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도 아는 ‘공탁금’ 허점

돈 내면 감형된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범죄 가해자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서 형사공탁은 ‘천사공탁’으로 불린다.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주는 것보다, 형사공탁을 해서 감형받겠다고 문의하는 피의자들도 있다. 피해자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한 제도가 사실상 피고인의 감형을 위한 ‘꼼수’로 악용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된 지 1년2개월여가 지났지만 개선을 향한 정부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고 범죄 피해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피해자가 합의를 완강히 거부해도 형사공탁을 하면 감형을 끌어낼 수 있다.” 가해자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된 후 1년간 2만5789건(1심부터 대법원 포함)의 공탁 신청이 있었다. 이 중 공탁금이 지급된 건수는 1만445건으로 신청 건수의 40%에 불과하다.

피해 회복?
뻔한 목적

형사공탁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피해복구나 변제 등을 목적으로 법원의 공탁소에 금전을 맡기는 제도다. 기존에는 피해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아야 공탁금을 낼 수 있었지만, 2022년 12월 특례 시행 이후 사건번호나 조서·공소장 등에 기재된 내용 등만으로도 공탁이 가능해졌다.

공탁 과정서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일과, 이로 인한 2차 가해 등을 막기 위한 취지로 입법됐다.

하지만 입법 취지와는 다르게 피고인의 감형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어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피해자가 공탁금 수령을 거부했는데도 공탁금 유치로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점을 감안해’라는 판결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피해자가 공탁된 사실도 모르는 상황서 공탁금을 내고 감형받는 사례도 나왔다.

최근 대법원서 징역 5년이 확정된 강남 스쿨존 음주운전 사고서도 공탁금 감형은 큰 화두였다. 강남 스쿨존 음주운전 사고는 지난 2022년 12월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재 한 초등학교 후문서 방과후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을 40대 A씨가 차로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이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사고 당시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28%로 면허취소(0.08% 이상) 수준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A씨가 B군을 충격한 순간 차량이 흔들렸고 사이드미러 등을 통해 A씨가 사고를 인식할 수 있었지만, 그대로 차량을 몰아 도주해 사고를 당한 B군이 방치됐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1심 결심서 유족 측이 엄벌을 탄원하고 있는 점과 예방적 효과를 고려해 A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다만 재판부는 A씨의 도주치사 혐의는 무죄로 판단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20여m 거리에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금세 발각될 가능성이 있는 주거지 주차장으로 A씨가 들어가기보다는 사고 현장서 직진해 멀리 달아나는 것이 도주 의사에 부합하는 행동”이라며 “피고인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소극적으로 구호 조치한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말했다.

이어 “9세에 불과한 피해자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꿈을 펼쳐 보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며 “가족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충격과 고통을 입었다”고 밝혔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보는 가족의 절망감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며 무엇보다 유족이 피고 엄벌을 원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이전까지 피고가 아무런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고, 가족과 지인이 선처를 구한다”며 “종합보험에 가입됐고 3억5000만원을 공탁한 점, 암 투병 중인 점 등을 피고에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고 부연했다.

1년간 2만5789건 신청
피해자 몰래 해도 인정

양형 이유에 공탁금이 들어가자 피해자 유족 측은 “공탁금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형량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A씨가 사고 현장에 돌아온 직후 사고 사실을 알렸고, 경찰에 체포 이전까지 피해자 주변의 자리를 지킨 점 등을 근거로 도주 고의성이 입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A씨의 범죄 공소사실과 관련해 상상적 경합 관계에 있다고 판단해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5년으로 형을 낮췄다. 상상적 경합은 1개의 범죄 행위가 여러개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를 뜻한다. 형법 40조는 이 같은 경우 가장 무거운 범죄에 대해 정한 형으로 피고인을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1심은 특가법상 어린이보호구역 치사 혐의와 위험운전치사 혐의를 별개의 법률행위로 판단했다. 다만 항소심은 법리상 2개의 치사 혐의가 1개의 법률행위로 평가된다고 판단해 형량이 낮아졌다.

검사는 무죄 부분에 대한 채증법칙 위반, 법리오해 및 유죄 부분에 대한 죄수 판단을 주장하며 상고했다. 피고인 A씨는 위험운전치사에 관한 법리 오해, 양형부당을 주장하며 상고했다.

다만 대법원은 양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며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 확정 이후 유족 측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대법원에 나왔다. 그러나 저의 희망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며 “재판 과정을 통해 저의 피해가 구제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겪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다른 어린이보호구역 음주 사망사건에 비해 현저히 적은 형량이 나온 것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가해자가 전관 부장판사 출신의 대형 로펌 태평양을 쓴 점, 기습공탁금을 사용한 점 둘 다 모두 금전적인 힘이 작용해 이 같은 판결이 나온 것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또 “1심, 2심 모두 가해자는 기습공탁을 이용했고 저는 매번 피눈물을 흘렸다”며 “피해자인 제가 공탁금이 필요하지 않으며 용서할 의사가 없다고 수차례 밝혔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감형 요소로 고려하는 것은 저 대신 용서라도 하겠다는 것이냐”고 호소했다.

프로축구 제주유나이티드 소속 유연수의 축구선수로서의 생명을 앗아간 음주운전의 피고인도 1심 선고를 앞두고 700만원을 형사공탁했다. 지난 1월19일 제주지방법원에 따르면 이날 유연수 선수를 다치게 한 음주운전 피고인 C씨가 700만원을 형사공탁했다. 지난달 25일 선고 공판(제주지법 형사1단독)을 6일 앞둔 시점이었다.


수령
안 해도…

유연수 선수는 지난달 17일 방영된 tvN <유 퀴즈 온더 블록>서 “(가해자는)지금까지도 사과 한 마디 없다. 재판에서는 저희한테 사과하려고 했다고 하던데 정작 저희는 한 번도 연락받은 적이 없다”며 “그걸 듣고 더 화가 나더라. 와서 무릎 꿇고 사과했으면 그래도 받아 줄 의향이 있었는데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지만 사과하기보다 기습으로 공탁을 한 셈이다.

이에 유연수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오션 소속 오군성 변호사는 “1심 선고를 며칠 앞두고 피고인 측이 사과문을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여기에 형사공탁도 한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유연수 선수와 논의한 결과 1심 선고를 며칠 앞둔 상황 속에 사과문 전달·형사공탁은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C씨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험운전치상), 강제추행 혐의로 1심서 징역 4년, 40시간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 5년간 취업 제한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양형부당을 이유로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한 상황이다.

이외에도 후임병에게 상습적으로 가혹행위를 일삼은 해병대 선임도 기습공탁을 통해 감형받고 벌금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D씨는 2022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인천 강화 소재의 한 해병대 생활관서 후임병들에게 이른바 식고문을 일삼고 이유 없이 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후임병들에게 반복적으로 가혹행위 등을 가했고 수단과 방법도 불량하다”고 지적하면서도 “일부 피해자와 합의하고 합의 못한 피해자를 위해 형사공탁하는 등 피해복구를 위해 노력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은 모두 판결 선고일이 임박해 형사공탁을 진행한 예시들이다. 이 같은 형사공탁은 소위 기습공탁으로 불린다.

피고인의 형사공탁을 원고가 수령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 공탁금회수동의서 또는 엄벌탄원서를 제출할 시간도 없게 만드는 것이다. 형사공탁 특례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피해자의 동의가 없으면 형사공탁금을 신청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피고인들은 형사변제공탁이 아닌 민사변제공탁으로 돌려서 공탁을 신청하는 꼼수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리산 산청 펜션 살인사건’ 재판이 있다.

지리산 산청 펜션 살인사건은 2021년 경남 산청서 투숙객이 펜션 주인을 마구 구타해 살해한 사건이다. 해당 사건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 E씨에게 범행이 잔혹하고 심신미약도 인정할 수 없다며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E씨에게 4년을 감형한 징역 16년을 선고했다.

돈으로 사고 
다시 주머니로

2심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은 별다른 이유 없이 피해자의 얼굴 부위를 주먹과 발로 수회 구타해 살해했는데 그 수단과 방법이 매우 잔혹하며 피해자는 두부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어 사망해 범행의 결과 역시 참혹하다”며 “피해자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의 유족들 역시 피해자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며 피고인에 대해 엄벌을 탄원하고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피고인은 조현병 등의 정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서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 피고인은 이 사건 이전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전혀 없고 일관되게 잘못을 인정하며 진심 어린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의 가족들이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비교적 분명해 보이며 향후 피고인에 대한 치료와 계도를 다짐하고 있다. 당심에 이르러 피고인의 가족들이 피해자의 유족들을 위해 상당한 금원을 공탁한 점 등을 고려해 이같이 형을 정한다”고 부연했다.

유족 측은 해당 공탁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며 받을 생각도 없던 공탁금으로 감형이 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알고 보니 E씨는 선고 일주일 전에 1억5000만원을 민사변제공탁했으며, 심지어 선고 일주일 후 가해자는 공탁금을 회수하기도 했다.

형사공탁금은 돈을 맡길 때부터 공탁금을 가져갈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해야 해 회수가 불가능하지만 가해자는 민사변제공탁을 신청해 회수가 가능했다.

대법원 예규에 따르면 변제공탁자가 회수청구권의 행사에 조건을 붙이는 경우의 처리지침에 따른 공탁금 회수 제한 신고서를 첨부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판결 선고 전후를 불문하고 피공탁자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공탁자가 공탁금을 회수할 수 있으므로 공탁 사실을 양형에 참작함에 있어서는 공탁금회수 제한 신고서가 첨부됐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하지만 해당 재판부서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유족 측은 “돈으로 감형을 사고 다시 그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은 상황인데 법원의 묵인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형량에 영향 미치면 안 된다”
과거엔 민사변제공탁 꼼수도

피고인 측 변호사는 “해당 사건과 관련해 민사도 진행 중이라 민사변제공탁을 진행한 것이며 당시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되기 전이라 피해자 동의 없이 공탁하려면 민사변제공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에는 다들 이렇게 공탁했다”고 말했다.

서초동 한 변호사는 “아무리 같은 사건으로 형사‧민사재판이 둘 다 진행 중이더라도 민사공탁금을 통해 감형을 받고 다시 회수한 것은 법의 허점을 이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변호인은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법원은 확인 절차를 제대로 하지 못해 유족 측만 고통받은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형사공탁 특례 시행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가해자가 피해자와의 합의가 불가능할 때 공탁을 통해 감형을 노린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검찰청은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변론 종결 후 선고가 나오기 전 기습공탁이 접수되면 검사가 법원에 변론 재개를 신청해 피해자의 의사와 공탁 경위 금액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 있도록 개진하라”는 명령을 일선 청에 내렸다. 또 대검찰청은 법원행정처와 실무협의에도 나섰지만 의미있는 결론은 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에도 기습공탁을 금지하기 위한 다수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별 다른 움직임은 없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9~12월에 발의된 총 4건의 공탁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황운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법원이나 검찰에 형사공탁 내용이 통지되면 ‘7일 이내’에 피공탁자 또는 법률대리인에게 고지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피공탁자가 공탁수령 의사가 없을 경우 공탁회수동의서 등을 제출해 원치 않는 공탁이 피고인의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핵심 골자다. 같은 당 이탄희·윤영찬 의원도 유사한 취지의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설훈 전 민주당 의원은 형사공탁 기간을 ‘해당 형사사건의 변론 종결기일 14일 전’으로 제한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각종 사건 등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하려는 노력 대신 변론종결일에 맞춰 기습공탁해 유리한 양형을 받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들 개정안 모두 상임위원회 심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다음달 22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국회 법안심사는 사실상 멈춰있는 상태다.

법조인도
비판 목소리

법조계에서는 물질만능주의 선고라며 법원을 비판하는 모양새다.

법무법인 영민의 김슬아 변호사는 “한국 법원은 유독 금전공탁을 피해복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공탁은 피해자의 피해복구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적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을 재판부는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공탁을 양형 요인으로 보는 것은 재판부의 재량인데 유독 후하게 공탁 감형을 하는 모습”이라며 “사기, 절도 등 금전적 피해가 회복될 수 있는 선고형이 아닌 피해자를 인격적,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성범죄, 아동학대, 무고 등에 관한 선고형에 공탁이 왜 감형 요소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kcj5121@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특정 당의 당원 명부가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총선, 지방선거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당 관계자의 업무용 노트북에 담겨있던 정보가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올림픽 육상 100m 경기를 생각해 보자. 8개 레인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선다. 이 선수들은 국내 선발전에서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해 예선을 치르고 결승에서 금메달을 다툰다.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달라지는 경기에서 승자는 늘 단 1명뿐이다. 치열한 공천 경쟁 선거는 올림픽보다도 더 확고한 ‘승자 독식’ 구조다. 올림픽에선 2등에게 은메달, 3등에게 동메달이라도 주지만 선거에서 2등은 꼴찌와 같다. 당선자는 후보자에서 국회의원, 시·군·구의원, 구청장·군수, 시·도지사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이뤄진다.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자리로 순식간에 올라가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이 큰 자리로 몰린다. 어떤 경기든 일단 출발선에 서야 경쟁을 할 수 있듯, 선거에서 공천은 본선으로 가기 위한 1차 관문이 된다. 자리는 하나, 후보는 여럿이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불거진 공천 헌금 의혹은 자리를 돈으로 사려 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는 구속됐다. 최근 서울 구로구에서 일어난 당원 명부 유출 의혹도 공천 경쟁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의 업무용 노트북에서 수십개의 엑셀 파일이 발견됐는데 그중 일부가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였고 이름, 연락처, 거주지 등이 포함된 이 파일이 상대 당의 후보 경선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0년 21대 총선 당시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거물급 인사가 후보로 맞붙었다. 구로을 지역은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다. 17대(2004년)부터 지난 22대(2024년) 총선까지 20여년간 민주당이 이겼다.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이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18대 총선에서도 구로을 지역은 넉넉하게 수성한 바 있다. 업무용 노트북에서 발견 이름·연락처·거주지 담겨 구로에서만 평생 살았다는 한 시민은 “선거 때마다 텃밭, 험지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나. 구로는 국민의힘 입장에서 ‘사지’다. 민주당이 아주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총선 등에서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몇몇 인사들은 바닥부터 훑어가며 선거를 준비한다. 민주당은 21대 총선 때 구로을 지역 후보로 윤건영 의원을 전략공천 형태로 낙점했다. 윤 의원은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불린다. 국민의힘은 서울 양천을 지역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용태 전 의원을 ‘자객’ 공천했다. 민주당의 독식으로 관심 지역에서 벗어나 있던 구로을이 순식간에 ‘격전지’로 떠올랐다. 문제는 구로을 지역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 조규영 전 서울시의원의 반발이 거셌다. 조 전 시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 비례대표로 정치권에 입성, 이후 구로2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재선했다. 조 전 시의원은 최소한 경선은 치를 수 있게 해달라며 민주당의 전략 공천을 비판했다. 당시 조 전 시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지역 당원 수보다 더 많은 권리당원을 모았다. 열심히 뛰었다. 누구와 경쟁하든 경선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며 “그러나 결과는 낙하산 공천이었다. 저는 특혜나 찬스를 원하지 않았다. 공정한 경선만을 바랐다. 낙하산 공천은 공정하지도 않고 본선 경쟁력도 없다”고 강조했다. 어디에 사용했나 조 전 시의원은 노숙 단식까지 해가며 경선을 촉구했지만 결국 낙천했다. 이후 다른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잊히는 듯했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업무용 노트북에서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표기된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발견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국민의힘 당원들의 이름과 연락처, 행정동 등이 기재된 엑셀 파일은 ‘(보안철저)저쪽디비’ 폴더에 담겨있었다. 해당 파일의 ‘구분’ 부분에 ‘조규영 일반 당원’이라고 표기돼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맞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에 민주당 구로을 국회의원 예비후보였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기재돼있다는 점에서 의심이 촉발됐다. 동시에 누가 노트북에 해당 파일을 옮겼는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서가 발견된 노트북은 2020년 총선 과정에서 당원협의회에 업무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구로구의회에 입성한 A 구의원이 해당 노트북을 사용했다. A 구의원은 2022년 국민의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여성부장을 맡은 이력도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문제의 노트북은 A 구의원이 여성부장으로 활동할 무렵 사용했다가 후임자에게 넘겼다. 그는 “이후 여성부장이 바뀔 때까지 쭉 A 구의원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쉬쉬하다 이제서야 눈여겨볼 대목은 A 구의원의 이력이다. 그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 당선됐지만, 2020년 총선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조 전 시의원을 보좌하는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실제 조 전 시의원이 예비후보로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곳곳에서 A 구의원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A 구의원은 조 전 시의원 낙천 이후 김용태 전 의원 배우자의 수행비서로 발탁됐다. 김 전 의원의 측근이 A 구의원을 추천한 것으로 안다”며 “2020년 총선에서 김 전 의원이 낙선하고 당협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A 구의원이 비례대표로 공천받았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측 정치인을 수행했던 인사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그가 직접 사용한 노트북에서 자신이 보좌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파일명이 기재된 국민의힘 당원 명부가 발견된 셈이다. A 구의원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를 민주당 측에 유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대목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A 구의원이 조 전 시의원을 수행할 당시 지역구 경선을 대비해 당원 명부를 입수한 게 아닌가 싶다”며 “당시 경선까지 진행되지 않았기에 당원 명부가 실제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아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사실 이 문제는 올해 1월경에 처음 드러났다. A 구의원이 당원협의회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폴더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쉬쉬’하다가 최근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당협 회의에서 논의 A 구의원 “문제없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A 구의원의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지난 1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에서 논의됐다. 해당 의혹이 구로 지역에서 확산하자 A 구의원이 먼저 이 문제를 먼저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당원협의회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에 따르면 대부분 위원은 ‘덮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가 불거지면 지방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관계자가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 “해당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조사를 요청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관철되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한 위원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당원 명단이 일부 흘러 다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명부가 통째로 유출되는 건 심각한 일”이라며 “명백한 해당 행위다. 자체 조사를 통해 징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 규정 제20조(징계사유)에 따르면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현행 법령 및 당헌·당규·윤리 규칙을 위반해 당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 행위의 결과로 민심을 이탈케 했을 때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있다고 돼있다. 해당 관계자는 A 구의원의 행위가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해당 행위? 징계 가능성? A 구의원은 해당 의혹은 전부 해명됐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당협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는데 문제없다고 결론 났다.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일고의 논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의혹을 언급한 제보자에게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점을 전해 달라”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