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7번째 코리안 빅리거 고우석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1.08 14:22:28
  • 호수 14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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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오타니와 투타 대결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고우석 선수, 샌디에이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샌디에이고 구단이 구단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고우석에게 이 같은 환영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대표적인 소식통은 “고우석이 (MLB)마무리 투수를 맡게 될 것”이라고 썼다. 고우석은 한국인 선수 중 빅리그로 직행한 7번째 선수다.

LG 트윈스 마무리 투수 고우석(26)이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 협상 마감일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하며 MLB 입성의 꿈을 이뤘다. <뉴욕포스트> 조엘 셔먼 기자는 지난 4일(한국시각) “고우석이 샌디에이고와 계약기간 2년, 총액 450만달러(약 59억원) 계약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꿈에 그리던
MLB 무대 입성

고우석은 샌디에이고의 환영에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혔고, 계약을 마친 뒤 LG를 통해 “메이저리그서 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LG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샌디에이고 구단에도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됐다. 좋은 모습으로 모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LG 구단도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고우석을 응원했다.


차명석 LG 단장은 “고우석은 KBO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고 있고, 잘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좋은 성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메이저리그 선수로 활약하길 기대한다. 고우석 선수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한다”고 밝혔다.

LG는 구단 공식 SNS를 통해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LG 트윈스 구단은 “입단 후 7년 동안 매 순간 팀을 위해 헌신했던 고우석 선수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수놓을 고우석 선수의 빛나는 활약을 변함없이 응원하겠다”고 전했다.

샌디에이고는 김하성이 주전 내야수로 활약하고 있는 구단으로 고우석을 영입해 한국인 선수 2명을 보유하게 됐다. 고우석은 샌디에이고서 김하성과 함께 뛰면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 함께 속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이정후, LA 다저스의 오타니 쇼헤이와 투타 대결을 펼치게 됐다.

이로써 고우석은 ▲류현진(한화 이글스→다저스) ▲강정호(넥센 히어로즈→피츠버그 파이리츠) ▲박병호(넥센→미네소타 트윈스) ▲김광현(SK 와이번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김하성(키움→샌디에이고) ▲이정후(키움→샌프란시스코)에 이어 포스팅을 거쳐 KBO 리그서 빅리그로 직행하는 일곱번째 선수가 됐으며 LG 소속 선수로는 최초다.

앞서 이상훈이 1997년 시즌 종료 후 국내 최초로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했다가 최고 응찰액이 60만달러에 그치자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방향을 돌렸다.

샌디에이고와 ‘2년에 59억원’ 계약
김하성과 한솥밥 “마무리 투수 수행”

이번 계약으로 고우석은 2023시즌 내셔널리그 유틸리티 부문서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김하성과 함께 뛰게 됐다. 오는 3월20일, 21일 이틀간 고척스카이돔서 예정된 샌디에이고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메이저리그 서울 개막전’서 두 명의 한국선수가 뛰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저스엔 이번 자유계약선수(FA) 시장서 이적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인 오타니 쇼헤이와 메이저리그 투수 최대 규모 계약 신기록을 경신한 야마모토 요시노부가 있고, 샌디에이고에는 다르빗슈 유, 마쓰이 유키까지 일본인 네 선수도 양 팀에서 뛰고 있는 만큼 메이저리그 서울 개막전은 한·일 야구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샌디에이고가 고우석을 영입하려는 이유로는 2023시즌 마무리를 맡았던 조시 헤이더가 FA 자격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중계권사가 파산하면서 재정 상황이 악화된 샌디에이고로선 헤이더의 몸값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샌디에이고는 최근 일본 프로야구 라쿠텐 골든이글스서 활약했던 좌완 마무리 투수 마쓰이 유키와 계약기간 5년, 총액 2800만달러에 계약하며 불펜 강화에 나섰다.

여기에 우완 고우석도 영입해 불펜을 보강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고우석이 이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LG 트윈스서의 업적 덕분이다. 고우석은 김용수, 이상훈, 봉중근의 계보를 잇는 정통파 마무리 투수로 지난해 한국시리즈 1차전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감독과 동료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 2차전에 등판했다.

고우석은 지난해 11월8일 서울 잠실구장서 열린 2023 신한은행 SOL KBO 한국시리즈(7전 4선승제) KT 위즈와의 2차전에 구원 등판해 1이닝 2탈삼진 무실점 10구 완벽투를 펼치며 데뷔 첫 한국시리즈 세이브를 신고했다. 5-4로 근소하게 앞선 9회 경기를 끝내기 위해 팀의 8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LG 트윈스
업적 보니…

이날 고우석은 문상철을 상대로 결승타를 허용한 1차전과는 전혀 다른 구위를 뽐냈다. 대타 출전했던 선두 김민혁을 헛스윙 삼진, 후속 조용호를 루킹삼진으로 돌려보낸 뒤 마지막 김상수를 2루수 땅볼로 잡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고우석의 완벽 마무리를 등에 업은 LG는 2002년 11월8일 한국시리즈 5차전서 삼성에 8-7로 승리한 이후 무려 21년 만에 한국시리즈 승리를 맛봤다. 

그렇다고 LG서 고우석이 승전보만 알렸던 것은 아니다. KBO 리그 ‘대표 클로저’인 고우석은 지난해 11월7일 한국시리즈 1차전서 쓴맛을 봤다. 2-2로 맞선 9회 마운드에 올랐지만 2사 후 배정대를 9구 끝 볼넷으로 내보낸 뒤 문상철을 상대로 뼈아픈 1타점 2루타를 맞고 고개를 숙였다.

고우석은 LG 팬들이 21년을 기다린 한국시리즈 1차전서 패전투수가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2차전 경기 후 만난 고우석은 “확실히 어제 경기하고 나서 등판한 거라 그런지 괜찮았다”며 “어제 경기는 어제일 뿐이니까 오늘 다시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했고 똑같이 준비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 더 힘을 빼고 던졌다. (박)동원이 형 미트 보고 던지려고 했던 게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국시리즈 첫 세이브 소감을 전했다.


염경엽 감독의 멘탈 케어도 반등에 도움이 됐다. 고우석은 “감독님이 제구가 안 됐을 때 제구를 잡는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오늘 경기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또 (박)동원이 형 사인대로 던지라고 이야기해주셨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오늘 경기장에 다시 나왔을 때 (김)현수, (박)해민, (오)지환, (박)동원이 형이 몸이 아픈지만 물어봤다. (임)찬규 형은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며 “2019년부터 가을야구에 계속 진출하면서 계속 실패를 맛봤다. 물론 한국시리즈가 다른 무게감이긴 하지만 과거 실패 경험이 있어서 조금 더 리프레시에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함께 인터뷰실에 들어온 박동원도 고우석의 구위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박동원은 “어제도 너무 잘 던졌는데 커브 하나가 실투가 되는 바람에 안 좋은 상황이 됐다. 어제 아쉬우니까 다음에는 그쪽으로 공이 가지 않게 잘 준비하자고 했다”며 “어제 공을 너무 많이 던져서 컨디션을 물었고, 괜찮다고 해서 또 준비 잘하자는 말도 했다. 고우석은 충분히 공이 좋은 선수다. 대한민국에 이런 좋은 마무리 투수는 없다. 잘 던질 거라고 항상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목, 허리…
부상 극복

데뷔 첫 한국시리즈 세이브를 확정지었을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고우석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막아낸 그 순간보다 (박)동원이 형이 홈런 친 순간이 더 짜릿했다. 나도 동참해서 때리지 못한 게 아쉽다”며 웃었다. 


고우석은 잠실구장을 노란 물결로 가득 메운 LG 팬들을 향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고우석은 “어제 결과가 좋지 않았음에도 던지는 순간마다 이름을 연호해주실 때 이 팀에 속해 있다는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더 힘이 났다”고 진심을 전했다.

‘엘린이’(엘지 트윈스+어린이) 출신인 고우석에게 지난해 한국시리즈는 남달랐다. 승패 여부를 떠나 한국시리즈 출전 자체가 기쁨이고 영광이었다. LG는 2002년 이후 21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1994년 이후 29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런 경기 결과가 더 기쁜 것은 고우석이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던 중 연습경기 중 허리 통증을 호소해 마운드를 내려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LG는 지난해 11월1일 잠실구장서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상무와 연습경기를 치렀다. 고우석은 이날 팀이 6-2로 앞선 9회 초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타자 박승규에게 2루타를 허용한 고우석은 후속타자 이주형을 유격수 뜬공으로 돌려세웠고, 이어 허인서와의 승부 도중 갑작스러운 몸 상태 이상을 느끼며 투구를 중단했다. 

고우석의 제스처에 투수코치와 트레이닝코치가 올라와 상태를 확인했고, 대기 투수가 없어 이닝을 이어가지 않고 그대로 연습경기를 끝냈다. 당시 LG 구단 관계자는 “고우석 선수는 허리 근육통이 있고, 현재 아이싱 중이다. 상태를 지켜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우석은 지난 시즌 44경기 44이닝 3승8패 15세이브 평균자책점 3.68을 기록했다. 마무리를 맡은 이후 가장 적은 세이브 기록이다. 그만큼 성적이 나지 않았다. 부상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목 뒤 담 증세로 1경기도 나서지 못하고 귀국길에 오르기도 했다. WBC 종료 후 국내서 다시 검진을 받았고 회복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데뷔 2년간 고전했지만…
3시즌 평균자책점 2.17 

이로 인해 고우석은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약 2주가 지난 뒤인 4월18일 1군 마운드에 섰는데 5경기를 던지고 4월30일 잠실 KIA전서 허리 통증으로 다시 엔트리서 제외됐다. 이후 한 달 이상 회복에 전념했다.

지난해 6월4일 돌아온 고우석은 항저우아시안게임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38경기에 나와 38 1/3이닝을 소화했고, 2승7패13세이브를 올렸다. 항저우아시안게임서도 결승전서 부상을 당했다. 우승을 확정짓고 나서 담 증세가 생겼다. 귀국 후 많이 나아졌지만, 시즌 막판에는 등판하지 않았다.

그 후로 10월29일 잠실구장서 열린 3번째 청백전에 등판했다.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지난해 9월22일 이후 거의 한 달 만의 등판이었다. 3-0으로 앞선 8회 마운드에 올라온 고우석은 1이닝 2피안타(1피홈런) 1볼넷 3실점으로 좋지 않았다.

새롭게 연마하고 있는 포크볼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오스틴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장타를 많이 맞았다.

이틀을 쉬고 이날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팀이 6-2로 앞선 9회 등판한 고우석은 허리 근육통으로 1/3이닝만 소화하고 마무리했다. 다행히 병원서 자기공명영상(MRI) 검사한 결과 단순 허리근육통 진단을 받아 2~3일 회복훈련으로 호전된 후, 역경을 이겨내 성공적으로 한국시리즈를 치렀고 MLB까지 진출한 것이다.

고우석에 대한 미국 매체의 평가는 어떨까? 

미국 현지 매체 <MLB트레이드루머스>는 고우석의 포스팅 허가 소식을 전하며 “올해 25세인 고우석은 지난주 MLB 레이더망에 포착됐다”며 “복수의 빅리그 구단이 포스팅 자격을 갖춘 KBO 선수에게 관심을 보일 때 통상적으로 거치는 절차인 신원조회를 MLB가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그렇다고 해서 고우석이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한다는 보장은 없다. 포스팅이 공식화되면 메이저리그 구단과 협상할 수 있는 45일간의 기간이 주어진다. 이 기간 내에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면 고우석은 LG 트윈스로 복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MLB트레이드루머스>는 고우석에 대해 ‘한국 최고의 투수’라고 지칭했다. 매체는 “한국 최고 수준서 7시즌 동안 활약한 고우석은 3.1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데뷔 첫 2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후 네 시즌 중 세 시즌 동안 2.17 이상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다만 지난해에는 44경기서 평균자책점이 3.68로 뛰어올랐다. 그는 상대 타자를 31.1%의 확률로 삼진을 돌려세웠지만 상대 타자에 11.8%의 볼넷 비율을 보이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고우석은 2021년과 2022년에 좋은 제구력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세 시즌 연속으로 28% 이상의 범타율을 보였다”고 칭찬했다.

볼넷을
막아라

또 매체는 “팬그래프의 에릭 롱엔하겐이 고우석을 40인 유망주로 선정했다”며 “롱엔하겐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우석의 구속은 90마일 중반, 최고 98마일에 육박해 메이저리그 팀에서 중간 계투로 활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우석은 또 한국서 세 차례나 30세이브를 넘긴 경험이 있는 강속구 투수”라고 지난 시즌 팬그래프의 유망주 40인 명단에 들었던 점을 언급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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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