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서울경찰청장 불기소 시나리오

외부 전문가들은 책임 있다는데…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10·29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500일이 돼간다. 고위 공무원 및 윗선에 관한 수사기관의 진상규명 의지는 증발했다. 그나마 경찰은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게 법률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불구속 기소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관측만 1년을 넘겼다. 결국 검찰이 수사심의위원회를 소집하면서 김 청장의 무혐의 가능성만 커졌다.

10·29 이태원 참사를 수사한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이하 특수본)는 윗선 중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만 검찰에 송치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혐의 처분됐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서부지검 수사팀은 김 청장을 기소조차 하지 않고 있다. 대검찰청 차원서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다.

기로에서…
관측만 1년

특수본은 이태원 참사 수사 당시 형사법 전문가 등 외부 전문가들로부터 ‘김 청장의 혐의가 인정된다’는 취지의 의견을 받았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특수본은 지난해 1월 행안부와 서울시, 경찰청, 서울시 자치위원회, 서울경찰청 등 5개 기관 책임자에 관한 혐의 판단을 구했다.

해경 지휘부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한 세월호 참사 판례나 경찰서장이 불기소된 일본 아카시시 압사 사고 등 상급자의 과실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국내외 판례가 있으니 김 청장 등의 경우는 어떤지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한 것이다.

특수본은 행안부, 서울시, 경찰청장, 서울청장,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 등 5개 기관 책임자에 대한 수사 결과 보고서 초안을 전문가들에게 송부한 뒤 의견을 받았다. 전문가 5명 중 4명은 김 청장의 혐의가 인정된다며 송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서울청장의 혐의가 인정된다’는 수사 결과에 동의한다는 취지였다. 이들은 행안부, 서울시, 경찰청장, 서울시 자치경찰위에 대해선 불송치 내지 입건 전 조사 종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특수본 수사 결과에 동의한다고 밝힌 A 자문위원은 의견서에서 김 청장이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주의의무를 진다’고 봤다. A 위원은 김 청장이 참사 보름 전인 10월14일부터 27일 사이 정보분석과·112치안종합상황실 등으로부터 핼러윈 데이와 관련해 보고를 받았고, 참사 당일에도 용산경찰서장으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은 점에 주목했다.

A 위원은 “사상의 위험 발생 가능성이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청장은 인파 관리에 효율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경찰관기동대를 배치하는 등 인명사고의 예방 및 대책을 수립·시행하지 않은 과실이 있다”며 “이태원 사고 피해자나 사고 발생 장소의 상인 등의 과실이 인명사고의 공동 원인이 됐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서울청장 등의 형사책임이 부정되진 않는다”고 분석했다.

사고 발생 500일…윗선 책임자 처벌 ‘0명’
서부지검 전·현 수사팀 의견 충돌 이유는?

자문위원 B씨는 의견서에서 “예년의 경우 관례적으로 기동대가 투입되어 인파 관리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만 예외적으로 기동대가 투입되지 않은 데는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면서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경찰 지휘부 혹은 외부서 기동대 투입을 막은 존재는 사고 발생에 공동정범의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를 적용해 김 청장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김 청장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검찰 수사심의위원회(이하 수심위)에 회부했다. 대검찰청은 이원석 검찰총장의 직권으로 15일 김 서울청장과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에 대한 수심위를 개최한다.


김 청장이 수심위에 회부된 것을 두고 서부지검 전·현 수사팀 간 갈등이 표출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9월 바뀐 서부지검 현 수사팀은 세월호 참사 사건서 해경 지휘부 전원이 무죄를 받은 점, 부산 초량 지하차도 침수 사건 항소심서 공무원들이 무죄 혹은 감형 판결을 받은 점 등을 들어 김 청장을 불기소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다.

반면 서부지검 전 수사팀은 김 청장을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태원 참사 사건과 관련한 정보보고서를 삭제한 혐의로 기소된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경무관)의 공소장에 ‘참사 전 김 서울청장에게 인파 집중 위험성이 보고됐으며, 김 청장이 이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는 취지로 기재했다.

기소 의견
책임 명확

서부지검 전 수사팀은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아 지휘부의 업무상 과실치사죄를 인정한 판례를 들여다본 것으로 전해졌다.

고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관련해 구은수 전 서울청장이 유죄를 확정받았던 게 대표적이다. 구 전 서울청장은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서 살수차 운용 감독을 소홀히 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법원은 “이 사건 집회·시위의 총괄 책임자로서 사전에 경찰과 시위대에 부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을 예상했다”며 벌금 1000만원을 확정했다.

서부지검 전·현 수사팀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으나 이 총장이 직권으로 김 청장을 수심위에 넘긴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거세다. 검찰 내부서도 면죄부를 던져준 것이라는 불만이 나타나는 분위기다.

서울중앙지검 한 관계자는 “수사 지휘부서 김 청장을 재판에 넘길 의지가 있었으면 굳이 수심위를 열 필요가 없었다”며 “여러 판례가 존재함에 따라 기소 후 무죄 가능성 등 정치적 이유와 역풍 등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부지검 관계자도 “전 수사팀 관계자들이 정말 열심히 수사해왔다. 유족분들의 눈높이를 맞추려 애썼지만 대검서 김 청장의 구속영장 청구를 반대하는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김 청장의 불기소 가능성은 적지 않다. 이태원 참사 재판서 피고인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의 입증과 인과관계에 관한 재판부의 판단이 길어지고 있다. 김 청장이 기소된다고 해도 같은 혐의를 받는 만큼 재판서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크다는 분석이 제기되는 이유다.

사실상
면죄부?

현재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진행 중인 재판은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용산구청 관계자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공공안녕 정보외사부장 등 경찰 정보라인 관련자 ▲최재원 용산구보건소장 재판 등 4가지다.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을 비롯한 용산경찰서 관계자들은 보석으로 풀려난 뒤 직위 해제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핼러윈을 앞두고 10만명 인파 운집이 예측된다는 보고 및 참사 당일 압사 위험을 알리는 112 신고를 받고도 별다른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혐의(업무상과실치사상 등)를 받는다.


또 이 전 서장과 그 관계자들은 참사 현장 도착 및 경찰 구조활동 내역을 허위로 기재하도록 지시 및 기재한 혐의(허위공문서 작성·행사 등)도 받고 있다. 이 전 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무전 내용만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어려웠다거나 허위 기재 지시 및 작성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밀집 위험을 예측한 정보보고서 등을 참사 직후 폐기하려 한 혐의를 받는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공공안녕 정보외사부장 등 3명 역시 혐의를 부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폐기 절차가 규정에 따른 올바른 직무수행이었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측은 기자 브리핑서 “참사 관련 정보보고서 7건 중 4건이 삭제됐고, 핼러윈 행사 관련 정보보고서가 다수 제작됐지만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총장 직권으로 수심위 회부
김광호 무혐의 가능성 커져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혐의를 받는 박 구청장 등 관계자 4명에 대한 재판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이태원 참사가 예측 불가능한 행사였으며 주최자가 없었기 때문에 관리 책임 또한 없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용산구청 실무자들도 책임을 경찰 측에 떠넘기고 있다. 서울시 인사위원회 측에선 이들에 대해 공무원직무상 의무 위반 등에 따라 징계 절차를 의논하고 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이들 공판이 동일한 사안을 다루는 만큼 선고기일을 최대한 맞추겠다는 방침을 밝힌 상태다. 박 전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 공판의 경우 이달 안으로 1심 선고를 예고한 상황이다.

서부지검 전 수사팀은 지난해 말까지 현 수사팀에 “김 청장을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피력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서부지검 전 수사팀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임재 전 서장의 혐의와 김 청장의 혐의가 비슷한 게 아니라 같다. 이 전 서장을 넘겼는데 김 청장을 못 넘길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향후 책임과 혐의 인정은 재판부가 판단할 몫이다. 정치적 이유를 왜 고려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 전 서장의 재판서 검찰은 ‘핼러윈 데이를 맞아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몰린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고 발생까진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인식 없는 과실이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고 발생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 과실범으로 기소한 것이지, 사고 발생 가능성을 알았다면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므로 고의범으로 기소했을 것이라는 취지다.

서부지검 전 수사팀에 따르면 김 청장은 참사 당일 이태원 일대에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여러 차례 전달받았다. 이 전 서장 혐의의 핵심이 되는 ‘인파가 몰릴 것을 예견할 수 있었는데도 적절치 대처하지 않았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서부지검 초기 수사팀도 김 청장의 혐의를 인정했고, ‘구속 기소가 필요하다’는 의견까지 냈었다.

검찰 내부
갈등 표출?

기소를 뒷받침하는 판례가 상당하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대표적이다. 실제 검찰은 이 전 서장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해당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해당 사건에서 법원은 피고인들(제조·판매사 대표)이 ‘위험성을 알리는 자료를 몰랐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몰랐으니 업무상과실치사상이지)그 자료를 확인하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면 고의범이 성립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결문에 적시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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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