 성폭행의 위협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지만,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혓바닥을 잘랐다”는 부분에 집중하며 최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후 노씨의 행동이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노씨는 최씨의 집을 찾아와 “이런 일도 인연이니 결혼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을 폭행하려 했던 가해자로부터 ‘혼인’을 제안받은 최씨는 이를 거부했고, 그 순간부터 노씨는 돌연 최씨를 협박하며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불구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한다” “치료비와 위자료를 내놔라”라며 위협했다. 심지어 노씨는 흉기를 들고 최씨의 집에 침입해 협박까지 벌이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최씨는 결국 경찰에 노씨를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다. 노씨는 되려 최씨를 중상해죄로 맞고소했고, 당시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의 정황과 최씨의 진술, 혀를 깨물게 된 경위 등을 종합해 최씨의 행위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최씨는 혀 절단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노씨만 강간미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하지만 검찰에 사건이 넘어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검찰은 오히려 최씨에게 중상해 혐의를 적용해 구속 수사에 착수했다. 최씨는 아버지와 함께 검찰의 출석 요청에 응해 조사를 받으러 검찰청을 찾았다. 하지만 도착한 당일, 검사는 사전 설명도 없이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고, 철문이 설치된 좁은 공간에 가둔 채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조사 절차가 끝나자, 최씨는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포승줄에 묶인 채 곧바로 구치소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구속영장 제시나 구속 사유에 대한 고지, 변호인 선임권이나 진술 거부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 안내는 전혀 없었다. 예고 없는 조치에 아버지는 딸과 생이별한 채 홀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최씨는 그렇게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약 6개월 동안 구금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피해자인 최씨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됐다.

당시 검찰 수사관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며 최씨를 몰아세웠고, 담당 검사는 “둘이 결혼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라며 사실상 결혼을 종용했다. 심지어 법정에서도 판사는 “결혼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고, 최씨의 국선 변호인조차 “둘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어려운 처지이니 내가 직접 중매를 서겠다”는 변론을 펼쳤다.

최종 판결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법원은 결국 최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노씨가 최씨를 강제로 끌고 간 정황은 없다”며 “사춘기 소녀가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따라간 것일 수 있다”고 적시했다.


강제로 입을 맞춘 행위에 대해서도 “꼼짝 못하게 제압한 것이 아니므로, 이에 저항해 혀를 깨문 것은 방어의 정도를 넘은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당방위
한계점

반면 노씨는 성폭력 시도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고, 대신 특수주거침입과 협박 혐의만 적용돼 최씨보다 형량이 적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강간미수 혐의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형 집행이 끝난 뒤에도 최씨는 온전히 일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최씨를 손가락질했다. 이후 최씨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와이셔츠 공장에 다니고,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묵묵히 일상을 이어갔다.

이후 최씨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63세의 나이에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 ‘여성의 삶과 역사’를 주제로 졸업 논문을 썼고, 여기에 자신이 겪은 사건을 사실 그대로 담았다.

이 논문을 본 주변 동료의 권유로 여성단체에 도움을 청하게 됐고, 최씨는 다시 법정에 서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억울하게 가해자가 된 삶을,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2020년 5월 중상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여성단체와 함께 2년 넘게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증언, 사건 기록, 당시 언론 보도, 형사사건부 및 인명부 등 증거를 모았다. 하지만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검사의 불법 구금과 자백 강요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당시 검사의 불법 구금 주장을 입증할 명확한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다.

최씨와 여성단체는 곧바로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그리고 3년이 넘는 법리 심리 끝에, 대법원은 기존 결정을 뒤집었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024년 6월 “1964년 당시 최씨가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두 달 가까이 구금 상태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재판부는 “재심은 확정된 유죄 판결의 중대한 오류를 바로잡아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비상구제 절차”라며 “최씨의 진술은 일관되며 당시 신문 기사, 재소자 인명부, 형사사건부, 집행원부 등 객관적 자료와 부합한다. 이를 탄핵할 만한 증거나 사정도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2022년 부산고법에서 열린 심문기일에 검찰은 “대법원의 취지를 존중해 재심 개시가 타당하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전달했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최씨 사건에 대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본안 심리에 착수했다.

최씨는 사건 발생 60년 만에 다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됐고, 검찰은 기존 공소 내용을 유지하면서도 사건의 경위를 전면 재검토했다. 이후 마침내 지난 23일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밝히며 무죄를 구형했다.

“과거 역할을 다하지 못해”
61년 만에 고개 숙인 검찰

이 사건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신의 주목도 받았다. 미국 <CNN>은 지난 4월 ‘60년 전 성폭행에 저항해 남성의 혀를 깨문 여성, 이제 그녀는 유죄 판결을 뒤집으려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최씨의 재심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CNN>은 “1960년대 한국 사회는 남성의 폭력이 관습처럼 용인되던 시기였고, 최씨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가해자로 몰렸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최씨는 단순히 길을 안내해달라는 남성을 따라나섰다가 갑작스럽게 성폭력 위협에 직면했고, 몸싸움 끝에 상대의 혀를 깨무는 방식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그는 강간미수 혐의로 상대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오히려 최씨에게 중상해 혐의를 적용해 처벌했다는 점도 상세히 다뤘다.

매체는 또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최씨가 수갑을 찬 채 조사를 받고, ‘순결 검증’이라는 이름의 신체 검사를 강요당했으며, 그 결과가 공개되기까지 했다고 전하며 당시 사법기관의 태도를 “지금의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2차 가해”라고 지적했다.

특히 재판부와 검찰이 최씨에게 “가해자와 결혼하면 일이 간단히 끝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관계자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판결은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이 사건을 평가했다. <CNN>은 이번 재심이 “정당방위의 기준을 다시 정립하고, 향후 성폭력 피해자의 방어권 인정 여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씨 사건은 당시 사법부가 정당방위의 범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법학도들이 판례를 통해 형법의 적용 범위와 한계를 공부할 때, 정당방위로 보기 어려운 사례로 자주 인용되던 사건이다. 실제로 최씨 사건은 이후 형법 교과서에 ‘정당방위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판례’로 소개됐다.

대법원이 1995년 법원 100년사를 정리해 발간한 <법원사>에도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공식 소개됐다.

한편, 공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온 최씨는 “이겼습니다”라고 외쳤다. 이어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니 대한민국 정의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모두 국민 여러분 덕분”이라고 말했다.

관습의 시대
뒤늦은 사과

재판을 지켜본 여성단체 관계자들과 방청객 일부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법정 내 전광판에는 ‘최말자는 무죄!’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재판부는 이날 재심 공판을 마무리하며, 오는 9월10일 오후 2시를 최종 선고기일로 지정했다. 검찰이 직접 무죄를 구형한 만큼, 사실상 무죄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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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100일 결정적 장면들

이재명의 100일 결정적 장면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체감상 1년은 된 것 같다.” 어느 덧 이재명정부가 출범 100일째를 맞았다. 이재명 대통령에겐 숨 가쁜 3개월이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 탄핵 정국, 조기 대선 등 대형 정치 이슈는 지나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국정 운영의 청사진을 실현해야 하는 시기다. 지지율은 이미 요동치고 있다. 어떤 이슈가 이정부를 뒤흔들었던 걸까? 지난 6월3일 21대 대통령선거가 열렸다.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6개월 만에 대선이 치러졌다.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이라는 말이 대선 전부터 파다했고 실제로 이변은 없었다. 재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역대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다만, 과반 득표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무정부 상태 산적한 이슈 이번 대선은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여서 인수위원회 기간 없이 바로 임기가 시작됐다. 이 대통령 앞에는 비상계엄 사태 수습, 민생 회복, 국민 통합 등 국내 문제는 물론 미국발 통상 전쟁 등 국외 문제까지 이슈가 산적한 상태였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무정부’나 다름없는 상태로 6개월 동안 이어진 국정 공백을 메워야 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된 후 소감 연설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민주공화정 공동체 안에서 국민이 주권자로 존중받고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 반드시 그 사명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란 극복 ▲민생 회복 ▲국민 안전 ▲한반도 평화 ▲국민 통합 등을 언급했다. 실제 이 대통령은 국회의 과반 의석을 등에 업고 ‘윤석열정부 지우기’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재명 정부 1호 법안으로 ‘내란 특검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채 해병 특검법’ 등을 통과시켰다. 김건희 특검법, 채 해병 특검법 등은 윤정부에서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번번이 폐기됐던 법안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엿새 만인 6월10일 국무회의에서 3대 특검법을 의결했다. 그는 국무회의 이후 SNS를 통해 “이재명 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은 내란 심판과 헌정 질서 회복을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특검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구속 기소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침체된 내수를 회복하기 위한 소비쿠폰도 지급했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이는 곧 경기 부진으로 이어졌다. 정치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연말 연초 대목 장사를 망친 자영업자는 폐업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몰렸다. 민생 회복 소비쿠폰 지급은 이 대통령이 대선후보 때부터 내세운 공약이다. 지난 7월21일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1차 소비쿠폰이 지급됐다. 기본 15만원에 인구 감소 지역 등에 일정 금액을 더했다. 2차 소비쿠폰은 상위 10%를 제외한 국민 90%가 오는 22일부터 신청할 수 있다. 13조원의 재정이 투입됐다. 윤정부 때부터 이어진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은 이재명정부 들어서도 쉽게 출구 전략을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무엇보다 의대생 수업 복귀에 대한 이정부의 행보에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불만이 제기됐다. 의료 정상화를 이유로 조건 없이 의대생 복귀를 추진하는 모습에 공정과 원칙이 깨졌다며 실망감을 표출한 것이다. 두 번의 도전 끝에 당선 내란 종식, 민생 첫 손에 의정 갈등은 윤정부 시기인 지난해 2월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는 보건복지부의 발표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전공의는 집단 사직하며 병원을 떠났고 의대생은 집단 휴학을 강행했다. 응급실 뺑뺑이 사건 등 의료 공백이 가시화되고 의료 붕괴까지 우려되다가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핵심 이슈에서 멀어졌다. 새 정부의 현안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정은경 전 질병관리청장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의정 갈등 해소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정 장관 지명 이후 의료계에서 일제히 환영 입장을 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대생 복귀와 관련해 특혜 논란이 나왔고 국민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의료계와 국민 여론의 괴리가 큰 상황이라 해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산재와의 전쟁’은 임기 초 이정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모양새다. 이 대통령은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SPC 공장을 현장 방문하는가 하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반복 공시로 주가 폭락’ 등 수위 높은 발언으로 건설업계를 겨냥했다. 이 대통령이 산업재해 근절을 외치자 건설업계가 납작 엎드렸다. 산재 사고가 발생하면 사용주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내용의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도 일터에서 근로자가 죽는 사례가 거듭 일어나자 대통령이 직접 칼을 빼든 것이다. 연이어 산재 사고가 발생한 포스코이앤씨는 대표이사가 바뀌었고 DL건설은 임직원 전원이 사의를 표명했다. 일각에서는 이정부가 지나치게 기업을 ‘잡도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코스피 5000’을 외치며 주가 부양을 공언한 것과 실제 행보는 정반대라는 의견이다. 지금까지의 주가 상승은 이정부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됐다면 앞으로의 상승분은 실물 경제에서 끌어 올려야 하는데 이를 이끌 기업을 너무 옥죄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경제 정책의 방향도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된다. 지난달 1일 코스피 지수가 126.03포인트(3.88%)나 하락했다. 주가 3200선이 깨졌고 하락률은 미국발 상호 관세 부과로 충격을 받았던 지난 4월7일(-5.57%) 이후 4개월 만에 가장 컸다. 이른바 ‘검은 금요일’의 배경은 전날 이재명 정부가 발표한 세제 개편안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침체된 경기 소비쿠폰으로 이정부는 주식 양도소득세 과세 대상인 대주주 기준을 50억원에서 10억원으로 낮추고 최고 35% 배당소득 분리과세 도입 등을 담은 세제 개편안을 공개했다.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조건부로 인하된 증권거래세율도 현재의 0.15%에서 2023년 수준인 0.2%로 환원됐다. 또 법인세 세율을 모든 과세표준 구간에 걸쳐 1%포인트씩 일괄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검은 금요일’의 후폭풍은 상당했다. 무엇보다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는 게 문제였다. 주가가 폭락한 지난달 1일 이후 열흘 사이에 거래 대금이 20%가량 줄었다. 이른바 ‘국장’에서 빠져나간 개인 투자자들이 ‘미장(미국 주식시장)’으로 몰려가면서 나스닥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관세 협상으로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증시 부양책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는 방증이었다. 일명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제2·3조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점도 우려를 더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에게 원청과의 교섭권을 부여하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다.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예상이 끊이지 않았다. 법안이 통과되기 전부터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경영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는 물론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등이 노란봉투법에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이 규제가 덜한 외국으로 나갈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경제단체 등은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시행을 유예해 달라고까지 했지만 그대로 진행됐다. 대통령실은 법안 통과 이후 상황을 주시하는 모습이다. 이 대통령은 노란봉투법 통과 이후 “노란봉투법의 진정한 목적은 노사의 상호 존중과 협력 촉진”이라며 “노동계도 상생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임 있는 경제 주체로서 국민 경제 발전에 힘을 모아주시기를 노동계에 각별히 당부드린다”고 강조했다. 광복절을 앞두고는 사면 문제가 불거졌다. 취임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전임 정부에서 임기 초 정치인 사면을 한 적이 없던 터라 이정부 역시 같은 길을 갈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던 조국혁신당 조국 전 대표가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지 8개월 밖에 안된 점도 ‘사면 불가론’에 힘을 더했다. 주가 부양 공약 반대되는 정책 지난해 12월12일 대법원은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 전 대표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600만원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조 전 대표는 나흘 뒤인 12월1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만기 출소일은 내년 12월15일이었다. 조 전 대표가 이끌던 조국혁신당은 당시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고 이 대통령을 지지했다. 조 전 대표의 사면 관련 언급이 나올 때마다 ‘대선 청구서’라는 말이 따라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종교계, 시민단체, 정치권 일부에서 조 전 대표를 사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 전 대표가 검찰의 횡포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도 일부 진영에서 제기됐다. 특히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통령실 등이 조 전 대표의 사면을 직접 요구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조 전 대표는 문재인정부 시절 민정수석, 법무부 장관 등 요직을 맡은 바 있다. 문 전 대통령은 조 전 대표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언급하는 등 각별히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빗발치는 사면 요구에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정치권 등에서 조 전 대표를 사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달리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 특히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도 조 전 대표의 사면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입시 비리 혐의 등이 민주당 지지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공정과 상식의 가치에 반한다는 것이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등 민심 이반이 예상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 대통령은 장고 끝에 조 전 대표의 사면을 결정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조 전 대표를 비롯해 윤미향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은수미 전 성남시장,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 등 정치인과 고위공직자 27명을 포함해 총 83만6678명에 대한 대규모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분열과 반목의 정치를 끝내고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이뤄지는 광복절 특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광복절 사면은 이 대통령의 지지율을 뒤흔들었다. 사면 논의가 시작됐을 때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지지율은 발표 이후 눈에 띄게 꺾였다. 조 전 대표가 사면 이후 ‘광폭 행보’를 보이며 노출도가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세제 개편안·사면으로 지지율 흔들 한일·한미 정상회담은 긍정적 평가 조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에 대해 ‘(사면이 끼친 영향은) N분의 1 정도’라고 발언한 부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조 전 대표는 수감 한 달여 만에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여권 내에서도 조 전 대표의 행보를 불편해하는 기류가 감지되며 야권에서는 이정부를 공격하는 소재가 된 모양새다. 특히 조 전 대표를 비롯한 조국혁신당에서 우리의 길을 가겠다는 ‘마이웨이’ 행보를 공언하면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계 개편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대통령의 임기 5년간 외교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정상회담도 잇따라 열렸다. 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부터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던 ‘트럼프발 통상 전쟁’의 대응 방향이 윤곽을 드러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당선 직후부터 ‘관세’를 무기로 전 세계에 싸움을 걸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미 FTA’로 쌀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관세가 ‘0’이었기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증액 등을 언급했다.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에 이른바 ‘동맹 비용’을 내라는 요구였다. 실무진이 진행한 관세 협상은 그 시발점이었고 정상회담은 미국발 청구서의 윤곽이 드러난 자리였다.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표면상으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각국 정상을 불러놓고 면전에서 망신주기 하는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식의 트럼프 대통령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 점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일각에서는 정작 중요한 사안은 하나도 논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앞서 조선업 협력, 원전 문제를 비롯해 자동차 등 주력 산업에 붙는 관세까지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실무진이 틀을 만들고 정상회담에서 결정되는 방식의 외교 관행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이나 합의문 등은 나오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도 만났다. 이 대통령은 일본 방문 전 과거 한일 간 위안부 합의와 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국가 간 약속은 존중돼야 한다”며 기존 합의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미국발 관세 관련 논의도 이뤄졌다. 당분간 민생 집중 취임 후 첫 외교 시험대를 넘은 이 대통령은 당분간 민생을 살피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당분간 국민의 어려움을 살피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민생과 경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은 “몇 주간 정상회담에 몰두했기 때문에 국내, 특히 민생·경제성장과 관련된 부분을 앞으로 주력해서 챙기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