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드디어 빛 발하는 이강인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07.20 10:20:57
  • 호수 14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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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바페·네이마르와 ‘슛∼’

[일요시사 취재2팀] 김성민 기자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했던가.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PSG)에 입단한 이강인에 어울리는 수식어다. 2007년 그는 KBS 2TV 예능 <날아라 슛돌이>서 이목을 끌었다. 7세 이강인과 유상철 전 감독의 첫 만남도 그때 이뤄졌다. 당시 유 전 감독은 “성인을 축소해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의 선견지명은 틀리지 않았다. 췌장암으로 눈을 감기 직전에도 이강인을 응원했다. 유 전 감독은 2021년 유튜브를 통해 “건강하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다면 강인이 경기를 현장서 보고 싶다”고 말했으나, 마지막 메시지가 됐다.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던 이강인의 바람이 실현되는 요즘이다.

파리 생제르맹(PSG)으로 이적하는 과정은 이강인에게 순탄치 않았다. ‘축구 신동’ 이강인은 2011년 스페인 발렌시아에 입단했다. 이후 2018~2019년 시즌 발렌시아 1군으로 데뷔했다. 그의 유럽 진출은 운이 아닌 실력으로 따냈다. 2019년 U-20 폴란드월드컵서 이강인은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구단주 피터 림은 그의 가능성을 엿봤다. 뺏기지 않으려 바이아웃을 걸고, 벤치에 묶어뒀다. 

운 아닌
실력으로

발렌시아에 10년을 바친 이강인은 만기 1년을 앞두고 방출됐다. 2021년 레알 마요르카는 그를 영입해 PSG행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다고 발렌시아가 이강인을 토사구팽한 건 아니었다. 그는 발렌시아를 대표하는 유망주였다. 10세에 유소년 아카데미에 들어온 유학파다.

당시 발렌시아는 그가 “아시아 축구 시장의 창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숱한 유망주를 떠나보낸 발렌시아는 유소년 선수를 보호했다. 10대 이강인도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해 메이저 클럽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2018년 스페인 국왕컵서 1군 무대 데뷔전을 치렀는데, 구단 역사상 최연소 데뷔 외국인 선수로 기록됐다.

한국 역사상 최연소 유럽 1군 데뷔 선수이기도 했다.


2019년 9월, 18세 나이로 스페인 라리가 데뷔골을 터트렸다. 이어 20세 이하(U-20) 폴란드월드컵서 2골 4도움을 올리며 준우승을 견인하는가 하면, 골든볼(대회 MVP) 수상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2019년 8월 말, 발렌시아는 이강인과 4년 재계약을 맺는다. 화려한 출발과 달리 출전 기회는 잡지 못했다. 당시 팬들은 그가 저평가되고 있다며 의아해했다. 

벤치는 물론 출전 명단서 제외되는 일이 잦았다. 2020년 시즌도 빛을 보지 못했다. 초반에는 주전으로 나섰지만, 점점 출전 시간은 줄었다. 그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기준 경기당 평균 출전 시간은 약 53분에 불과했다. 횟수로는 총 44경기 포함 총 62경기 출전에 그쳤다. 발렌시아의 기용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발렌시아는 이강인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다. 바이아웃으로 8000만유로(약1058억원)를 걸었다. 바이아웃은 일정 금액을 다른 팀이 채우면 소속 구단과 합의 없이 이적할 수 있는 제도다. 사실상 ‘팔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싱가포르 출신 구단주인 피터 림이 원흉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사업가인 피터 림은 2014년 1억유로에 발렌시아를 인수 했다.

운영 초기엔 구단의 채무를 갚아준 구세주로 보였으나 얕은 축구 경영 지식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팀 전체를 물갈이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코치부터 의료진까지 갈아치웠다. 팀을 소유물로 여기는 악덕 구단주의 모습이었다. 아시안 프랜차이즈 스타에 관한 욕심으로 이강인을 붙잡았다. 발렌시아 전 감독인 보르달라스의 이어진 폭로가 더욱 충격이었다.

2011년 발렌시아 입단…저평가 벤치 신세
마요르카서 날개 펴고 파리로 간 ‘슛돌이’ 

하루아침에 피터 림은 이강인을 내보내라고 압박했다. 17세 이강인을 적극 기용하라고 지시한 것도 그였는데 마치 존중을 상실한 서커스 단장 같았다. 


10대 시절 미숙했던 이강인은 감독의 전술과 맞을 리 없었다. 당시 발렌시아의 감독이었던 마르셀리노는 지켜보자는 의미로 임대를 고려했다. 그러자 구단에서는 임대를 막아버리고 감독을 경질해버렸다. 마르셀리노 경질 후 감독이 계속 바뀌자 팀 상황은 불안정해졌다. 이에 피터 림은 팀 내 주요 자원도 헐값에 넘겨버렸다. 

팀 성적도 강등을 면치 못하자, 이강인을 언론의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결국, 정치질에 악용한 것이다. 계약 만료를 1년 앞둔 2021년 여름, 이적설이 터졌다. 라리가 선수 등록 규정도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은 각 팀에 최대 3명까지만 비유럽(Non-EU) 선수를 보유할 수 있다.

당시 발렌시아에는 이강인을 포함해 막시 고메스(우루과이)와 오마르 알데레테(파라과이)가 있었다. 마르쿠스 안드레(브라질)까지 영입되자 이강인은 명단서 빠졌다. 활용할 수 없는 선수가 된 이강인은 방출 대상이 됐고, 재정난에 시달리던 발렌시아는 고민했다. 

돈이 없어 선수단에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피터 림이 선수단에 다음 해 9월 임금을 주겠다는 약속어음을 뿌리려 하자, 분노한 선수단은 “팔아치운 이적료로 확보한 돈은 대체 어디 갔느냐”고 항의했다. 라리가 측도 급여 지급이 되지 않을 경우 강등하겠다고 경고했다.

서커스 단장 
잘못 만나…

발렌시아는 이강인을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강인의 바이아웃 금액은 1000만유로(약 138억원) 정도였다. 코로나19로 이적시장이 얼어붙어 그를 찾는 곳이 없었다. 스와이프딜 대상으로 언급됐던 울버햄튼의 라파 미르가 세비야로 향하면서 물거품 됐다.

그나마 유력한 팀은 그라나다였다. 펩 보아다 디렉터가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경기에 목말랐던 이강인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공격 보강을 노린 발렌시아는 미드필더 이강인과 목적도 달랐다. 이강인은 발렌시아와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뜻을 관철했다. 결국, 마요르카에 이적료를 받지 않고 보내는 쪽으로 결정됐다.

2021년 여름 이강인과 발렌시아는 결별했다. 발렌시아는 그해 8월 말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이강인의 미래에 행운이 있길 바란다”고 발표했다. 

발렌시아의 유소년 육성 정책을 향한 비난도 쏟아졌다. 스페인 현지 매체는 “잠재력을 갖춘 이강인은 21세도 되기 전에 버림받았다”며 일침을 날렸다. 또 다른 매체는 “이강인이 떠나게 되면서 발렌시아의 유소년 육성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고 비판했다.

이강인에겐 출전 경험이 필요했고 마요르카는 미드필더가 절실했다. 벤치서 좌절했던 이강인은 마요르카서 날개를 폈다. 첫 시즌, 선발과 로테이션을 오가며 30경기에 나섰다. 이어 2022~2023년 시즌은 눈부셨다.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은 이강인을 중용했다. 마요르카의 공격 전개는 그의 발에서 시작됐다.

시즌 내내 맹활약을 펼쳤고 리그 36경기 6골 6도움을 기록했다. 라리가 한 시즌 공격포인트 10개를 돌파한 한국 출신 최초의 선수가 됐다.


환호와 함께
물오른 기량

지난 4월24일 헤타페전에서는 본인의 프로 무대 첫 멀티골을 터트렸다. 드리블 실력과 정확한 패스는 이강인의 상징이 됐다. 특히 순간적으로 전환해 공격 루트를 바꾸는 모습도 훌륭했다. 베다트 무리키와 보인 호흡은 최고였다. 이강인의 패스를 받은 무리키가 헤더로 마무리하는 패턴이다.

공격포인트도 보여주는 에이스였다. 중원과 공격을 오가는 이강인 덕에 마요르카는 강등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났다. 10년 넘게 강등권서 허덕인 마요르카도 이번 시즌은 달랐다.

2012~2013년 시즌 이후 최고 성적을 얻어 9위로 마무리했다. 이강인은 마요르카 소속으로 73경기 7골 10도움을 기록했다. 프리메라리가 주간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려 천재성을 증명했다. 올 시즌 프리메라리가 ‘올해의 팀’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페데리코 발베르데, 토니 크로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한국 선수가 올해의 팀 후보에 오른 것도 이강인이 처음이다. 세계적 찬사와 함께 러브콜이 쇄도했다.

이강인을 둘러싼 잡음은 환호와 함께 커졌다. 마요르카는 그를 이적료 없이 영입하면서도 처우는 낮았다. 연봉은 50만유로(한화 약 7억3000만원)에 그쳤다. 열정페이가 따로 없었다.


한 현지 언론은 “이강인의 연봉은 마요르카서도 10위 안에 들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같은 팀에서 호흡을 맞춘 베다트 무리키의 연봉 380만유로(약 56억원)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어 “그의 영입을 원하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서도 지금 이강인보다 연봉보다 더 적게 받는 선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서 가장 적은 연봉을 받는 선수는 백업 골키퍼 이보 그르비치다. 그는 이강인보다는 2배 많은 100만유로(약 15억원)를 받고 있다. 50만유로는 시즌 6골 5도움으로 맹활약한 이강인에게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월클’ 선수들과 어깨 나란히 
훈련 등 현지 적응 100% 완료

그가 레알 마요르카를 떠나야 할 이유는 명확했다. 그럼에도 이강인은 최선을 다했다. 그가 활약한 올 시즌엔 스페인 라리가 9위까지 올라섰다. 

그는 PSG로 이적하기 직전까지 마요르카와 대립했다. 바이아웃이 또 문제였다. 마요르카는 이적료로 2000만유로를 책정해 묶어뒀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적극적으로 이강인을 원했다. 현지 매체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세계서 가장 유망한 선수 중 한 명(이강인)과 계약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적을 막아선 마요르카에 화가 난 이강인은 SNS를 끊으면서 불만을 드러냈다. 

지난 9일 이강인은 미련 없이 PSG로 이적하면서 세계 최고 구단 중 한 곳에서 뛰는 명예와 함께 상당한 부를 얻게 됐다. 셀 온 조항 덕에 이적료 일부도 챙겼다. 셀 온 조항이란 선수의 이적료 일부를 선수 본인 또는 전 구단이 받도록 한다는 조항이다.

2021년 8월 발렌시아를 떠나 마요르카에 합류하면서 셀 온 조항을 계약서에 넣었다. 이에 따라 이적료 20%를 요구했다. 현지 매체가 추산하는 이강인의 PSG 이적료는 2200만유로(약 311억원)다. 0원으로 데려온 이강인이 2200만유로를 마요르카에 안겨준 것이다. 조항에 따라 이적료의 20%(약 63억원)를 자기 몫으로 받는다. 

셀 온 조항이란 선수가 다른 구단으로 이적할 때, 발생한 이적료의 일부를 선수 본인 또는 전 구단이 받도록 하는 것이다. 연봉도 올랐다. 이강인은 PSG서 400만유로(약 57억원)의 연봉을 받게 됐다. 앞서 이강인이 마요르카서 받던 연봉(50만유로)과 비교하면 무려 8배나 급등한 셈이다.

마요르카는 SNS를 통해 한글로 “강인 선수, 고마워요! 건승을 빌어요! 마요르카는 항상 강인을 반길 거예요”라고 공지했다. 지난 8일, PSG는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이강인의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PSG는 “22세의 공격형 미드필더인 이강인은 PSG에 입단한 첫 한국 선수가 됐다”고 밝혔다. 

등번호 19번을 받은 이강인은 2028년까지 PSG서 뛴다. 공식 입단 발표가 나오자 이강인 유니폼은 동이 났다. 파리 시내 PSG 공식 스토어 2곳 모두 품절이 됐다. PSG로 간 이강인의 플레이는 국내서 볼 수 있다. 이번 달 일본 투어를 떠나는 PSG는 내달 1일 인터밀란(이탈리아)전을, 이틀 뒤인 3일엔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서 K리그 전북 현대와 친선전이 예정돼있다. 

스승 유상철
또 다시 인연

한편, PSG는 2부 리그로 강등되지 않은 파리를 대표하는 클럽이다. 창단 초기부터 파리 시내에 ‘파르크 데 프랭스’를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이 경기장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 유상철이 벨기에전서 동점골을 터뜨린 장소기도 하다. 조별리그 최종전에 나선 한국은 유상철의 골로 1대1 무승부를 거뒀다. 유 전 감독과 각별한 이강인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다. 지난 12일 PSG서 첫 훈련에 나선 이강인의 모습도 전해졌다. 네이마르와 나란히 있는 모습은 국격마저 상승시켰다. 이제야말로 라리가서 저평가됐던 그의 진가를 발휘할 시간이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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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