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U20 월드컵 ‘4강 신화’ 김은중과 아이들

‘골짜기 세대’ 건너 ‘황금 세대’로

[일요시사 취재1팀] 옥지훈 기자 = 김은중호는 첫 항해부터 순탄치 않았다. 이강인 같은 스타 선수 부재와 무명 선수가 주를 이뤘던 데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절반 이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네시아서 열리기로 한 대회가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개최지가 변경되면서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수비 후역습’ 전략을 통해 세계 강호들을 제압했다. 이는 강한 조직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전략이다. 김은중호는 열악한 환경서도 ‘실리 축구’로 빛났다. 김은중호는 대회 끝이 아닌 한국 축구의 시작을 알렸다.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한국대표팀이 두 대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성적표를 안고 귀국했다. 출국 전 무관심 속에서 출국한 김은중호는 수많은 환대 속에 금의환향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는 기쁨도 잠시, 김은중은 “대회는 끝이 났지만 선수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국가대표까지 성장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가길 바란다”고 제자들에 조언과 격려를 전했다.

U20 월드컵
세계가 깜짝

김은중은 1998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동국과 투톱 공격수 체재로 공격진을 이끌어 한국에 대회 2연패와 통산 9회 우승을 선사했다. 국내에서는 이들을 한국 축구 르네상스를 이룬 주축으로 평가하며 이듬해 나이지리아서 열린 1999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당시 방송3사(KBS·MBC·SBS)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국내 독점 중계방송권을 두고 앞다퉜다. 국내 언론은 ‘멕시코 4강 신화’를 다시 이뤄낼 것이라며 김은중이 소속된 대표팀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은 멕시코서 열린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U20 월드컵 전신)서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한 경험을 두고 16년 만에 최상의 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지만 세계의 벽을 체감하며 지난 대회에 이어 2연속 16강 진출 실패라는 성적을 내는 데 그쳤다.


반면 ‘영원한 숙적’ 일본은 같은 대회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국내 분위기는 더 참담했다.

김은중은 이후 세계 무대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국내 리그에서는 대전 시티즌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지만, 왼쪽 눈 실명 상태라는 꼬리표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김은중은 중학교 시절 공에 맞아 왼쪽 눈이 실명됐다. 그럼에도 그는 축구선수에게는 큰 결함이 될 수도 있는 장애를 극복해 K리그 통산 444경기 123골을 터뜨렸다. 통산 A 매치 기록은 15경기 출전 5골이다. 

김은중은 이후 2014년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로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했다. 대전 시티즌 플레잉 코치와 벨기에리그 AFC튀비즈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김학범 전 23세 이하(U23) 한국대표팀 감독을 보좌하며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코치를 맡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금메달, AFC U23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김은중은 코치 생활을 끝으로 2021년 12월 U20 대표팀 첫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코로나 시기와 겹치면서 대표팀 운영에 차질이 생겼고, 이렇다 할 평가전도 치를 수 없었다. 대표팀 소집에도, 국내 유능한 선수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실전 경험 부족한 김은중호
‘실리 축구’로 똘똘 뭉쳤다

1년 동안 K리그 2군과 대학팀을 중심으로 어린 선수를 발굴했다. 이외에도 ‘유럽파’ 이현주(바이에른 뮌헨), 아시안컵 팀 최다 득점인 성진영(고려대)이 U23 월드컵 대표팀 기대주였으나, 부상으로 낙마해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김은중은 지도자로서 첫 무대에 섰다. 지난 3월 우즈베키스탄서 열린 2023 AFC U20 아시안컵이다. 한국은 U20 아시안컵 최다 우승 국가다. 김은중호는 같은 해에 있을 U20 월드컵 본선 티켓과 11년 만의 우승을 노렸다.

4강에 진출해 월드컵 본선 티켓을 확보한 김은중호는 준결승전서 만난 우즈베키스탄과 연장 접전 끝에 승부차기서 패했다. 경기 내용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120분 동안 유효 슈팅 2개를 기록하며 분전했고, 우즈베키스탄의 홈어드벤티지가 있었지만 경기력이 기대 이하였다. 

당시 FIFA 랭킹 25위인 한국과 77위인 우즈베키스탄은 20세 이하 대표팀 상대 전적서 6전 5승1무로 한국이 앞섰다. 대회 우승자는 개최국인 우즈베키스탄이 차지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

김은중호는 U20 월드컵 무대를 앞두고 직전 대회 준우승과 아시안컵 준결승서 보여준 경기력 열세로 부담감을 안았다. 월드컵 무대 두 달을 남긴 시점이었다.  

이번 U20 월드컵은 인도네시아에 열릴 예정이었다. 아시안컵이 끝난 후 김 감독은 현지 답사를 통해 인도네시아 기후 환경을 고려한 훈련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당초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던 인도네시아가 지난 3월 말 개최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강성 이슬람 단체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선수단 입국을 반대했다. 한 이슬람 단체는 이스라엘 선수단이 입국하면 납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FIFA는 선수단 보호 차원서 인도네시아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대체 개최국으로 아르헨티나를 선정했다.

대회 한 달을 앞둔 시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로 플랜을 변경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개최 준비에 아르헨티나 숙박시설과 훈련시설 수요가 높아졌다. 김은중은 아르헨티나와 시차 차이가 나지 않는 브라질로 향했다. 

태극마크 
압박감
 

김 감독은 기존 계획보다 일찍 출국해 브라질 상파울루에 캠프를 차리고 선수단 컨디션 조절에 나섰다. 김은중호는 최종 엔트리 21명을 발표한 이후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 소집한 다음 날 출국했다.

개최지 변경에 대해 김은중은 “브라질서 보낼 열흘간 시간이 중요하다. 좋은 컨디션으로 대회에 임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같은 상황이다. 누가 더 빨리 좋은 컨디션을 만드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일간 상파울루 전지훈련을 마친 김은중호는 결전의 땅 아르헨티나 멘도사에 입성했다. 이어 첫 조별리그 1차전인 강호 프랑스를 2-1로 승리했다. FIFA 주관 대회 사상 처음이었다. 프랑스를 상대로 U20 대표팀 역대 전적은 1승3무4패로 열세였다. 이후 멘도사서 열린 조별리그 3경기를 마친 김은중호는 2승1무를 기록하며 조별리그 무패로 16강 진출에 달성했다. 

16강전서 만난 에콰도르는 2019년 전 대회에 이어 2연속 토너먼트 대결 상대였다. 김은중호에는 제일 해볼만한 팀으로 평가됐다. 16강전 격전지는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였다. 에콰도르는 조별리그를 같은 지역서 치러 이동이 없는 반면 멘도사서 이동해야 하는 김은중호 피로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김은중호는 화끈한 공격쇼를 펼쳤다. 이번에도 승자는 한국 대표팀이었다. 결과는 3-2로 펠레 스코어 끝에 명경기를 펼쳤다.

나이지리아와 겨룬 8강전에서는 김은중호 특유의 실리 축구를 선보였다. 볼 점유율은 압도적으로 밀렸다. 전체 슈팅 4번 중 단 1번의 유효슈팅이 골망을 갈랐고 결과는 1-0 승리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김은중호는 늘 훈련을 시작할 때 “원 팀(One team)”을 외친다. ‘원팀’으로 뭉친 강한 조직력이 실리 축구의 핵심이다. 이번 대회 전체 8골 중 세트피스만 4골을 기록할 정도였다. 선수들은 “감독님이 우릴 믿고 우리도 감독님을 믿어서 이뤄낸 성과”라고 입을 모았다.

개성 강한 어린 선수들을 한 데 모을 수 있었던 건 김은중 리더십 덕분이었다. 묵묵하고 말수가 적은 성격으로 알려진 김은중은 젊은 선수들과 주고 받는 소통 능력이 강점이다. 코치로 지낸 지난 9년간 U23 대표팀과 각국 유망주가 모이는 벨기에 리그에서 젊은 선수들과 지내면서 소통 능력을 키웠다.

U23 대표팀을 함께 이끈 김학범 감독도 젊은 선수들과 소통능력을 최고로 꼽았다.

김학범 감독은 “김은중 감독은 화내거나 소리지르지 않고 자신이 준비하고 계획한 것을 명확하게 전달한다”며 “개성이 강한 어린 선수들에게 최고의 지도자”라며 극찬했다. 김은중은 만 44세다. 최근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선수에게는 젊은 감독이 대세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이번 대회 선수들은 직전 대회와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선수가 없었다.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막 프로리그에 입성하면서 프로무대 출전 기회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탄치 않았던
1년6개월 여정
 

김은중호는 앞서 골짜기 세대라고 불렸다. 골짜기 세대는 주변 세대와 비교해서 스타 선수나 실력이 떨어진다는 뜻을 담은 단어로 황금 세대와 반대말이다.

2017년 한국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는 당시 스페인 명문 FC바르셀로나B서 뛰며 초특급 유망주로 평가받던 이승우와 백승호가 대표팀에 승선했다. 이후 2019년 폴란드서 열린 대회에서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서 뛰던 이강인이 주목받으면서 기대감을 높였다. 이강인은 U20 월드컵 준우승과 골든볼을 수상했다. 

김은중호는 비교적 주목받는 선수가 없어 무관심 속에서 대회를 준비했는데 김 감독은 이 분위기를 잘 이용했다. 선수들이 처져 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면 먼저 다가가 기운을 북돋았다. 조별리그 1차전인 프랑스전 당시 오심으로 논란이 일었던 패널티킥(PK) 때도 선수들과 코치진이 흔들릴 때 김은중은 오히려 중심을 잡고 경기에 집중했다.

강한 조직력이 골짜기 세대서 황금 세대로 탈바꿈했다. 김은중의 리더십과 선수들의 끈끈한 팀워크가 2연속 대회 4강 진출을 이뤄내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린 선수들은 대회 도중 부상으로 떠난 박승호(인천 유나이티드)를 위해 각종 토너먼트에 나서기 전 기념촬영서 박승호의 유니폼 18번을 들어 올렸다.

1년6개월간 동거동락한 선수단 21명은 늘 하나로 뭉쳐 있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무명서 스타로 발돋움한 대표적인 선수는 미드필더 이승원(강원FC)이다. 그는 이전까지 연령별 대표팀에 뽑힌 적이 없었다. 김은중은 당시 단국대 소속이던 이승원을 첫 소집에 올린 후 꾸준히 기용했다. 김은중이 주목한 이승원의 강점은 기본기가 탄탄하고 넓은 시야와 패스 능력을 꼽았다.

이승원은 첫 대표팀 승선 이후부터 주장으로 임명됐다. 이승원은 평소 사려 깊은 성격과 묵묵한 스타일로 선수들을 도왔다. 과묵한 리더십은 스승인 김 감독을 빼닮았다. 

스타 없어도 세계 4위
“끝 아닌 이제 시작”

이승원은 한국 남자 선수 중 FIFA 주관대회서 가장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린 선수가 됐다. 3골4도움으로 7개 공격포인트를 올렸다. 직전 대회 이강인이 기록한 2골4도움인 6개 공격포인트를 넘어섰다. 그는 7개 공격포인트 기록으로 대회서 세 번째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브론즈볼을 받았다.

그는 8강전까지 4도움을 기록했는데, 모두 약속된 세트피스 상황서 올렸다. 

이승원은 이강인에 대해 “감히 얘기할 수 없지만 많이 보고 배우고 있는 선수”라며 “좋은 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따라가겠다”고 존경심을 나타냈다. 이어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걱정과 우려가 컸는데 팬들의 열띤 응원 덕에 4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며 “결과 외에도 많은 걸 얻었다. 소속팀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더 발전하겠다”고 다짐했다.

미드필더 배준호(대전 하나 시티즌)는 빼어난 개인기와 침착한 마무리로 에이스 등번호 10번의 탄생을 알렸다. 대회 중간 해외 외신들도 배준호에 대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 리그2 소쇼에 속한 스카우터 알렉시스 버지니우스는 “배준호는 이번 대회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선수 중 하나”라며 “배준호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깨우친 것 같았다”고 극찬했다. 외신 기자 에마뉘엘 트루머가 선정한 ‘2023 U20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발달 과정을 유심히 지켜봐야 할 선수 20인’에 꼽힌 한국 선수는 배준호가 유일하다. 트루머는 프랑스 리그1 중계방송사 카날 플뤼의 기자다.

이번 대회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카르미네 눈치아타 감독은 한국과 치른 경기서 2-1로 승리 후 이례적으로 상대 선수인 배준호를 칭찬했다. 눈치아타 감독은 “한국의 10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선수”라며 높은 평가를 내렸다.

대표팀 귀국길에 공항을 찾은 대전 팬들은 배준호에게 팀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유럽 이적설에 대해서는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건 없다”며 “난 현재 소속팀이 좋고 대전을 찾아주시는 팬들도 좋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영준(김천 상무)도 이번 대회서 주목할만한 활약상을 펼쳤다. 공격수인 박승호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 홀로 공격진 선봉장에 섰다. 7경기 중 3~4위전인 이스라엘전을 제외하고 풀타임으로 출전한 이유다. 무려 630분을 뛰며 투혼을 보여줬다.

그는 전 경기를 뛰며 2골1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김은중호 출범 이후 가장 많은 득점인 20경기 10골을 기록했다. 192cm, 87kg의 큰 체구를 가진 그는 연계 플레이와 뛰어난 드리블 돌파 능력이 강점이다. 이른바 ‘육각형 공격수’의 등장이다.

박승호는 김은중호 귀국길에 목발을 짚고 마중했다. 박승호는 당시 동료들을 기다리며 “우선 애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가장 앞섰다”며 “애들이 충분히 잘해줬기 때문에 4위라는 좋은 성적을 가지고 온 것 같다”고 전했다. 

강한 조직
강호 제패
 

박승호의 합류로 완전체가 된 선수단은 귀국 후 사진촬영과 공식행사를 진행했다. 이영준은 “승호가 온두라스전서 동점골을 넣어 상황이 좋게 흘러갔다”며 “서운하기보다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우정을 과시했다.

김은중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4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자회견서 “조별리그서 광탈(광속 탈락)할 거란 얘기가 어린 선수들 귀에 들어가는 게 가장 마음 아팠다”며 눈물을 보였다. 김은중호는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는 “월드컵서 본인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낸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 선수들이 감독으로서 첫 제자인데 1년6개월간 성장한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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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리더십이 위기다. 1인1표제가 통과된 이후 힘을 받나 싶더니,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와 2차 종합특검 후보 논란 등 악재가 겹치면서 연임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시시각각 리더십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대권가도의 길을 걸었다. 정 대표도 무사히 ‘이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를 ‘일시 중지’하기로 결론지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의원총회서 민주당 의원들은 대체로 지방선거 전 합당 추진을 중단하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충분한 논의 없이 합당을 띄워 당을 혼란스럽게 하고, 당·청 관계까지 어색해진 만큼 ‘정청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리더십은 타격을 입게 됐다. 더 좁아진 운신의 폭 이날 정 대표는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연 뒤 브리핑에서 “오늘 민주당 긴급 최고위와 함께 지방선거 전에 합당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대신 지방선거 후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연대와 통합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이하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을 결정하고, 혁신당에도 준비위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로서 혁신당과 통합을 제안한 것은 오직 지방선거 승리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한 충정이었다”며 “그러나 통합 제안이 당 안팎에서 많은 우려와 걱정을 가져왔고, 통합을 통한 상승 작용 또한 어려움에 처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자리에서 의원들의 말씀을 경청했고 민주당 지지층 여론조사 지표도 꼼꼼히 살피는 과정에서 더 이상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당 안팎의 여론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을 혼란케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정 대표는 “그동안 통합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국민 여러분과 민주당 당원들, 혁신당 당원들께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당초 이달 13일 입장을 밝히겠다던 혁신당은 날짜를 앞당겨 지난 11일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고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혁신당 조국 대표는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에 동의하며 6월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다. 민주당을 향한 뼈있는 말도 이어졌다. 조 대표가 “선거 후에는 통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내용과 방식에 대한 논의를 책임감 있게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혁신당은 민주당에 흡수되는 방법을 피하고자 했던 만큼 합치는 방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합당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다. 조 대표는 “양당 간 회동이 이뤄지면 먼저 민주당이 제안한 연대가 지방선거에서의 연대인지 아니면 추상적 구호로서의 연대인지 확인해야 한다”며 “지방선거 연대가 맞다면 추진준비위에서 그 원칙과 방법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과정에서 양당은 상호 신뢰와 존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특정 정치인 개인과 계파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국민과 양당 당원께 또다시 실망을 드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동 걸린 민주당-혁신당 합당…다음 복안은? ‘쌍방울 변호인’까지…제대로 꽂힌 ‘2연타’ 조 대표는 정 대표의 사과를 수용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 대표는 “정 대표께서 혁신당 당원에게 표명한 사과를 받아들인다”며 “혁신당 당원은 당으로 향해지는 비방과 모욕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당 박병언 선임대변인도 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단순히 연대라고만 표현했는데 우당 간 레토릭적 연대를 의미하는지, 실질적으로 두 당이 지선을 치러낸다는 선거 연대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민주당의 답변을 요구했다. 앞서 민주당은 합당이 아닌 ‘지선 이후 통합’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민주당의 답변에 따라 향후 당의 대응이 달라질 것으로 풀이된다. 합당 논의가 중지되면서 당이 숨 고르기에 들어가나 싶더니 2차 종합특검으로 추천된 전준철 변호사가 새로운 불씨가 됐다. 민주당이 추천한 전 변호사는 2023년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등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1심 이후 사임했지만, 친명(친 이재명)계에서는 “이재명 죽이기” “제2의 체포동의안 사태” 등 격하게 반발했다. 친청(친 정청래)계로 분류되는 이성윤 최고위원이 전 변호사를 추천하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 변호사는 검사 시절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 한동훈 채널A 사건 등을 담당했다. 이 최고위원은 “(전 변호사가) 윤석열·김건희 수사를 할 때 서슬 퍼런 윤 총장하에서도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수사했다”며 “이번 2차 종합특검의 중요성에 비춰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전 변호사가 김성태 대북 송금 조작 의혹 사건을 변호했고, 그런 변호사를 추천함으로써 마치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처럼 의혹이 확산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정·이 차이는? ‘윤정부에서 탄압을 받은 변호사’를 강조했지만, 민주당을 설득시킬 명분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이번 2차 종합특검 추천 과정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사과했다. 정 대표도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정 대표는 해당 사태를 인사 검증 실패에 따른 ‘사고’로 규정하고 “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책임은 당 대표인 저에게 있다. 대단히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사태는 이 최고위원을 향한 사퇴 압박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인사 사고가 아닌 정청래 체제를 향한 불만이 표면화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무산과 후보자 논란으로 정 대표의 리더십이 2연타를 맞으며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임 가능성도 불투명해졌다. 정 대표는 직접 연임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1인1표제 등 당원의 힘을 강화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며 대권주자로 나서기 위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혁신당과의 합당 이후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다면 공은 정 대표에게 돌아간다. 그 성과를 토대로 대표 연임에 성공한 뒤 차기 대권까지 밟는 이른바 ‘이재명의 길’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여의도가 바라본 이재명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문(친 문재인)계가 민주당을 꽉 쥐던, 시절 그는 한 줌의 계파도 없이 고군분투하며 기득권에 맞섰다. 온건파 사이에서 파격적인 개혁을 앞세워 당원들의 갈증을 해소했고, 이들을 ‘개딸(개혁의 딸)’로 묶어 본격적인 팬덤 정치에 나섰다. 당 대표 시절에는 대선에 출마하려는 대표의 사퇴 시한인 ‘대선 1년 전’에 예외를 두는 내용의 당헌을 바꾸면서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당시 이재명 대표는 자신 있게 뜻을 밀어붙였고 전당대회서 최종 득표율 85.4%로 연임에 성공했다. 리더십 심폐소생 권력의 정점에 선 이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정 대표는 그런 거친 이재명의 길 초입에 들어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이다 화법’으로 지지 세력을 키우는 시도는 이 대통령과 매우 유사하다. 이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던 1인1표제를 정 대표는 해냈다”면서도 “서둘렀던 게 문제다. 합당도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당 대표이던 시절부터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때는 민주당이 야당이었고 윤석열·김건희라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 친명과 비명(비 이재명)이 매일같이 싸워도 봉합할 명분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차이는 측근의 유무다. 이 대통령은 성남시장일 때부터 함께해 온 이른바 ‘성남 라인’이 존재했고, 김현지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장 등 측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며 “친청을 자처하는 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을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김어준·유승민 두 사람이 정 대표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꼽히지만, 그들조차도 자기 정치에 당 대표를 쓰는 느낌이 든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 한 지방선거가 정 대표의 마지막 리더십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지방선거에 사활을 걸어 ‘압승’을 끌어낸다면 무너진 리더십을 다지는 건 물론 8월 전당대회 출마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당장은 정 대표가 타격을 받았지만 선거 국면을 통과하면서 과오가 희석되는 흐름에 기대를 건 셈이다. 민주당은 오는 4월 중순까지 모든 지방선거 공천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경선 규칙과 공천 룰 등을 두고 계파 간 갈등이 재점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권력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한 정치권 관계자의 말처럼 반대 여론을 찬성 여론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리더십이 판가름 난다. 시계를 돌려 2024년 4월, 이 대통령 역시 당 대표이던 시절 공천 시즌을 앞두고 ‘비명횡사’ 논란에 휩싸였다. 현역 의원 의정평가 하위 20% 통보를 박은 이는 6명으로 모두 비명계였던 만큼 의원들 대다수가 ‘친명’을 내세워 마케팅을 이어갔다. 이, 비주류서 180석 야당 대표로 지선 앞둔 대표님의 큰 그림은? 공천 갈등은 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민주당이 패배했던 2012년 총선이 되풀이될 것이란 당내 우려가 커졌다.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사퇴 요구에 이 대표는 “툭 하면 사퇴 요구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사퇴하면 1년 내내 대표를 바꿔야 한다”며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명과 비명 간의 갈등은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진통”으로 진단했다. 이 대표의 리더십이 총선의 최대 걸림돌로 여겨졌지만, 180석 공룡 야당을 탄생시키면서 여론을 뒤집었다. 정 대표 역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합당 논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지방선거 승리에 올인하겠다”며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습 행동으로 당을 흔들지 종잡을 수 없어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는 것이 지방선거를 앞둔 첫 번째 과제로 여겨진다. 정 대표는 ‘억울한 컷오프를 최소화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11일에는 “공천 과정 전반의 불공정·불합리한 사례를 사전에 점검해 신뢰받는 공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겠다”며 공천신문고 구성 안건을 의결했다. 이날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이 합당 과정에 여러 가지 내홍을 겪고 걱정을 끼쳐드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 일은 빈틈없이 해왔다”며 “민주당은 공정한 경선을 통한 공천, 투명한 공천이 지방선거 승리의 요체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당 대표의 이 같은 의지가 (공천신문고) 제도를 통해서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이재명 모델’로 노선을 잡았지만 ‘제2의 ○○○’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선을 앞두고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은 이 대통령의 ‘중도 보수’ 전략까지 정 대표가 따라 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권교체에 손을 들어줬다. 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 즈음이면 정권 유지든 교체든 국민의 마음속에 새로운 잣대가 세워질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좌우 통합을 이뤄낼 지도자를 원할지, 지금보다 조금 더 강경한 지도자를 원할지는 현 정부에 달려 있다. 그 시대에 맞는, 또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될 것”이라고 봤다. 신선한 뉴페이스? 이어 “이 대통령은 후임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의 민주당은 당 대표도, 차기 대권주자도 ‘포스트 이재명’이 아닌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며 “이 대통령의 행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그림자에만 메어서는 민주당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여야 갈등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설을 앞두고 민생 회복과 국정 안정을 위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대표를 오찬에 초대했지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불참을 통보했다. 장 대표는 “(이번 회동이) 부부 싸움하고 둘이 화해하겠다고 옆집 아저씨 불러놓는 꼴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오늘 회동에 가면 여야 합치를 위해 무슨 반찬을 내놨고, 쌀에 무슨 잡곡을 섞었고 그런 것들로 오늘 뉴스를 다 덮으려 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무너지는 소리를 덮기 위해 여야 대표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으로 모든 걸 다 덮으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밤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재판소원법’과 ‘대법관증원법’이 국민의힘 반발 속에 여당의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정청래 대표는 SNS를 통해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힘의 작태에 경악한다”며 “본인이 요청할 때는 언제고 약속 시간 직전에 이 무슨 결례인가. 국민의힘, 정말 ‘노답(답이 없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청와대도 “이번 회동은 국정 현안에 대한 소통과 협치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데 깊은 아쉬움을 전했다”고 밝혔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