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쌍방울 구원투수’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회장

다시 돌아온 파란만장 풍운아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회장이 쌍방울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상장폐지의 기로에 놓인 쌍방울은 벼랑 끝에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절체절명의 순간, 정운호의 투입이 쌍방울을 다시 일으킬 돌파구가 될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질지 운명이 갈리고 있다. 한때 화장품 업계를 주름잡았던 그가 위기의 쌍방울을 구할 수 있을까?

쌍방울그룹(이하 쌍방울)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쌍방울은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회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현재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한 쌍방울이 구조조정과 혁신을 단행하기 위한 인물로 정운호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취임은 기업회생을 위한 절박한 선택이라는 평가와 함께, 과거 여러 논란으로 인해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위기의
쌍방울

쌍방울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신당 본사 강당서 진행된 취임식서 정운호 대표이사를 신규 선임했다고 밝혔다. 쌍방울의 위기는 단순한 경영 부진을 넘어 상장폐지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하다. 쌍방울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재 기업의 위기는 오랜 기간 누적된 재정적 문제, 부실 경영, 그리고 전 경영진의 횡령·배임 사건이 맞물려 발생했다.

쌍방울의 위기가 본격화된 것은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의 불법행위가 드러나면서부터였다. 김성태 전 회장의 횡령 규모만 수백억원에 달하며, 회사 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한 정황이 다수 포착됐다. 횡령뿐만 아니라 대북 사업 추진 과정서 거액을 북한에 불법 송금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며, 정치권 로비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후 기업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고,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재정난이 심화됐다.


쌍방울은 한때 속옷 브랜드로서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인 적자를 기록했다. 본업인 속옷 사업이 레드오션화되면서 경쟁력이 약화됐다. 화장품, 바이오, 전자 사업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려 했으나, 무리한 확장으로 인해 부채가 증가했다.

해외시장 진출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투자 대비 수익성이 떨어졌다. 이후, 쌍방울의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됐고 2023년부터 채무불이행 위기까지 거론되는 상황이 됐다.

2023년 7월, 한국거래소는 김 전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를 이유로 주식 거래를 정지시켰고 2024년 2월, 한국거래소는 결국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현재 쌍방울은 법원에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제출하며 상장폐지 철회를 시도하고 있지만, 회생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서 쌍방울이 정운호를 대표로 앉힌 것은 그의 경영 능력과 사업적 감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호는 그야말로 ‘맨손 신화’를 이룬 인물로 통한다. 남대문시장서 트럭을 몰며 화장품을 팔던 그가 국내 대표 화장품 브랜드를 일궈낸 과정은 마치 한편의 영화로도 손색없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정운호는 전라남도 함평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졸업 이후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사업 시작도 매우 평범했다. 중졸 학력을 가진 그는 학벌이나 자본 없이 남대문시장서 보따리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사업 감각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장사 수완이 뛰어났고, 화장품 유통업을 하면서 시장의 흐름을 빠르게 읽는 감각을 길렀다. 시장서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오가며 싸게 물건을 떼어와 더 높은 가격에 되파는 방식을 터득했고, 이 과정서 유통구조를 이해하게 됐다.


트럭 장사서 화장품 거물로 우뚝
네이처리퍼블릭 성공 신화 주인공

당시 그는 대기업 화장품을 직접 사러 올 수 없는 지방 도매상들에게 제품을 공급하며 차익을 남겼다. 한창 장사가 잘될 때는 하루에도 몇 백만원씩 벌 정도로 감각이 뛰어났다. 단순히 물건을 유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정운호는 동대문시장서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던 여성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고객들은 백화점 브랜드를 사기엔 부담스럽고, 시장서 판매하는 화장품은 품질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화장품이 있다면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후 그는 직접 화장품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며 제품을 기획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서 ‘세계화장품’이 탄생했다. 정운호는 대기업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던 화장품 시장서 중저가 화장품의 가능성을 보고, 1993년 세계화장품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계화장품은 백화점 브랜드보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괜찮은 화장품을 유통하는 회사였다. 주된 전략은 대형 브랜드 제품을 직거래로 공급받아 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로드숍 등을 중심으로 도매·소매 유통망을 확장했고, 전국 단위로 거래처를 확보하며 성장했다.

중저가 화장품 시장이 활성화되던 시기에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단순한 유통 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제조업으로의 확장이 필수적이었다. 당시 화장품 시장의 흐름을 빠르게 읽었던 그는 단순히 제품을 유통하기보다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세계화장품의 성장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2003년 정운호는 브랜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더페이스샵’이었다. 세계화장품이 단순한 유통업체였다면, 더페이스샵은 하나의 브랜드로 소비자와 직접 만나기 위한 전략적 도전이었다.

더페이스샵을 창립한 후, 정운호는 다른 화장품 브랜드와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했다. 그중 하나가 초고속 가맹점 확장이었다. 당시 미샤, 이니스프리 등 경쟁 브랜드들은 신중하게 가맹점을 늘려가던 반면, 정운호는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개의 매장을 오픈하는 전략을 썼다.

한 일화에 따르면, 한 투자자가 “이렇게 빠르게 가맹점을 늘리면 관리가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했지만, 정운호는 “매장은 많을수록 좋다. 브랜드를 키우려면 먼저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실제로 그의 전략은 단기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공격적인 가맹점 확장과 함께 자연주의 콘셉트를 앞세우며 소비자들에게 빠르게 어필했다.

‘정운호 게이트’
사건으로 발목

더페이스샵은 출시 2년 만에 1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중저가 화장품 업계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이 브랜드를 오랫동안 운영하기보다는 빠르게 성장시켜 높은 가격에 매각하는 전략을 택했다. 2005년, 사모펀드 어피니티에퀴티파트너스(AEP)에 더페이스샵을 매각하며 1000억원대의 자산을 확보했다. 이후 2010년, AEP와 함께 더페이스샵을 LG생활건강에 다시 매각하며 2000억원 이상의 차익을 남겼다.


정운호는 더페이스샵을 성공적으로 매각한 뒤, 두 번째 브랜드를 준비했다. 그의 진짜 승부수는 ‘네이처리퍼블릭’이었다. 2009년 네이처리퍼블릭을 창립하며 다시 한번 중저가 화장품 시장을 공략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더페이스샵과 유사한 자연주의 콘셉트를 유지하면서도, 한류를 활용한 글로벌 마케팅에 더욱 집중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빠르게 성장했다. 6년 만에 연 매출 2800억원을 기록하며 국내 5대 화장품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세계화장품을 시작으로 유통을 경험하며 쌓아온 사업 감각이 더페이스샵과 네이처리퍼블릭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사업이 커지면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해외 진출과 경영권 다툼, 내부 재정 문제 등이 불거지며 그의 경영 스타일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정운호의 경영 방식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확장 전략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는 빠른 시장 점유율 확대를 목표로 무리한 가맹점 확장과 해외 진출을 시도했지만, 장기적인 기업 운영에는 실패했다. 더페이스샵과 네이처리퍼블릭의 사례를 보면 그는 브랜드를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

정운호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최고급 호텔서 파티를 열고 슈퍼카를 타고 다녔으며, 정재계 인사들과 어울렸다. 그가 운영하던 네이처리퍼블릭의 매출은 매년 급성장했으며 한때 그는 K-뷰티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평가받았지만, 도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마카오와 필리핀서 초호화 카지노 VIP룸을 드나들며 거액의 베팅을 했고, 수백억원을 잃기도 했다.


한 카지노 관계자에 따르면, 정운호는 한번에 몇 십억원을 베팅하는 대담한 플레이어였다. 2015년, 그는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구속되며 경영 일선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네이처리퍼블릭은 내부 혼란을 겪으며 성장이 둔화됐고, 정운호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경영난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쓰는
맨손 신화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른바 ‘정운호 게이트’다. 그의 이름은 한국 사회서 한동안 ‘법조 비리’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도박 사건이 아닌 법조계를 뒤흔드는 대형 스캔들로 번지게 된다.

수사 과정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운호는 필리핀과 마카오서 약 700억원 이상을 불법 도박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서 도박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불법 환전을 시도했으며, 결국 외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됐다.

사건의 핵심은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이를 무마하기 위해 벌인 광범위한 법조계 로비로 번졌다. 그는 자신의 혐의를 축소하거나 아예 무혐의 처분을 받기 위해 현직 판사, 검찰 고위 관계자, 변호사 등에게 거액의 돈을 건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관 변호사들에게 사건을 맡겼고, 이들은 현직 판사와 검찰 간부들에게 사건을 유리하게 진행하도록 로비를 시도했다.

이 과정서 수십억원대의 뇌물이 오갔고, 일부 판사와 검찰 관계자들이 실제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 정황이 포착됐다. 그가 로비한 대상에는 전·현직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이 포함돼있었으며 이들의 부패가 드러나면서 법조계 전체를 뒤흔든 ‘정운호 게이트’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운호의 로비에 연루된 전직 부장판사와 고위 법조인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정운호의 변호를 맡으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그 대가로 거액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전직 검사장 또한 사건 무마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구속됐다.

현직 판사 일부도 사건 조작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법원 내부서도 적지 않은 후폭풍이 발생했다. 대형 로펌들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이 스캔들은 한국 법조계의 전관예우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전관 변호사들이 거액을 받고 사건을 담당하면, 법원과 검찰 내부서 이를 눈감아주는 관행이 존재한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정운호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 내부의 전관예우 관행과 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법조계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커졌고, 이후 사법개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법조계의 전관예우 문제와 로비 논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사건을 이후로 돈 많은 사업가가 법을 움직이려 했다며 정운호에게 ‘비리 사업가’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씌워졌다.

해외 원정도박 검찰 수사 과정서
법조계 전방위 구명 로비 스캔들

정운호는 결국 2017년 대법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한때 대한민국 화장품 업계를 주름잡는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법조계 비리를 만든 장본인이자 불법 도박의 당사자로 전락했다. 2019년 12월, 만기 출소했던 그는 한동안 대외 활동을 자제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지난달 27일, 쌍방울 대표로 복귀했다.

다시 사업가로서 재기에 나섰으나, 그의 법적 논란이 여전히 대중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과거 논란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그가 기업을 정상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다. 정운호의 과거 행적을 고려했을 때, 시장과 소비자들이 그를 쉽게 신뢰할 수 있을지 여부는 예단이 쉽지 않다.

정운호는 뛰어난 사업 감각과 성공 경험을 가진 인물임과 동시에 도박, 법조 비리 등의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네이처리퍼블릭서 보여준 성공과 몰락은 경영자로서 가진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드러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그가 맡게 된 쌍방울은 단순한 경영 부진이 아니라 상장폐지 위기에 놓여 있는 기업이다.

그는 취임식서 “쌍방울을 단순한 회생이 아닌 혁신과 개혁을 통해 더 강한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정운호는 취임식 직후 ▲미래 지향 혁신 경영 ▲브랜드 재탄생 및 사업 다각화 ▲재무구조 혁신 ▲인재 중심 조직 문화 혁신 ▲지속 가능 경영·사회적 책임 실천 등 5대 전략을 발표했다.

이후 쌍방울의 핵심 브랜드인 ‘트라이’의 쇼룸을 직접 시찰하며 향후 브랜드 전개 비전을 밝혔다. 그는 “트라이는 쌍방울의 핵심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혁신적인 제품을 통해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글로벌 시장서 입지를 넓히겠다”고 말했다.

정운호는 “쌍방울을 단순한 회생이 아닌 과감한 혁신과 강력한 개혁을 통해 더 강한 기업으로 만들겠다”며 “현재 쌍방울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면밀히 검토해 기존 사업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최신 트렌드에 맞는 신규 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글로벌 시장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트라이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과거 화장품 업계를 주름잡던 그의 사업 감각이 다시 통할 것인지, 아니면 같은 방식의 공격적인 경영이 또 다른 위기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쌍방울이 처한 상황이 단순한 경영 위기가 아니라 법적, 재정적 문제까지 얽혀 있는 만큼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희망 불씨
재기 발판

과거 더페이스샵과 네이처리퍼블릭을 성장시킨 그의 경험이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반면, 일각에서는 과거 그의 논란을 고려했을 때 경영 정상화가 아닌 또 다른 위기의 불씨를 안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가 과거의 논란을 극복하고 쌍방울을 회생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번 기회가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될지, 또 다른 실패의 기록으로 남게 될지는 앞으로 그의 행보에 달려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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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는 단연 서울시다. 서울시에 깃발을 꽂는 쪽이 전체 선거의 승리라 봐도 무관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진보 진영에서는 당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세훈 대항마’를 자처하는 후보군이 속속 등장했지만, 서울 시민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전국 지역위원장 워크숍에서 제9회 지방선거(이하 지선) 승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달 중으로 지선 공천 룰을 확정해 빠르게 선거에 임하겠다는 방침이다. 큰 틀로는 ▲당원 민주주의 실현 ▲완전한 민주적 경선 ▲깨끗하고 유능한 후보 선출 ▲여성·청년·장애인 기회 확대 등 4대 방향이 제시됐다. 출사표 만지작 민주당은 이번 지선의 성격을 ‘완전한 내란 종식’으로 규정했다. 민주당 전국 지역위원장은 워크숍에서 ‘이재명정부 성공과 지선 승리를 위한 더불어민주당 전국지역위원장 결의문’을 통해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어 민생회복·내란청산·개혁완수라는 역사적 사명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내년 지선서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서 ‘무능 부패한 국민의힘 지방권력’을 심판하고 ‘진짜 자치분권 균형성장’의 시대를 만들겠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또한 “이정부 성공을 위해 당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다가오는 지선은 민주당의 책임과 기회의 시험대다. 당의 힘을 모아 이정부의 성공과 지선 승리라는 두 목표를 함께 이뤄낼 것”이라고 밝혔다. 주목도가 높은 서울시장 선거 최종 후보가 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키울 수 있다. 차기 서울시장 임기는 2030년으로 21대 대통령선거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서울시장은 대선주자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졌던 만큼 정치인으로서 큰 꿈을 꾸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다. 민주당은 서울시장 선거 본선행 티켓을 놓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원내 의원들의 공식 출마 선언 이후에도 자칭타칭 물망에 오른 진보 인사들이 시기를 재고 있어 다양한 경선 구도가 그려질 것으로 관측된다. 박주민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먼저 공식 출마 의사를 밝힌 인물이다. 그는 “서울이 ‘맏이’ 역할을 하며 지방 도시들과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일찌감치 선거판을 예열했다. 뒤이어 민주당 서영교 최고위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조희대 대법원장 저격수를 자처하며 존재감을 키운 그가 이번에는 “서민을 위해 일 잘하는 시장이 필요하다”며 오세운 서울시장 대항마로 나섰다. 서 최고위원은 “(오 시장은) 토지거래허가구역을 무리하게 해제하면서 부동산 폭등을 자초했다”며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서 큰 책임이 있는 용산구청장에게 서울시 주최 지역축제 안전관리 대상을 주는 등 시민의 요구, 시대의 요구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현희 최고위원은 “국정감사 이후 결단을 내리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지난달 오마이TV ‘박정호의 핫스팟’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후보가 서울시를 탈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자리에 과연 제가 적합한 후보인지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큰 판 향하는 의원들 오세훈만 꺾으면 끝? 지난 조기 대선 당시 ‘민주당 골목골목선대위 서울위원장’을 맡아 서울시 정책 로드맵을 짜는 데 참여한 만큼 출마 명분은 충분하다는 평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원내 인사인 박홍근 의원과 김영배 의원도 몸풀기에 나섰다. 특히 박 의원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선 지난해 8월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과 사전 논의가 있었던 점을 강조만 만큼 오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홍익표 전 의원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준비 중”이라며 도전을 시사했다. 홍 전 의원은 가장 민감한 서울 부동산 문제를 겨냥하는 등 오 시장의 강남권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를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꼽으며 저격에 나섰다. 박용진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박 전 의원은 “아직 정해진 건 없다”면서도 연일 오 시장을 때리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정치가 ‘영포티(젊어 보이려 애쓰는 40대)’ 정치로 전락하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한다”며 청년세대와의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원외에서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K-브랜드지수’에서 서울시 지자체장 부문 1위 타이틀을 따낸 그는 활발한 SNS 활동으로 두터운 지지층을 보유한 인물이다. “나 서울 시민인데, 구청장님 좀 같이 씁시다” 등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팬덤을 등에 업고 민주당 원내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 이목이 쏠린다. 민주당 후보군은 일동 ‘오세훈 때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오 시장의 야심작인 한강버스가 연일 구설수에 오른 데 이어 최근 서울시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높이 145m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한 것을 두고 맹공에 나선 것이다. 지난 11일 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종묘 재개발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당내 서울시장 후보군인 박주민 의원과 서영교 최고위원을 비롯한 전현희·김영배·박홍근 의원 등이 대거 참석했다. 특히 박홍근 의원은 “차기 시장, 그리고 대권 놀음을 위해 종묘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서울 종묘가 서울시장 선거의 새로운 전장이 된 셈이다. 이리저리 혼돈의 표심 민주당에서는 윤석열정부 조기 퇴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 승리의 후광효과가 지선까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지선 기조를 내란 청산으로 내세운 것 역시 ‘내란 VS 헌법 수호’ 프레임이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다시 꺼내든 내란 종식 키워드가 내년 지선에서도 먹힐지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지선 압승이라는 낙관론에 젖어 서울시 민심을 제대로 훑지 못한다면 ‘이정부 심판론’으로 되치기당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지점이다. 민주당 출신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서울시 선거는 ‘오세훈만 꺾으면 당선’ 같은 일차 방정식이 아니다. 오 시장이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등 각종 리스크에 발목 잡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민이 내란 종식을 외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겠냐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다시 출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 특성만큼 변수도 많은 서울시 자체가 첫 번째 허들이다. 서울은 마포·용산·영등포·광진·동작·성동·강동·중구 등 13개 선거구를 일컫는 한강벨트를 따라 보수층이 포진해 있어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지만,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이 서울 48석 중 37석을 얻어 과반이 넘는 지역에 파란 깃발을 수놓았다. 그럼에도 조기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서울시에서 각각 47.1%, 41.6%를 얻어 두 후보 간의 격차는 5.5%p에 불과했다. 여기에 범보수로 여겨지는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얻은 9.9%를 더하면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앞서게 된다. 비상계엄이라는 특수 상황을 경험했지만 40%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두 번째는 한강벨트를 따라 빼곡히 자리 잡은 부동산이다. 정부의 10·15 부동산 정책을 통해 서울시 민심을 움직이는 건 진영 간의 논리 싸움이 아닌 정책, 그중에서도 집값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서울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과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하는 이재명표 부동산 대책이 발표된 지 약 보름 뒤 민주당 지지율이 1주일 새 10%포인트 하락하며 국민의힘에 오차범위 내에서 역전됐다. 지지층에 휩쓸릴라 한국갤럽이 지난달 28~30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의 서울 지지율은 31%로 전주 대비 10%p 떨어졌다. 반면 국민의힘은 12%p 오른 32%로 집계됐다. 서울을 대상으로 고강도 대책이 발표되자 서울 민심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전체 긍정 평가는 전주 대비 1%포인트 상승해 57%를 기록했지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에서는 8%p 하락한 47%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로 응답률은 12.6%다.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와 한국갤럽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진영 간의 대립구도가 아닌 인물과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의견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진보 진영 후보들은 본선 진출을 위해 당원의 표심을 얻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도부가 권리당원 권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민의힘과 잘 싸우는 ‘전투적인 후보’가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 적합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진보·여권 후보 가운데 정 구청장이 1위를 차지했다. 만일 정 구청장이 출마 의지를 굳히더라도 박주민·서영교 의원 등 쟁쟁한 원내 인사를 제치고 당원의 선택을 받을지 확신할 수 없다. 인지도면은 물론 민주당 지선 기조가 내란 청산으로 자리 잡은 한 12·3 비상계엄을 해제한 인물에게 더 많은 정치적 유산과 서사가 쥐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전 의원은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 동시에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게 집중적으로 질타 받았다. 2023년 8월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체포동의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불체포특권 포기 성명에 이름을 올린 31명의 의원 중 한 명인 만큼 경선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면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꾸준히 이름을 알려온 경우 경선 통과가 수월하지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개딸(개혁의 딸들)이 밀어준 강경파 후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면 정책이나 행정가로서의 자질은 묻히고 이에 거부감을 느낀 중도층의 표가 분산될 것이란 점에서다. 당원 마음 잡으랴, 중도층 안으랴 김민석·강훈식 ‘투톱’ 차출설도 경선과 본선을 놓고 민주당의 딜레마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김민석·강훈식 차출설’이 돌면서 서울시장 선거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인지도가 높고 행정가 면모가 돋보이는 김민석 국무총리와 강훈식 대통령실비서실장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정 투톱이 또다시 정치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앞서 김 총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에 선을 그어왔지만 종묘 재개발 논쟁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을 댕겼다. 지난 10일 김 총리가 서울 종묘 일대를 찾아 “무리하게 한강버스를 밀어붙이다 시민의 부담을 초래한 서울시로서는 더욱 신중하게 국민적 우려를 경청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했는데, 이를 두고 오 시장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려 하는데 이는 선동”이라며 지선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 차례 서울시장에 도전했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이름도 다시 거론된다. 김 총리가 서울시장 대신 당 대표로 나서고, 직을 내려놓은 정 대표가 서울시장 도전 후 대권 코스를 밟는 시나리오다. 3대 개혁을 두고 당정 불협화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는 만큼 교통정리를 통해 당정 서로에게 윈윈(win-win)하는 방법으로 꼽힌다. 우선 민주당 관계자들은 앞선 두 사람의 출마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총리나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 생긴 공백은 국정 운영에 차질이 빚을뿐더러 정부 출범 1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지선 후보로 차출할 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정 대표의 서울시장 도전 여부 역시 “이제 겨우 (취임) 100일이 지났다”며 일축했다. 이처럼 ‘스타 정치인’ 후보군이 물망에 오르자 당 일각에서도 지역 일꾼을 뽑는 지선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하는 모양새다. 경선 당락을 결정할 당원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해 지나친 선명성 경쟁이 이어질 경우 중도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거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많은 변수들 여권 관계자는 “지선 결과를 미리 예단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앞으로 종묘 재개발 같은 이슈가 전방으로 나올 텐데 그때마다 (민주당도) 네거티브로 맞받아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 당원도 내란 종식과 민생회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사람을 최종 후보로 뽑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터줏대감 눈치 보는 국힘? 더불어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역시 서울시장을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로 보고 있다. 서울시 사수를 위해 후보군을 물색하고 있지만, 오세훈 시장의 임기가 남은 만큼 누구 하나 선뜻 도전장을 내밀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에 오 시장의 재도전이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모양새다. 오 시장은 “시민들이 어떤 평가를 해줄지 지켜보며 거취를 분명히 하겠다”며 3선 도전 가능성을 내비쳤다.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종묘 재개발 등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현역 프리미엄에 기댄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 셈이다. 한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거론됐던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이번에는 서울시장 물망에 올랐다.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진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오 시장이 아닌 나 의원을 상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목이 쏠렸지만 정작 나 의원은 서울시장 도전 가능성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