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사각지대 놓인 정신질환자의 민낯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8.21 13:25:09
  • 호수 14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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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살고 치료 없이 바로 출소하니…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범죄를 저지른 후 스스로를 ‘조현병 환자’라고 말하는 범죄자들이 많다. 이런 일이 지속되다 보니 ‘조현병 환자는 잠재적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상 조현병 환자들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이들이 제대로 치료될 수 있도록 복지를 탄탄하게 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 

묻지마 범죄 또는 무동기 범죄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 칼부림 사건 등에 따른 묻지마 살인이나 상해 범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최근 한국은 묻지마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 ‘안전한 나라’라는 타이틀이 흔들리고 있다. 

늘어나는
묻지마 범죄

묻지마 범죄 피의자들은 범행 후 자신이 조현병에 걸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그에 맞춰 언론들은 피의자들과 관련한 보도를 쏟아낸다. 특히 피의자의 정신질환을 언급하는 기사들이 많다. 지난 11일, 대전 소재의 한고등학교에 침입해 교사를 흉기로 찌른 혐의(살인미수·건조물 침입)로 구속된 20대 A(28)씨도 마찬가지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4일 오전 9시24분 대전 대덕구의 한 고등학교에 침입해 교사 B(49)씨의 얼굴과 가슴, 팔 부위 등을 흉기로 7차례 찔러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는다. 

학교 정문을 통과해 교내로 들어온 A씨는 2층 교무실로 올라가 B씨를 찾았고, B씨가 수업 중이란 말을 듣고 복도서 기다리고 있다가 B씨를 발견하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 흉기를 휘둘렀다. 범행 직후 달아난 A씨는 3시간여 만에 거주지 인근서 긴급 체포됐다.


그는 피해 교사 말고도 다른 교사와 동급생들을 가해자로 지목해 경찰이 조사를 벌였는데, 이들은 A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경찰은 A씨가 2021년 정신질환 진단을 받았고, 평소 망상 증세를 보였다는 어머니 진술을 확보해 망상에 따른 범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 

A씨는 조현병과 우울증 진단을 받고 지난해까지 치료받다가 의사로부터 입원 치료를 권유받았지만 입원도, 치료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내가 원해서 치료받지 않았다”는 의미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14명의 사상자를 낸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의 피의자 최원종(22)은 “나를 감시하는 스토커 조직이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다는 수사 결과가 나왔다. 자신의 범행 자체는 후회하지만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지 않았다.

치료감호 청구 기각 증가
치료소 정신과전문의 부족

최원종은 2020년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를 진단받았지만 최근 3년간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다가 망상에 빠져 범행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경찰은 최씨의 진술 및 휴대전화 등 디지털증거 분석(포렌식) 결과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을 모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최씨는 “나를 해하려는 스토킹 집단에 속한 사람을 살해하고 이를 통해 스토킹 집단을 세상에 알리려고 범행했다”는 검거 당시의 진술을 유지했다. 또 커뮤니티에 흉기를 든 사진 등 게시물을 올린 적 있고, 이것 역시 스토킹 집단이 커뮤니티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경고성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또 서현역을 범행 장소로 삼은 이유에 관해서는 자기 집 주변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어서 스토킹 집단 소속인 이들이 다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서현역서 디저트 먹는다”는 글도 스토킹 집단이 찾아올 것이라는 이유에서 작성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조현병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고 있다.

한 온라인 지역 커뮤니티에는 “이웃에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일방적으로 반말하고 욕을 하는데 너무 스트레스받는다. 고통스러워서 경찰, 주민센터, 변호사 상담까지 받아봤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다. 가족들도 이미 포기했다고 한다”며 “조현병 환자가 직접적인 상해를 가하지 않으면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정말 누구 한 명 죽어야 해결되는 거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해당 글에는 “강제입원 말고는 답이 없는데 그것도 위협을 받아야 가능하다” “이웃 환우는 안타깝지만 경찰이 강제라도 병원 입원을 시켰으면 좋겠다. 이러다 정상적인 사람까지 정신병 걸린다” “흉기를 들고 난동 부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 “이사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등의 답변이 달렸다.

통제 불능
어쩌나…

조현병 환자는 위험하니 알아서 피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결국 주변의 조현병 환자들 때문에 일반인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조현병 환자는 왜 통제 불능 상태가 된 것일까?

국립정신건강센터가 발간한 ‘국가정신건강 현황보고서 2021’을 보면 2021년 기준 중증 정신질환자는 65만1813명이며, 이 중 조현병 진단 환자는 18만2901명, 분열형 및 망상 장애 환자까지 포함하면 23만554명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현병 환자나 정신질환 범죄자에 대한 형벌에만 집중하고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정신질환 범죄자의 치료 및 사회 복귀를 위한 치료감호 청구와 인용률이 동시에 크게 떨어진다.

법조계는 날로 짙어지는 엄벌주의 위주의 형사정책 경향과 함께 치료감호소의 만성적인 인력·예산 부족 등을 원인으로 꼽으며, 치료감호 제도 정상화를 위한 인적·물적 인프라 확대 및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한 바 있다.

치료감호법 제2조에는 치료감호 대상자로 ▲형법 제10조1항에 따라 벌하지 않거나 조 2항에 따라 형을 감경할 수 있는 심신장애인으로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 ▲마약·향정신성의약품, 그 밖에 남용되거나 해독을 끼칠 우려가 있는 물질이나 알코올을 식음·섭취·흡입·흡연 또는 주입받은 습벽이 있거나 그에 중독된 자로서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 ▲소아성기호증, 성적가학증 등 특정 성적 성벽이 있는 정신성적 장애인으로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성폭력 범죄를 지은 자 등이 있다.

손 놓은
재범 위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피고인은 재범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선 치료를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데, 법원이 치료감호 청구를 기각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검찰의 치료감호 청구가 줄어드는 건 2009년부터다. 2022 검찰연감에 따르면, 검찰의 치료감호 청구 수는 2009년 350건이었지만, 2013년 254건, 2019년 184건, 2021년 78건 등을 기록해 크게 줄었다.

법원이 1심서 치료감호 청구를 인용하는 비율도 줄고 있다. 사법연감 등에 따르면, 1심서 치료감호 청구 인용률은 2014년 82.9%(223건)에 달했지만 2020년에는 68.3%(114건)로 절반가량 낮아졌다.


전문가들은 치료감호 청구·인용이 줄어든 원인으로 정신질환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 강화 기조와 함께 치료감호소의 만성적인 인력·예산 부족 등을 꼽았다. 하지만 정신질환 범죄자는 2018년 이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고, 이들의 재범률은 65.4%를 기록했다.

반면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의 정신과 전문의 충원율은 절반 수준에 불과해, 전문의의 진료 부담이 늘고 있다. 국립법무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충원율은 53.3%밖에 안 돼 정원 15명 중 8명만 일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관리체계의 허점이 드러나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진단을 받은 환자 8명 중 7명이 치료를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입원치료할 수 있도록 국가의 관리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정신의료기관서 치료받은 조현병과 망상장애 환자 중 지역사회서 제공하는 정신건강증진사업을 이용하는 환자의 비율은 0.13으로, 8명 중 약 1명만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정신건강관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나 죽으면 조현병 형 삶은…”
“비자의 입원 더 용이해져야”

조울증으로 알려진 양극성 장애 환자 등록률은 0.05로 20명 중 1명밖에 안 됐고, 주요 우울 장애 환자의 등록률은 그보다 더 낮은 0.01로 100명 중 1명꼴이다. 특히, 조현병과 망상장애 환자가 지역사회서 관리받는 비율은 ▲2018년 0.14 ▲2019년 0.14 ▲2020년 0.13 ▲2021년 0.13으로 소폭 감소했다.


정부는 지역사회 내 정신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전국 260개소에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운영하는 등 정신건강 관리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하지만 홍보 부족과 환자에게 강제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어서 대상자의 동의를 통해서만 제공된다. 

다만, 자·타해의 위험이 발생한 경우에는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센터가 입원 개입 등 긴급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정신질환 환자와 가족 역시 일상이 힘들다. 조현병 환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B씨는 결혼했고, 그의 형은 오랜 기간 조현병을 앓고 있다. 형은 치료를 꾸준히 받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혼자 할 수 있지만, B씨가 형의 실질적인 보호자다. B씨는 규칙적인 시간에 형에게 전화해야 하고, 매주 두 번은 방문해 보살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병원에 동행해 형의 주치의와 상담한다.

B씨가 없으면 B씨의 형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집 앞에 좋은 공원과 산책길이 있지만 한낮에도 커튼을 두껍게 쳐놓고 지낸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B씨 뿐이고, 그가 방문하면 형은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감정을 드러낸다. 

불안한 일이 있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형은 B씨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한다. B씨가 가족과 함께 있거나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고려되지 않는다. 새벽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택시를 타고 B씨가 있는 곳으로 찾아온 적도 있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하거나 욕을 하기도 하고, 전자 도어록을 믿지 못해 문에 자물쇠를 달아두기도 한다. 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생수를 직접 골라 마신다. B씨는 평생 형을 보살피면서 살아야 한다. 결국 형이 이만큼 살 수 있는 것은 B씨 덕분이지만, 그만큼 그의 삶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허점
결국 답은?

B씨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형을 꾸준히 보살폈다. 그래서 지금 이만큼이라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됐고, 폭력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만큼 내 가정을 보살피지 못한 죄책감이 있다. 나중에 늙으면 형을 보살피기 힘들고, 내가 형보다 먼저 죽으면 형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한 의료 관계자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지자체장이 보호와 진단을 신청할 수 있는 ‘행정입원’도 법에 규정돼있지만, 소송 우려 등으로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증 정신질환자의 비자의(非自意) 입원이 더 용이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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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