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일요초대석> 벽지서 세상을 보다 - 사성암 주지 우석 스님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사세요”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다. 대낮에 정치인이 테러를 당하고 국민들은 ‘묻지마 범죄’에 노출돼있다. 마음의 평화는 물질의 풍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국민에게 올바른 방향을 알려줄 길잡이가 필요한 시기다. <일요시사>가 민족의 대명절 설을 맞아 사성암 주지, 우석 스님을 만나 그 답을 물었다.

어찌할 수 없이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이판사판’은 원래 불교 용어다. 참선하고 수행하고 포교하는 승려를 일컫는 ‘이판’과 절을 운영하고 사업을 하는 등 사무처리에 힘쓰는 승려인 ‘사판’의 합성어다. 사찰 내에서 승려의 업무 분담에 따른 구별을 위해 사용됐다.

물 좋고
산 좋은

사성암 주지이면서 화엄사 부주지를 겸하고 있는 우석 스님은 스스로를 ‘사판’이라고 칭했다. 11세부터 절에서 살기 시작한 우석 스님은 18세 때 출가해 33년 동안 전남 동부권 주요 사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성암 주지를 맡은 건 3번째로 햇수로는 8년 동안 암자를 운영했다.

사성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지리산 대화엄사의 말사로 전남 구례군에 있다. 구례구역에서 차로 15분 정도 잘 닦인 길을 올라가면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발 531m 오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사성암은 주변 자연경관이 빼어난 경승지로 알려져 있다. 2014년에는 명승으로 지정됐다. 

사성암의 원래 이름은 오산암이었다.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 등 4명의 성인이 수행을 했다는 의미인 사성암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선국사가 수행한 굴로 알려진 도선굴도 있다.


원효대사가 암벽에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여래입상이 유명하다.

지난달 26일 사성암서 우석 스님을 만났다. 우석 스님이 기다리고 있던 요사채에서는 지리산 능선과 섬진강, 구례읍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세먼지 수치가 높아 뿌연 공기 속에서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경치를 자랑했다. 매년 일출 때마다 300~500명이 찾아오고 연 단위로는 20만명의 관광객이 드나든다. 

우석 스님은 “사성암서 일출을 보면 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경관이기 때문에 새해에 찾아주시는 것 같다”며 “그래도 관광객이 제일 많이 오는 시기는 벚꽃축제와 맞물린 봄”이라고 말했다.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사성암은 고승들의 기도처로 알려진 곳이었다.

일종의 비처(숨겨진 장소)로 스님들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소문난 기도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인기를 끌면서 관광지화됐다. 교구 본사인 화엄사와는 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아 구례읍에 방문한 관광객은 두 사찰을 모두 들르는 편이다. 여기에 사성암은 올해로 3년째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어 여행객의 발걸음을 잡고 있다. 산 위에 있어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 손꼽힌다. 

11세부터 절에 살아
20대부터 소임 맡아

우석 스님은 화엄사, 사성암 등에서 다양한 소임을 맡아 활동하면서도 언론 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지역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절에서 기부하는 등의 행사를 많이 했음에도 관련 사진 한 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는 자선 행위로 드러나는 효과가 중심이 돼야지 대상(사람)이 주목을 받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오랜 철학으로부터 비롯된 행보였다. 

그러면서도 우석 스님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크게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이 언론 친화적인 행보로 화엄사나 그 주변, 말사의 발전과 변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우석 스님은 20대부터 사찰 운영과 관련해 소임을 맡았다. 화엄사의 재무 소임을 담당하면서 사성암 주지를 겸하는 등 행정업무에 잔뼈가 굵은 그는 인터뷰 내내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답변을 내놨다. 종교인이라면 이른바 뜬구름 잡는 식의 선문답을 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부수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특히 종교가 신뢰를 잃고 있는 분위기에 대해 사회가 변화하면서 종교를 향유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석 스님은 “종교가 신뢰를 잃었다는 개념보다는 종교의 형태가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한다”며 “사회의 색채에 따라 종교의 색채가 변화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믿음과 불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탈종교화되면서 종교 역시 긍정적인 의미로 세속화되고 실용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종교 자체가 일반인의 니즈에 따라 변해가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예전에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바탕으로 마음의 치유를 바랐다면 지금은 가시적인 효과나 변화에 관심이 높아졌다”고 전했다. 

거리감
줄여야

종교를 소비함으로 인해 실제 삶의 변화를 느끼는지 여부에 민감해졌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종교 역시 그런 변화에 발맞춰 바뀌고 있다는 게 우석 스님의 생각이다. 실제 종교에 대한 일반인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전국 각지의 절에서 운영하고 있는 템플스테이가 그 단적인 예다. 

우석 스님은 “사찰에서는 공간을 제공하고 신도는 그곳에서 경관을 보며 쉬어가면 된다. 종교적인 행사나 고민 해결 같은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지 않는 선에서 편안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사찰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에는 (신 혹은 종교를)믿으면 너에게 행복이 올 것이다. 그러니까 신념과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면 지금은 일단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봐. 그 이후에 마음이 치유되고 삶에 변화가 온다면 다시 이 사성암으로 찾아와. 힘들 때 와서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해. 이런 식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사실 종교가 의사는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욕망을 일일이 다 채워줄 순 없다. 그렇기에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서 종교가 갖고 있던 원래의 역할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 변화의 속도를 종교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석 스님은 종교는 ‘관조’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실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중재’의 역할을 해야지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종교가 갈등 해소를 위해 사회 활동에 매진하면서 오히려 그 역할에 너무나 매몰돼있던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석 스님은 노사갈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노동자와 사업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가 양보하고 쟁취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종교가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직접 들어가 노동자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적대관계도 형성되고 종교 본연의 자세도 잊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사회적으로 갈등 분위기가 팽배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빠르게 변화한 사회 시스템의 부작용이라고 언급했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서 중진국,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서 발생한 당연한 업보라는 주장이다. 결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고, 감당의 부분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개입 아닌
관조해야

우석 스님은 “갈등은 늘 있었다. 형태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라며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갖고 있고 그 크기는 모두 다르다. 이 과정서 생기는 충돌을 두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식의 해결 방법은 옳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등 아니면 안 돼’ ‘남보다 잘나야 해’라는 경쟁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패배는 도태라는 인식이 커졌다. 가정, 교육현장 등에서 이 같은 사고방식이 고착되면서 사회 시스템 자체가 경쟁 친화적으로 변화했다. 우석 스님은 이런 사회 시스템이 결국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사회 분위기가 국민을 압박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 갈등이라는 것이다.

우석 스님은 “과거 물질이 부족했던 시기에는 그 물질로 채우지 못한 부분을 정신적으로 메웠다. 종교가 그 역할을 했던 것이고. 예를 들어 예전에는 빵 한 조각도 나눠먹는 모습을 아름답게 느꼈다면 이제는 빵이 많아서 서로 네 것, 내 것 싸울 일이 사라졌다. 정신적 욕망이 들어설 틈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갈등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현 상황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우석 스님은 정치인을 상대로 한 테러에 대해 언급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5일,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중학생이 휘두른 돌에 머리를 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보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흉기에 찔렸다. 

우석 스님은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했을 때 관심사는 처벌, 배후 같은 부분에만 집중된다. 왜 테러를 가했는지, 가해자가 왜 흉기를 휘둘렀는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 없이 테러 방법, 배후 사주 정도만 공개하지, 그 이상은 조사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결국 갈등의 꼬리 자르기가 반복되면서 본질이 흐려지고 적체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정권을 잡는 것에만 중점을 두다 보니 본질을 살피는 일은 소외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갈등 해결을 위한 소위 통합위원회를 꾸린다 해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매듭 짓지 못하니 국민과 정치권, 정부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종교를 소비하는 방식 변했다”
“갈등 최소화하는 법 생각해야”

우석 스님은 “갈등 해결을 위한 기구를 만들 때 실무를 해온 사람에게 권한을 줘야 한다. 지역서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연구자를 넣으면 결국 이론밖에 남지 않는다. 해당 지역의 지자체장, 대학 총장 같은 결정권자 역시 필요하다. 갈등은 결국 삶에서 일어나는 충돌인데 이론만 갖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사회가 경직되면서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국민에게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조언을 건넸다. 우석 스님은 “불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종교다. 자기 마음이 편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비를 실천하겠다는 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면 그건 불교의 기본원칙에 벗어난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라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우석 스님은 “지금은 물질이 넘쳐서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동냥을 하지 않아도 나름 자급자족이 가능할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삶의 어떤 지점서 물질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강할 때 그 삶을 버리거나 바꿔서, 또 받아들여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외부서 원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모색하고 변화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자기 삶이 압박받고 가둬져 있어 내 삶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외부중심적”이라며 “내가 지금 이 순간 결정하면 모든 걸 다 바꿀 수 있고 새로운 수익구조도 만들 수 있다는 게 바로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부연했다. 

4월 총선을 2개월 앞둔 상황서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도 물었다.

우석 스님은 “정치권은 정권을 창출하는 데만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예산을 따오는 과정서 본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만 강조한다. 물론 예산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예산을 지역 특색에 맞게 어떻게 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거철에 많은 공약이 나오는데 비현실적이거나 터무니없는 것도 많다. 그보다는 현실화할 수 있는 공약을 내세워야 한다. 지금은 공약을 당선의 수단, 그리고 목적으로만 여기는 국회의원들이 많다. 지역사회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정치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도자 덕목
공약 현실화

우석 스님은 “기성세대는 자기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가치관이 이미 고착화돼있다. 그에 반해 젊은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무엇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지를 더 고민할 수 있다.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 삶을 물질로만 판단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제언했다. 

“4~5년 전, 부처님 그림에 쓰여 있던 글귀인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절대 뒤로 가지는 않는다”를 인용한 그는 “속도는 느려도 방향성 자체는 앞을 향한다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라고 마무리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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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