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관식이 신드롬’ 배우 박해준

국민 불륜남서 국민 아버지로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외치며 시청자들의 혈압을 치솟게 만들었던 배우 박해준이 이제는 ‘국민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역을 맡아 안방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든 그가, ‘관식이병’이라는 신드롬까지 낳으며 전 세대에 걸친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드라마 속 양관식은 무던하고 묵묵한 가장이다. 그의 삶은 오직 가족을 향한 헌신과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배우 박해준이 연기한 양관식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가장으로,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오애순을 평생 사랑한 열렬한 사랑꾼이다.

병든 노년 모습
실감나게 표현

10살 양관식은 조기 한 마리를 얻지 못한 채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던 오애순을 위해 물고기를 바치고, 장사를 대신하며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준다. 말년에도 그는 큰딸을 유학 보내기 위해 집을 팔고, 억척스레 밤낮없이 온몸이 다치도록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박해준은 드라마 속 헌신적인 가장 양관식을 연기하며 체중을 18kg 감량하고 병든 노년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실제로도 그는 “이건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며, 이 역할에 대한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드라마 촬영 당시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수분을 절제했고, 극 중 병든 모습과 대사 톤을 조율하기 위해 사전에 연구를 반복했다. 실제로 그는 주요 장면을 앞두고 격투기 선수들이 체중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준비했다.


양관식이라는 캐릭터는 드라마 제작 초기 단계부터 ‘부드럽지만 강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설정됐다. 각본과 연출 단계서도 그의 대사는 절제되고 짧으며, 감정 표현은 시각적 요소로 전달되도록 구성됐다. 특히 말을 아끼는 장면에서는 배우의 숨결과 눈빛에 집중한 클로즈업 촬영이 반복적으로 사용됐으며, 이는 캐릭터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활용됐다.

또, 양관식이 착용한 의상과 소품도 캐릭터 성격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회색 숏패딩, 낡은 셔츠, 일터서 사용하던 작업 장갑 등은 양관식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도구였다.

스타일리스트 팀은 “실제 90년대 중반 지방 근로자의 옷장서 가져온 듯한 설정을 위해 일부 의상을 리폼하거나 의도적으로 낡은 느낌을 주는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박해준은 캐릭터 해석에 있어 실제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참고했다. 그는 “저희 아버지도 과묵한 편이셨고, 가족을 위해 일하시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며 양관식 캐릭터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개인적인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드라마 촬영 도중 부친이 암 투병 중이었음을 밝히며, 양관식이 병을 앓는 장면을 촬영할 당시 본인의 감정이 겹쳐져 더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는 철저히 준비된 연기를 위해 반복적인 대사 연습과 감정 조절을 병행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 캐릭터는 단순한 픽션이 아닌 현실 재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상적인 가장이면서도 갈등과 마찰을 피하지 않는 인물이다. 자녀들과 다투기도 하고, 일상의 피로감도 드러내지만, 어떤 상황서도 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한다.

이 같은 연기는 실제 박해준과 양관식이라는 캐릭터의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박해준의 실제 성격은 가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본인의 아내에게서 “양관식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작품 관계자들 역시 그의 성품이 관식이라는 캐릭터와 부합한다고 입을 모았다.


드라마를 집필한 임상춘 작가는 “양관식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혹은 있었던 아버지들의 복합적인 집합체”라며 “현실서 벗어난 이상형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고 밝혔다. 연출을 맡은 김원석 감독은 “양관식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았고, 박해준이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관식 배역을 캐스팅할 때 “내가 아는 배우 중 가장 착한 사람을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묵묵한 가장’ 연기
전 세대가 눈물바다

넷플릭스 측은 양관식 캐릭터에 대한 전 세계 시청자 반응을 분석한 결과,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권, 중남미 일부 국가서도 ‘아버지’ 키워드와 함께 박해준의 이름이 급상승 검색어로 등장했다고 밝혔다. 특히 중년 이상 나이대 남성 시청자층에서 높은 공감을 얻은 사례로 분석됐으며, 이는 기존 드라마 소비층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관식이병’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양관식 캐릭터는 드라마가 공개된 이후 각종 포털과 SNS서 회자됐고, ‘관식이병’ ‘회색 숏패딩’ 등 관련 키워드가 유행했다. 시청자들은 양관식 캐릭터를 통해 자신들의 아버지를 회상했고, 댓글과 커뮤니티를 통해 “우리 아버지도 저랬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회색 숏패딩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 관식이를 닮고 싶다는 아버지들, 양관식이라는 인물에 자신의 부모를 투영하며 울컥했다는 시청자들까지. 단순한 인기 캐릭터를 넘어, 양관식은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해준은 이 캐릭터를 두고 ‘희생’이라는 단어를 경계했다.

그는 “관식은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산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향을 정했고, 그걸 따라 살아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삶을 희생이라고 부르기엔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했을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박해준 본인의 삶과 연기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박해준은 1976년 부산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자랐다. 학창 시절 내내 과묵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편이었으며, 외향적인 활동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하는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연기를 처음 접한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로, 당시 연극 관련 진로를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연기와의 인연은 뜻밖에 찾아왔다. 이모가 “외모가 받쳐준다”며 연극영화과 진학을 권했고, 그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에 덜컥 합격했다.

입학 이후 그는 서울 생활의 낯섦과 예술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 실기 위주의 수업 방식 등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철저히 준비된 학생들 사이서 비교적 짧은 준비기간으로 입학한 그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수업 결석이 잦아지면서 학사 경고 누적에 따라 자퇴를 권유받았다.

당시 교수에게 “자퇴할래, 아니면 우리가 퇴학시켜 줄까?”라는 말을 들으며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자퇴 절차를 밟고 군 복무를 마쳤다.

기나긴
무명시절

제대 후, 박해준은 연기가 다시 하고 싶어 2000년 한예종에 재입학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본격적인 연극 무대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극장서 조연, 단역을 맡으며 실전 연기를 익혔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무대는 모든 연기의 뿌리’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직접 극단서 무대 세트를 조립하고, 조명과 음향 리허설을 병행하며 작업한 시간은 배우로서의 기초 체력을 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동료 배우들의 평가는 대체로 “조용하지만 몰입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기 시간에도 대사를 반복하거나 캐릭터의 동선을 그려보며 시간을 보내는 스타일로, 즉흥적인 감정보다는 장면마다 감정의 흐름을 미리 계산해두는 방식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감정은 절제된 상태서 더 크게 전달된다”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표정보다는 리듬과 공기의 밀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철학은 소위 ‘보여주는 연기’보다는 ‘살아보는 연기’에 가깝다. 박해준은 캐릭터가 왜 이런 언어를 쓰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침묵하는지를 먼저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보다, 감정을 억제하며 전달하는 장면서 오히려 더 강한 몰입을 이끌어내는 배우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많은 연출자들이 그에 대해 “극적 장면보다 일상의 호흡을 잘 살리는 배우”라고 말한 바 있다.

현장서의 평판은 한결같다. “요구 사항이 적고 신뢰도가 높으며,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크다”는 것. 이는 그가 사전에 준비해오는 과정이 매우 철저하고, 장면마다 자신의 감정과 상대 배우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계산된 연기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대사를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의 표정, 카메라 앵글, 조명의 방향에 따라 감정의 높낮이를 세밀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연극서 방송과 영화로 무대를 옮긴 이후에도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그대로 유지됐다. 장면마다 인물의 감정 곡선을 설계하고, 상황마다 말투나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은 연기자의 연륜이 배어 있는 결과였다. 감정을 선으로 표현하기보다 면으로 표현한다는 평가처럼, 박해준의 연기는 단순한 기교가 아닌 누적의 결과에 가까웠다.

박해준은 개인적인 생활 면에서도 자기 절제가 강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연예계 활동이 늘어나면서도 예능 출연을 자제했고, 공식 석상서도 감정적인 표현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SNS 활동도 드물었고 인터뷰서도 작품 중심의 이야기 외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언급을 아끼지만, 방송을 통해 드러난 모습에서는 자녀와의 관계, 배우자로서의 자세 등이 모두 성실함과 배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연기 철학과
이미지 변신

2000년대 초반, 재학 중 만난 아내 오유진과는 연극을 함께하며 인연을 맺었고, 2011년 결혼 후 지금까지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자녀 양육에도 적극적인 편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이 없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한 인터뷰서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라고 표현한 바 있다.

무명 시절, 그는 수입이 많지 않은 상황서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보다는 연기 연습과 작품 준비에 집중했다. 당시 생계는 아내와 함께 한 달 생활비 100만원 정도로 유지했고, 주거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마련한 전셋집이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의존감’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 적도 있다.

박해준은 이를 ‘채무감’으로 인식했고, 이후에는 부모에게 금전적 보답보다 자신이 배우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드리는 것을 더 중요한 ‘효도’라고 여겼다. 현재는 작품 활동을 통해 안정된 수입과 인지도를 갖게 됐고, 자녀 교육과 부모 봉양 모두 병행 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박해준은 지금도 연기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생활을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스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하나의 인물을 완성도 있게 표현해내는 데 만족감을 느끼는 배우다. 이 같은 태도는 지금까지의 연기 커리어를 통해 일관되게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연기 철학으로 평가된다.

박해준의 연기 커리어는 연극 무대서 시작됐지만,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린 건 영화 <화차>였다. 변영주 감독의 연출 아래 그는 악랄한 사채업자 역을 맡아, 짧은 출연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당시 여주인공이었던 김민희의 뺨을 실제로 때리는 장면은 단 한 번의 테이크로 끝냈을 만큼 몰입감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박해준은 “NG를 내지 않고 한번에 끝내야 된다는 압박감에 세게 쳤다”면서 “김민희가 그 장면을 촬영할 당시 입안에서 피가 났다고 했다”고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스나이퍼 범수역을 맡으며 범죄 집단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날카로운 눈빛과 절제된 대사, 압도적인 분위기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점차 충무로서 연기파 배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철저히 준비된 연기
반복적인 대사 연습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은 박해준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이었다.

박해준이 맡은 천관웅 과장역은 ‘이너서클’에 끼지 못하고 혼자 분투하는 외로운 회사원의 현실을 그려냈다. ‘회식 자리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 ‘상사의 눈치를 보는 사람’ ‘가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 등 그가 연기한 천 과장은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샀다.

이후 드라마 <나의 아저씨>서 스님 겸덕으로 등장해 극 중 오나라가 연기한 정희와의 복잡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비구니가 아닌 남자 스님으로서, 연인과의 인연을 끊고 속세를 떠난 인물. 겸덕은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 캐릭터였으며, 박해준은 이 인물을 통해 ‘단순히 착하거나 악한 사람이 아닌 복잡한 사람’도 연기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다 박해준은 운명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2020년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서 온 국민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 됐다. 김희애가 연기한 지선우의 남편 이태오를 연기한 그는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인물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이후 <부부의 세계>는 엄청난 인기를 끌며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대사를 밈으로도 남겼고, 그는 한동안 ‘국민 불륜남’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박해준은 이 작품을 맡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지나친 악역이라 출연을 고사하려 했지만, <화차>의 변영주 감독이 “김희애와 함께하는 드라마는 무조건 하라”고 권유한 덕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노태건역을 맡아 다시 한번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전두광(황정민)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는 역할로, 역사적 반감을 일으키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박해준은 그 복잡한 심리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이후 <폭싹 속았수다>에서 그는 양관식이라는 캐릭터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양관식은, 박해준의 필모그래피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로 남았다. 배우 스스로도 이 작품에 대해 “내가 한 건 없다. 주변이 나를 좋게 만들어준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시청자들은 누구보다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야당>서 박해준은 마약수사대 형사 오상재로 분해 관객과 다시 만났다. 정의감과 복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연기하며, 또 다른 ‘가장의 얼굴’을 보여줬다.

중년 아이돌
노년 아이돌

<폭싹 속았수다>와 촬영 시기가 겹쳐 고된 일정이었지만, 그는 “연기할 땐 몰입하지만 생활까지 끌고 오진 않는다”며 프로페셔널한 자세를 유지했다. 인터뷰서 그는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할 것 같다”며 웃었지만, 관식이로 불리는 것과 국민 아버지라는 수식어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박해준은 “중년의 아이돌이라는 말도 좋지만, 언젠가 노년의 아이돌이란 말도 듣고 싶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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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