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신문조서 공개의 양날

범인이 부인하면 땡?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딱 맞다. 2022년 개정된 형사소송법 시행으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부인되는 상황서 피의자신문조서의 정보공개청구도 허용됐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는 지금도 공범들이 피의자신문조서를 거부하며 재판이 지연되고 있는데, 재판 전에 미리 조서를 파악하고 부인하며 상황은 격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수사나 재판에 영향이 없다면 피의자신문조서 등 내부 문건도 검찰이 형사 고소인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로 인해 이미 증거능력을 부인받고 있는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법조계서 나오기도 한다.

증거능력 부인

A씨는 2019년 B사의 허위·과대 광고에 속아 회원비를 내고 불법 주식투자자문 등으로 손실을 봤다며 이 회사의 대표이사와 실질적 운영자 등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은 2022년 9월 횡령·사기 혐의는 불기소 처분하고,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등은 서울남부지검으로 이송했다.

서울남부지검이 일부 혐의만 약식 기소하고 불기소 처분 등을 내리자 A씨는 같은 해 서울고등검찰청(이하 서울고검)에 항고를 제기했다. 아울러 지난해에는 주민등록번호나 직업 등 인적 사항을 뺀 B사 직원 등의 피의자신문조서·수사보고·변호인 제출 자료 등을 달라고 서울고검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하지만 서울고검은 “공개될 경우 직무수행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거나 형사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비공개로 결정했다.


이후 서울고검은 항고를 기각하면서 사건 기록을 서울남부지검으로 반환했고, A씨는 같은 내용의 정보공개 청구를 두 차례 더 했으나 이 역시 비공개 결정을 받자 행정소송에 나섰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A씨가 서울남부지검장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A씨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해당 정보가 공개될 경우 향후 범죄 예방이나 정보수집 등 수사기관의 직무수행을 곤란하게 하거나 진행 중인 재판의 심리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같이 판단했다.

A씨는 재판서 “공개를 요구하는 자료는 개인의 내밀한 비밀이 포함된 자료가 아니며, 불법행위 피해자로서 권리 구제를 위해 취득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이 사건 정보 중 일부는 진행 중인 형사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고, 수사기관이 피의사실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어떤 사항에 중점을 두고 수사하는지가 드러나 있다”며 “혐의자들이 이를 이용해 법정 제재를 회피하는 데 활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수사·재판 영향 없으면 공개해야”
“피고인 재판 대비도 수월해져 난감”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로 피의자신문조서 부인 시 증거능력이 없는 지금 고소인뿐만 아니라 피고인도 피의자신문조서를 미리 파악하고 부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우려를 내비쳤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많은 증거 중 피의자신문조서는 특히나 공범 등의 진술을 통해 혐의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증거지만 2022년 시행된 형사소송법 개정과 이번 판결로 증거능력이 완전히 부인된 셈”이라며 “피고인도 공범 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정보공개 청구하고 재판을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만든 판결”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조사에 입회한 변호인가 복기한 조서가 공범 압수수색서 발견된 사례도 있다.

피의자신문조서는 2022년 시행된 형사소송법 제312조 개정으로 거의 증거능력을 잃었다. 검찰과 경찰을 포함한 수사기관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그 내용을 인정했을 때에 한해 증거능력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골자다.

개정 전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사가 피고인이 된 피의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돼있음이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서 피고인의 진술에 의해 인정되고, 그 조서에 기재된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서 행해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해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했었다. 

진술한 내용이 맞으며 영상 녹화물 등 객관적 방법으로 증명되면 증거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피고인이 조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증거능력을 부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피의자진술조서가 증거능력을 잃으면서 공범이 많은 사건의 재판서 다시 증인신문을 진행하는 상황도 많아졌으며 재판이 길어지다 보니 구속된 피고인이 구속기간 만료로 풀려나는 사례도 다수 생겼다. 

이화영·신성식 등 다수 사례
“재판 지연·실체 규명 힘들어”

수사기관서 자백한 뒤 법정서 이를 뒤집은 대표적인 사례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이 꼽힌다. 이 전 부지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이던 2019년 ‘도지사 방북 및 북한 스마트팜 사업 비용’ 총 800만달러를 쌍방울이 북한 측에 대신 지급하게 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부지사는 지난해 6월 검찰 조사에서 “북한서 방북 의전 비용을 요구하는데 비즈니스로 김성태 쌍방울 회장이 처리할 거라고(도지사에게) 보고했고, 이재명 도지사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후 재판서 도지사 보고 등 관련 진술은 검찰의 회유와 압박 때문이었다며 사실이 아니라고 입장을 번복했다.

또 다른 사례는 ‘KBS 검언유착 오보 사건’과 관련해 발생했다. KBS에 거짓 정보를 제공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를 받는 신성식 검사장 측이 지난 5월 열린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서 피의자신문조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신 검사장이 부인한 내용은 ‘한동훈 장관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말한 부분이다. 검찰에 따르면 신 검사장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근무하던 2020년 6~7월 한 장관과 이동재 전 채널A 기자의 대화 녹취록이라며 두 사람이 유착했다는 내용을 KBS 기자들에게 알렸다. KBS는 해당 내용을 보도했다가 곧 오보를 인정하고 정정했다.


‘한 장관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내용은 신 검사장이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것으로 검찰이 수사를 통해 확보한 유리한 증거지만 신 검사장이 부인하면서 이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최윤희 서울중앙지검 중요범죄조사부 검사도 지난 29일,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한 고찰’ 형사법 포럼 발제자로 나서 “2023년 공판부에 근무하면서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 이후 발생한 여러 부작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재판 장기화는 물론이고 범죄 실체 규명에도 적잖은 지장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의자가 검·경서 한 진술은 증거가치가 매우 높다. 직접 사건을 경험한 이가 생생한 기억을 바탕으로 수사나 재판 영향을 가장 덜 받은 상태서 한 진술이기 때문”이라며 피의자신문조서가 증거로 채택될 필요성을 언급했다.

공판 검증?

반면 수사기관의 조서를 증거로 사용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반론도 나온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웅재 교수(판사 출신)는 “사람의 진술은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수반한다”며 “공판 절차에서의 검증을 거친 경우에 한해 진술은 증거가치를 가질 수 있다”며 “법 개정 이전에는 조서 확인 절차가 증명되면 공판 과정서 진술 검증은 생략되는 ‘조서 재판’이 횡행했던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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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