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범죄 ‘초동수사’ 까칠한 조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3.04 15:12:42
  • 호수 1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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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죽고 사는데 법타령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강력범죄는 초동수사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이뤄지는지가 중요하다. 범죄가 발생한 시점서 피해를 막을 순 없지만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찰의 강력범죄 수사 시 발목을 잡는 게 있다. 바로 성인 실종 신고자를 수사할 법령이 없는 것이다.

강력범죄는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해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 폭행, 살인, 방화, 강도, 절도, 성폭력이 여기에 해당된다. 당연히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초동수사를 하는 것이다. 초동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피해자의 생존 여부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보통 강력범죄는 ‘성인 실종신고’로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들을 수사할 법적 근거가 없다.

위험성
알려도…

‘실종아동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실종신고 당시 14세 미만인 아동은 ‘실종아동을 발견하기 위한 수색과 수사를 한다’ ‘개인 식별 목적을 위한 혈액, 모발, 타액 등의 검사 대상물로부터 유전자를 분석한다’ ‘경찰서는 실종아동의 발생 신고를 접수한 때에는 지체 없이 수색 또는 수사의 실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등의 법률로 실종아동을 찾아야 한다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있다.

반면 실종 성인을 찾기 위한 법령이 전혀 없는 상태라 실종신고가 들어와도 찾기가 쉽지 않다. 실종 당시 생명의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신고하면 ‘단순 가출’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가출인은 실종 수색을 할 수 없다.


경찰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수사를 하고 싶어도 ▲사생활 침해 ▲보복 ▲채권추심 등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실종자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만 18세 미만 아동 실종신고 사례는 연평균 약 2만명에 육박하지만, 성인 실종신고는 연평균 7만여건으로 아동 실종과 비교하면 약 3.3배나 많다. 미해제 건수는 평균 540여건으로 약 29배 많은 수치를 보인다.

법적 근거가 없는 성인 실종신고로 발생한 강력범죄 사례로 ‘마포 오피스텔 감금 살인 사건’이 있다. 2021년 3월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의 한 오피스텔서 20대 남성 두 명이 또래 남성을 감금해서 장기간 갈취, 폭행한 끝에 피해자를 기아로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경찰의 부실 수사 논란으로 재점화됐다. 경찰에 따르면, 대구 출신이었던 피해자는 성인이 된 후 아버지에게 “서울에 가야 한다”고 카드를 한 장 받고 친구 두 명을 따라 상경했다. 당시 친구들은 학창 시절에 피해자에게 장기간 학교폭력을 행사했던 친구였다. 

학교폭력의 정도는 심각했다. 학교 탈의실 안에서 유사 성추행을 했고, 피해자의 바지를 벗겨서 인터넷 방송에 송출하기도 했다.

“친구와 서울에 간다”는 아들이 연락이 되지 않자, 아버지는 지역 경찰서에 아들의 실종신고를 두 차례나 했다. 당시 경찰이 바로 수사에 들어갔더라면 강력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경찰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매년 늘고 있는 성인 실종자
전화 통화로 확인만 하고 끝


전화로만 피해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했고, 피해자는 가해자와 함께 있는 상태라 구조 요청을 할 수가 없었다.

경찰 수사는 피해자의 카드 내역을 조사해 수소문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인근 편의점 사장이 폭력을 당한 것을 직감해 경찰에 사건을 인계했고, 피해자는 건강검진을 받고 입원했다. 이때 피해자는 아버지를 만나 “가해자가 서울로 올라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전화 통화한 것은 피해자가 시켜서 대답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우리와 같이 있지 않다고 대충 말하고 끊으라”고 시켰던 것이다. 피해자의 체중은 감금 전 52㎏이었으나, 발견 당시에는 34㎏으로 심각한 기아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장기간 기아 상태에 놓였으며 강제적으로 음식 공급이 끊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수사담당관의 잘못이 인정돼 정직 2개월, 심사담당관은 견책, 담당 과장에게는 불문 경고의 징계를 내렸다.

이 같은 성인 실종신고의 문제점은 전 남편을 살인한 후 유기했던 고유정 사건서도 드러났다. 2019년 5월18일 고유정은 자신의 차량을 가지고 제주도에 입항했다. 일주일 뒤 전 남편 사이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펜션서 머물다 같은 달 25일 전 남편을 살해하고 이틀 뒤 펜션을 나와 제주도를 빠져나갔다.

피해자의 남동생은 경찰에 “형이 전 부인을 만나러 갔다가 연락이 두절됐다”고 신고했고, 경찰은 제주도 펜션서 혈흔을 발견해 고유정의 주거지인 충북 청주서 전 남편 살해 등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경찰은 피해자가 실종됐다는 동생의 신고를 받은 후 고유정과 통화했다. 고유정은 경찰에게 “전 남편이 자신을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도망갔다”며 거짓말했고, 담당 경찰은 그대로 믿었다.

대부분
단순 가출

재판을 앞둔 시점 고유정은 “계획적 살인이 아닌, 성폭행 방어 과정서 저항했다”고 주장했다. 

실종신고 당시 고유정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 외에도, 경찰의 초동수사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살해 현장 주변 CCTV를 최초로 확보한 것도 경찰이 아닌, 피해자의 유족(동생)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증거물 중 하나인 졸피뎀이 든 가방도 초기 체포 과정서 놓쳤다. 이 가방은 고유정과 재혼한 남편(나중에 이혼)이 제출해 확보했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여러 CCTV와 고유정의 진술 내용을 분석한 결과, 잔혹한 범죄 이후 행동에 심리적인 장애가 드러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경찰은 고유정 사건 부실 수사에 대해 인정했고, 범죄 관련성이 높은 실종사건에 대한 매뉴얼을 마련했다.

초동조치와 수사 과정 등에서의 부실 의혹에 대한 과실을 확인한 경찰청은 고유정 사건을 계기로 현행 실종자 분류 체계 판단을 정밀화했다. 경찰은 현재 15개가량의 항목으로 구성된 체크리스트를 통해 실종자를 크게 고·중·저 3단계로 나눴다.


경찰은 실종자 분류 체계 체크리스트에 ‘범죄 관련성’을 반영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했다. 현행 미성년자와 여성, 장애인, 치매 노인 등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고위험 기준에 범죄 가능성도 세밀하게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실종 사건서도 원한 관계 등 범죄 가능성이 높은 경우, 세밀하게 따져볼 것이다. 체크리스트는 일선 수사관 의견 청취를 거쳐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종자 체크리스트 등 매뉴얼 수정은 고유정 사건 진상조사에 따른 후속 조치다. 경찰이 실종 사건과 관련해 유사 피해와 부실 수사 의혹이 제기되지 않도록 돕는다. 사건 초기부터 피의자인 고유정의 진술만 믿고 사실 확인을 부실하게 했다는 게 고유정 사건 감찰의 결론이다.

가해자
말만 듣고…

경찰은 실종 수사뿐 아니라 종합적인 판단과 신속한 대응을 위한 대책으로 ‘종합대응팀’을 신설했다. 초기 수색·인력투입 등이 관건인 실종 사건과 사회적 관심사가 높은 주요 사건을 체계적으로 다루겠다는 설명이다.

고유정 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경찰청 합동점검단 관계자는 “일선 수사 과정에 본청, 지방청의 의견을 반영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다만 경찰청과 지방청 단위서 직접 수사에 개입하는 종합대응팀과 관련해 검찰의 지휘권을 침해한다는 논란도 있었다.


고위험군이란 ▲택시 탑승 후 지인이나 애인 또는 가족에게 전화나 문자로 탑승 사실을 알린 후 귀가하지 않고 소재 불명 ▲통화 당시 다투는 소리, 우는 소리, 악 소리 등 범죄 피해가 의심되는 상황이 있는 경우 ▲구조 요청 전화와 문자(큰일 났다, 살려 달라 등) 발송 후 신고자가 보낸 회신을 읽지 않는 경우 ▲최근에 타인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받은 전력이 있는 경우 ▲전화 통화 시 다른 사람이 실종자 전화를 받은 경우 ▲금전거래(대출, 입금, 송금, 계좌이체 등)와 관련된 장소 또는 사람들(대부업체, 직업소개소 등)을 만나러 간 이후 연락이 두절된 경우 등을 말한다.

그러나 고위험군이라고 판단돼 경찰이 수사해도, 마포 오피스텔 감금 살인사건처럼 성인 실종자가 직접 범죄 피해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또 고유정 사건과 같은 유형은 실종신고 접수 및 수사 개시를 주저하기가 쉽다. 현장 경찰관들은 부부싸움 후 홧김에 가출, 회식 후 연락두절,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불안한데 감금된 것 같다’ 등 단순 가출로 판단되는 사건에 대해 ‘강성 비난’을 대비해 지나치게 많은 경찰력을 동원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초동수사와 경찰력 낭비의 경계가 모호하다. 모든 경찰관이 범죄 및 교통사고 예방 등 본래의 기능을 멈추고 현장에 출동할 경우, 치안 공백과 경찰업무의 피로도 증가 문제점도 발생한다.

가정불화나 개인 사정 등으로 잠시 집을 떠나거나 가족들과 연락하지 않는 경우인데도 최대한 빨리 찾기 위해 극단적 선택이나 범죄와 연관된 것처럼 허위·과장 신고하는 사례가 잦아져 경찰력 낭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신고해도 현장 출동 불가능
“범죄 연관성 있어야 간다”

실제로 2021년에는 거짓 실종신고로 수개월에 걸쳐 경찰관들을 고생시킨 여성이 징역형 집행유예를 받은 경우도 있다. A씨는 2020년 제주지역 경찰서에 찾아가 “16년 전 친척 집에서 당시 4살이었던 아이를 잃어 버렸다”고 실종 신고했다.

A씨 친척도 경찰에 “당시 일하고 집에 와 보니 아이가 없었고, A씨에게 알려주려 했으나 연락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력범죄 연루 가능성이 있다고 본 여성·청소년수사팀과 형사팀 경찰관들은 실종 현장 인근을 탐문하는 한편, 2004년 발생한 변사 사건을 수개월 동안 일일이 확인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A씨의 실종신고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아이를 B라는 이름으로 출생신고했던 A씨는 후에 개인적인 이유로 C라는 이름으로 재차 출생신고를 했다. 그러다 최근 B에게 병역판정검사 통지서가 나오자 제적시키기 위해 경찰에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신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실종됐다던 아이는 A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대전지법 형사8단독(부장판사 차주희)는 위계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20시간 사회봉사도 함께 명령했다.

차 부장판사는 “공무원들의 정당한 직무 집행이 방해되는 결과를 낳은 피고인의 죄책이 가볍지 않다. 이중으로 출생신고된 아이에게 병역통지서가 나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범행에 이르게 된 점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판시했다.

한편, 성인 실종자가 매년 늘어나는 상황인 데 반해 현행 실종자정보시스템은 노후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0년간 실종 법령‧제도 등이 변하고 실종 사건 데이터양이 증가했지만, 현행 시스템은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현행 실종자정보시스템에서는 발생지, 목격지 등 장소에 대한 정보를 텍스트로 관리하고 있어 실종자 동선이나 행적을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영등포구 여의도동 33번지서 실종’과 같이 실종자의 위치는 텍스트로 표기된다.

이는 지도상 좌표 값으로 변환할 수 없어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 중인 112시스템, 지리적프로파일링(GEO-Pros), 폴리폰 등과 연계도 힘든 실정이다.

중요한
현행법

경찰 관계자는 성인 실종자에 관해 “현행법에 따르면 성인에 대한 실종신고가 들어와도 영장 없이 수색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범죄와 연관이 없다면 단순히 소재 파악을 위한 영장은 나오지도 않는다. 112에 극단적 선택 의심신고가 들어와 생명과 신체에 위해가 가해질 우려가 있다면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지만, 단순 가출신고는 수색할 방법이 없어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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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