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쌍방울 구원투수’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회장

다시 돌아온 파란만장 풍운아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회장이 쌍방울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상장폐지의 기로에 놓인 쌍방울은 벼랑 끝에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절체절명의 순간, 정운호의 투입이 쌍방울을 다시 일으킬 돌파구가 될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질지 운명이 갈리고 있다. 한때 화장품 업계를 주름잡았던 그가 위기의 쌍방울을 구할 수 있을까?

쌍방울그룹(이하 쌍방울)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쌍방울은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회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현재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한 쌍방울이 구조조정과 혁신을 단행하기 위한 인물로 정운호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취임은 기업회생을 위한 절박한 선택이라는 평가와 함께, 과거 여러 논란으로 인해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위기의
쌍방울

쌍방울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신당 본사 강당서 진행된 취임식서 정운호 대표이사를 신규 선임했다고 밝혔다. 쌍방울의 위기는 단순한 경영 부진을 넘어 상장폐지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하다. 쌍방울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재 기업의 위기는 오랜 기간 누적된 재정적 문제, 부실 경영, 그리고 전 경영진의 횡령·배임 사건이 맞물려 발생했다.

쌍방울의 위기가 본격화된 것은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의 불법행위가 드러나면서부터였다. 김성태 전 회장의 횡령 규모만 수백억원에 달하며, 회사 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한 정황이 다수 포착됐다. 횡령뿐만 아니라 대북 사업 추진 과정서 거액을 북한에 불법 송금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며, 정치권 로비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후 기업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고,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재정난이 심화됐다.


쌍방울은 한때 속옷 브랜드로서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인 적자를 기록했다. 본업인 속옷 사업이 레드오션화되면서 경쟁력이 약화됐다. 화장품, 바이오, 전자 사업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려 했으나, 무리한 확장으로 인해 부채가 증가했다.

해외시장 진출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투자 대비 수익성이 떨어졌다. 이후, 쌍방울의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됐고 2023년부터 채무불이행 위기까지 거론되는 상황이 됐다.

2023년 7월, 한국거래소는 김 전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를 이유로 주식 거래를 정지시켰고 2024년 2월, 한국거래소는 결국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현재 쌍방울은 법원에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제출하며 상장폐지 철회를 시도하고 있지만, 회생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서 쌍방울이 정운호를 대표로 앉힌 것은 그의 경영 능력과 사업적 감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호는 그야말로 ‘맨손 신화’를 이룬 인물로 통한다. 남대문시장서 트럭을 몰며 화장품을 팔던 그가 국내 대표 화장품 브랜드를 일궈낸 과정은 마치 한편의 영화로도 손색없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정운호는 전라남도 함평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졸업 이후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사업 시작도 매우 평범했다. 중졸 학력을 가진 그는 학벌이나 자본 없이 남대문시장서 보따리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사업 감각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장사 수완이 뛰어났고, 화장품 유통업을 하면서 시장의 흐름을 빠르게 읽는 감각을 길렀다. 시장서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오가며 싸게 물건을 떼어와 더 높은 가격에 되파는 방식을 터득했고, 이 과정서 유통구조를 이해하게 됐다.


트럭 장사서 화장품 거물로 우뚝
네이처리퍼블릭 성공 신화 주인공

당시 그는 대기업 화장품을 직접 사러 올 수 없는 지방 도매상들에게 제품을 공급하며 차익을 남겼다. 한창 장사가 잘될 때는 하루에도 몇 백만원씩 벌 정도로 감각이 뛰어났다. 단순히 물건을 유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정운호는 동대문시장서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던 여성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고객들은 백화점 브랜드를 사기엔 부담스럽고, 시장서 판매하는 화장품은 품질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화장품이 있다면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후 그는 직접 화장품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며 제품을 기획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서 ‘세계화장품’이 탄생했다. 정운호는 대기업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던 화장품 시장서 중저가 화장품의 가능성을 보고, 1993년 세계화장품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계화장품은 백화점 브랜드보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괜찮은 화장품을 유통하는 회사였다. 주된 전략은 대형 브랜드 제품을 직거래로 공급받아 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로드숍 등을 중심으로 도매·소매 유통망을 확장했고, 전국 단위로 거래처를 확보하며 성장했다.

중저가 화장품 시장이 활성화되던 시기에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단순한 유통 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제조업으로의 확장이 필수적이었다. 당시 화장품 시장의 흐름을 빠르게 읽었던 그는 단순히 제품을 유통하기보다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세계화장품의 성장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2003년 정운호는 브랜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더페이스샵’이었다. 세계화장품이 단순한 유통업체였다면, 더페이스샵은 하나의 브랜드로 소비자와 직접 만나기 위한 전략적 도전이었다.

더페이스샵을 창립한 후, 정운호는 다른 화장품 브랜드와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했다. 그중 하나가 초고속 가맹점 확장이었다. 당시 미샤, 이니스프리 등 경쟁 브랜드들은 신중하게 가맹점을 늘려가던 반면, 정운호는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개의 매장을 오픈하는 전략을 썼다.

한 일화에 따르면, 한 투자자가 “이렇게 빠르게 가맹점을 늘리면 관리가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했지만, 정운호는 “매장은 많을수록 좋다. 브랜드를 키우려면 먼저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실제로 그의 전략은 단기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공격적인 가맹점 확장과 함께 자연주의 콘셉트를 앞세우며 소비자들에게 빠르게 어필했다.

‘정운호 게이트’
사건으로 발목

더페이스샵은 출시 2년 만에 1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중저가 화장품 업계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이 브랜드를 오랫동안 운영하기보다는 빠르게 성장시켜 높은 가격에 매각하는 전략을 택했다. 2005년, 사모펀드 어피니티에퀴티파트너스(AEP)에 더페이스샵을 매각하며 1000억원대의 자산을 확보했다. 이후 2010년, AEP와 함께 더페이스샵을 LG생활건강에 다시 매각하며 2000억원 이상의 차익을 남겼다.


정운호는 더페이스샵을 성공적으로 매각한 뒤, 두 번째 브랜드를 준비했다. 그의 진짜 승부수는 ‘네이처리퍼블릭’이었다. 2009년 네이처리퍼블릭을 창립하며 다시 한번 중저가 화장품 시장을 공략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더페이스샵과 유사한 자연주의 콘셉트를 유지하면서도, 한류를 활용한 글로벌 마케팅에 더욱 집중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빠르게 성장했다. 6년 만에 연 매출 2800억원을 기록하며 국내 5대 화장품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세계화장품을 시작으로 유통을 경험하며 쌓아온 사업 감각이 더페이스샵과 네이처리퍼블릭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사업이 커지면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해외 진출과 경영권 다툼, 내부 재정 문제 등이 불거지며 그의 경영 스타일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정운호의 경영 방식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확장 전략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는 빠른 시장 점유율 확대를 목표로 무리한 가맹점 확장과 해외 진출을 시도했지만, 장기적인 기업 운영에는 실패했다. 더페이스샵과 네이처리퍼블릭의 사례를 보면 그는 브랜드를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

정운호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최고급 호텔서 파티를 열고 슈퍼카를 타고 다녔으며, 정재계 인사들과 어울렸다. 그가 운영하던 네이처리퍼블릭의 매출은 매년 급성장했으며 한때 그는 K-뷰티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평가받았지만, 도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마카오와 필리핀서 초호화 카지노 VIP룸을 드나들며 거액의 베팅을 했고, 수백억원을 잃기도 했다.


한 카지노 관계자에 따르면, 정운호는 한번에 몇 십억원을 베팅하는 대담한 플레이어였다. 2015년, 그는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구속되며 경영 일선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네이처리퍼블릭은 내부 혼란을 겪으며 성장이 둔화됐고, 정운호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경영난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쓰는
맨손 신화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른바 ‘정운호 게이트’다. 그의 이름은 한국 사회서 한동안 ‘법조 비리’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도박 사건이 아닌 법조계를 뒤흔드는 대형 스캔들로 번지게 된다.

수사 과정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운호는 필리핀과 마카오서 약 700억원 이상을 불법 도박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서 도박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불법 환전을 시도했으며, 결국 외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됐다.

사건의 핵심은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이를 무마하기 위해 벌인 광범위한 법조계 로비로 번졌다. 그는 자신의 혐의를 축소하거나 아예 무혐의 처분을 받기 위해 현직 판사, 검찰 고위 관계자, 변호사 등에게 거액의 돈을 건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관 변호사들에게 사건을 맡겼고, 이들은 현직 판사와 검찰 간부들에게 사건을 유리하게 진행하도록 로비를 시도했다.

이 과정서 수십억원대의 뇌물이 오갔고, 일부 판사와 검찰 관계자들이 실제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 정황이 포착됐다. 그가 로비한 대상에는 전·현직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이 포함돼있었으며 이들의 부패가 드러나면서 법조계 전체를 뒤흔든 ‘정운호 게이트’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운호의 로비에 연루된 전직 부장판사와 고위 법조인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정운호의 변호를 맡으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그 대가로 거액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전직 검사장 또한 사건 무마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구속됐다.

현직 판사 일부도 사건 조작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법원 내부서도 적지 않은 후폭풍이 발생했다. 대형 로펌들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이 스캔들은 한국 법조계의 전관예우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전관 변호사들이 거액을 받고 사건을 담당하면, 법원과 검찰 내부서 이를 눈감아주는 관행이 존재한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정운호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 내부의 전관예우 관행과 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법조계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커졌고, 이후 사법개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법조계의 전관예우 문제와 로비 논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사건을 이후로 돈 많은 사업가가 법을 움직이려 했다며 정운호에게 ‘비리 사업가’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씌워졌다.

해외 원정도박 검찰 수사 과정서
법조계 전방위 구명 로비 스캔들

정운호는 결국 2017년 대법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한때 대한민국 화장품 업계를 주름잡는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법조계 비리를 만든 장본인이자 불법 도박의 당사자로 전락했다. 2019년 12월, 만기 출소했던 그는 한동안 대외 활동을 자제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지난달 27일, 쌍방울 대표로 복귀했다.

다시 사업가로서 재기에 나섰으나, 그의 법적 논란이 여전히 대중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과거 논란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그가 기업을 정상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다. 정운호의 과거 행적을 고려했을 때, 시장과 소비자들이 그를 쉽게 신뢰할 수 있을지 여부는 예단이 쉽지 않다.

정운호는 뛰어난 사업 감각과 성공 경험을 가진 인물임과 동시에 도박, 법조 비리 등의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네이처리퍼블릭서 보여준 성공과 몰락은 경영자로서 가진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드러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그가 맡게 된 쌍방울은 단순한 경영 부진이 아니라 상장폐지 위기에 놓여 있는 기업이다.

그는 취임식서 “쌍방울을 단순한 회생이 아닌 혁신과 개혁을 통해 더 강한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정운호는 취임식 직후 ▲미래 지향 혁신 경영 ▲브랜드 재탄생 및 사업 다각화 ▲재무구조 혁신 ▲인재 중심 조직 문화 혁신 ▲지속 가능 경영·사회적 책임 실천 등 5대 전략을 발표했다.

이후 쌍방울의 핵심 브랜드인 ‘트라이’의 쇼룸을 직접 시찰하며 향후 브랜드 전개 비전을 밝혔다. 그는 “트라이는 쌍방울의 핵심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혁신적인 제품을 통해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글로벌 시장서 입지를 넓히겠다”고 말했다.

정운호는 “쌍방울을 단순한 회생이 아닌 과감한 혁신과 강력한 개혁을 통해 더 강한 기업으로 만들겠다”며 “현재 쌍방울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면밀히 검토해 기존 사업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최신 트렌드에 맞는 신규 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글로벌 시장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트라이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과거 화장품 업계를 주름잡던 그의 사업 감각이 다시 통할 것인지, 아니면 같은 방식의 공격적인 경영이 또 다른 위기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쌍방울이 처한 상황이 단순한 경영 위기가 아니라 법적, 재정적 문제까지 얽혀 있는 만큼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희망 불씨
재기 발판

과거 더페이스샵과 네이처리퍼블릭을 성장시킨 그의 경험이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반면, 일각에서는 과거 그의 논란을 고려했을 때 경영 정상화가 아닌 또 다른 위기의 불씨를 안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가 과거의 논란을 극복하고 쌍방울을 회생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번 기회가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될지, 또 다른 실패의 기록으로 남게 될지는 앞으로 그의 행보에 달려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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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강대강 매치 막전막후

‘경주 APEC’ 강대강 매치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APEC 정상회의(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이하 정상회의)가 경북 경주에서 열린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20개 나라 정상이 초청 대상으로, ‘외교 슈퍼 위크’가 시작된 셈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각국의 강경파들이 경주로 모이면서 서로 어떤 합을 보일지 관심이 쏠린다. 2025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미 관세 문제가 급물살을 탔다. 지난 7월 협상 시한 하루를 앞두고 한미 간 무역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지 약 세 달 만이다. 정상회의를 계기로 관세 협상이 매끄럽게 마무리될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노브레이크 미국 관세 쟁점은 한국이 상호 관세를 15%로 낮추는 조건으로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달러(약 500조원)에 대한 지불 방식이다. 한국은 직접 투자 비중을 줄이고 투자 기간을 늘리겠다는 방침이지만,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최대한 현금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현금 선불 투자를 고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는지가 협상 타결의 관건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상회의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까지도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큰 틀에서는 합의가 이뤄졌지만, 세밀한 부분이나 주요 쟁점이 해결되지 않는 등 의견이 모이지 않은 탓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2일(현지시각)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회담한 뒤 “진전이 있었다”면서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날 김 실장은 ‘마지막 쟁점이 조율됐느냐’는 특파원들 질문에 “쟁점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두 개라고 했고, 아주 많지는 않다”며 “오늘 남아있는 쟁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진전이 있었다. 만나면 조금 더 상호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고 답했다. 양국의 대면 협의가 사실상 이날 종료되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두 사람의 결단만 남았다. 미중 간의 관세 협상 결과와 이번에 이뤄질 두 정상의 만남이 한국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중국과 미국은 지난 4월부터 보복 형식으로 서로를 향해 관세 허들을 높여갔다. 그러던 중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를 꺼내면서 질주하는 미국에 제동을 걸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100% 관세를 추가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관세 전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추가 관세가 현실화하면 중국이 미국에 내야 할 관세는 157%에 달하는 만큼 미중 간의 팽팽한 대립이 이어졌다. 좁히지 못한 ‘디테일’ 막판 협상 난항 이 “우리는 동맹…상식과 합리성 공유” 중국이 밸브를 잠그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희토류와 핵심 광물 공급 협력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기 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일본도 일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희토류 삼각 동맹이 이뤄진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1일 백악관 로즈가든 클럽에서 주재한 오찬 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한국에서 만나 많은 것을 이야기할 것”이라며 대화의 여지를 열어뒀다. 이어 “우리가 협상에서 잘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나는 시 주석과 좋은 합의를 하고 싶고, 시 주석이 중국을 위해 좋은 합의를 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합의는 공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 간 무역 갈등이 장기화되면 한국 경제 성장률을 비롯해 수출입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전망과 관련해 “조정·교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펀드를 둘러싼 이견에 대해서는 “결국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왜냐하면 우리는 동맹이며 서로 상식과 합리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중 갈등이 현재 진행형인 상황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한국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11년 만에 이뤄진 시 주석의 방한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직 한중 관계에 큰 잡음은 없지만 훈풍이 불지 않는 만큼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한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명정부의 첫 주중대사인 노재헌 신임 대사는 “(시 주석의) 국빈 방문이 계획됐기 때문에 한중 관계가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한다”며 “양국 지도자 간에 우호와 신뢰 관계를 다시 굳건히 하고 그 초석 위에서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친하지?” 서먹해진 중국 이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시험대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전승절)’에 초청받았지만 의전 서열 2위인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신 자리했다. 이 대통령의 전승절 참여 여부를 놓고 국민의힘이 친중 프레임을 굳히자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앞서 백악관은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축사를 하던 중 뜬금없이 “중국의 간섭과 영향력 우려”라며 중국을 향해 견제구를 날렸다. 한국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임을 강조할 경우 미국이 제동을 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이처럼 한중 관계 개선의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인 만큼 한국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한다. 김지수 한반도 미래경제 포럼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단어가 나오던 때랑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안보와 경제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런 점에서 미국이 더 중요해졌다”고 봤다. 이 대통령 역시 안미경중 노선에 대해 “과거처럼 그런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강력한 견제, 나아가 봉쇄 정책을 본격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몇 년 사이 자유 진영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 간 공급망 재편이 본격적으로 벌어졌고 미국의 정책이 노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며 “중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데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관계를 잘 관리하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상황”이라 고 부연했다. ‘여자 아베’ 경주 데뷔 김 대표는 “미국의 최대 경쟁국은 중국”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한국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미중 패권 전쟁에서 유리한 전략을 모두 취하고 있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중국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미국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중국을 적대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인 무비자 입국으로 한국 전역에 퍼진 반중 혐오 시위도 고려 대상이다. 최근 국민의힘 등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반중 정서가 확대되면서 외교 갈등이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노 대사는 중국 주상하이 총영사관에서 주중대사관을 상대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 내 반중·혐중 시위를 묻는 말에 “당연히 우려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고 양국 국민의 우호 정서 함양·증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근거 없고 음모론에 기반한 행위에 대해서는 조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시적 비자 면제 정책에 대한 자국민의 우려에 대해서도 “불법 체류 현황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범죄 같은 부분은 입국자 등을 잘 지켜보면서 필요하면 단속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지난 21일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신임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본격 대외 행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보수 성향이 짙은 탓에 한일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권 초기인 만큼 우호적 태도를 유지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중의원 10선 의원으로 경제안보담당상, 총무상,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일본 정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비세습 여성 정치인으로 강경 보수 성향이라는 평가와 함께 입지를 다져왔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4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권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1999년부터 자민당과 협력해 온 중도 보수 성향인 공명당이 연정에서 이탈해 표가 분산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강경 보수 성향이자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를 새롭게 끌어들이면서 극적으로 총리직에 당선됐다. 서로 싫다는 미·중, 사이에 낀 한국 일본까지 강경파 ‘폭풍 속 한반도’ 이 대통령은 신임 일본 총리가 선출된 것에 대해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경주에서 총리를 직접 뵙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같이 밝히며 “우리는 새로운 한일 관계의 60년을 열어가야 하는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진 국제 정세 속에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 역시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중대한 시기에 총리와 함께 양국 간, 그리고 양 국민 간 미래지향적 상생 협력을 한층 강화해 나가길 기대한다. 아울러 셔틀 외교를 토대로 양국 정상이 자주 만나 소통할 수 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훈훈한 축하 인사와 달리 한일 관계는 다시 시험대에 놓였다. 온건하다고 평가받았던 이시바 시게루 내각 체제만큼 협력 기조가 이어질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1년 총재 선거 당시 고 아베 전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임 보수 전사로 떠올랐다. 이번 총리 선거에서 역시 아베 전 총리의 파벌로 형성된 아베파의 지지가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현지 신문은 자민당의 연정 상대가 공명당에서 유신회로 바뀌면서 다카이치 내각의 보수색이 선명해졌다고 해석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꾸준히 참배해온 만큼 한국 과거사와 독도 영토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놓고 이정부와 충돌할 우려도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다카이치 총리가 이번에 보여준 강경 보수 행보는 우익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한일 외교에 있어서는 이시바 내각과 마찬가지로 온건한 노선을 택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에 우호적인 뜻을 내비쳤으며 가을 예대제 기간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을 것으로도 전해진다. 한일 관계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다카이치 총리의 온건 행보가 일시적일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역대 총리들이 그랬듯 지지율이 떨어지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반한 감정을 부추겨 보수 지지층 결집을 유도할 것이란 점에서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 대통령이 국가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미, 한중, 미중 정상회담이 연쇄적으로 열릴 가능성이 크고 비핵화와 관련해 이 대통령이 남·북·미 간의 대화 물꼬를 튼다면 경주를 무대로 ‘평화 한반도’ 기조를 형성하는 일등 공신 역할을 노릴 수 있다. 눌리거나 손잡거나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관계자는 “이 대통령에게 가장 큰 변수는 아무래도 미국이다. 각 국가 정상마다 성향도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다른 만큼 미국부터 삐끗하면 차후 일정도 줄줄이 꼬인다”면서 “조급하게 나서면 될 일도 안 되는 게 외교 문제다. 한국은 한국만의 강점이 있다. 우리 쪽에서도 몇 가지 카드가 있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정부를 믿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하필 지금? 미사일 쏜 북한 속내 지난 22일 북한이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한미·한중 정상회담 등에서 북한 문제가 다뤄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미국을 향한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한미군과 우리 군의 반응이 엇갈린 점 역시 주목된다. 주한미군은 미국의 한미 동맹에 대한 공약이 굳건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불법적이고 불안정을 초래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북한에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반면 우리 군은 통상 해오던 미사일 발사 규탄 성명을 내지 않았다.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정부가 남북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만큼 이를 의식해 톤 조절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