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다사다난 견미리

이승기 장모의 굴곡진 사생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탤런트 이승기와 이다인의 결혼으로 다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중견 탤런트이자 이승기 장모가 된 견미리로 그는 데뷔 40년을 바라보고 있다. 사극과 연속극 등 작품을 가리지 않고 최근까지 왕성히 활동 중이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인이 아닌 주변 인물로 인해 논란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안타까운 과거도 언급되고 있다.

이승기와 이다인은 지난 7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다인은 견미리의 차녀로, 이승기와 결혼 소식이 전해진 후 견미리의 남편 이홍헌씨가 과거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됐다는 의혹이 재점화되기도 했다.

어쩌다
배우로

견미리는 학창시절부터 ‘예술인’의 길을 걸어왔다. ‘연예계 엘리트 코스’의 정석, 예고-예대를 졸업해 데뷔했다. 견미리는 1983년 서울국악예술고를 졸업해 세종대 무용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지인을 대신해 MBC 탤런트 시험에 지원했고, 이듬해 MBC 공채 17기 탤런트로 합격했다.

이후 2년간 트레이닝을 거쳐 1986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풍란>에서 주인공 정난정의 몸종역으로 데뷔한 견미리는 현대극과 사극을 오가며 다양한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났다. <무동이네 집>(1992), <LA아리랑>(1996), <이브의 모든 것>(2000)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고전적인 미모 덕분에 사극에서 더 큰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겨울연가>와 더불어 최초의 K콘텐츠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MBC 드라마 <대장금>(2004)의 최상궁 역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도 MBC<‘주몽>(2007), <이산>(2008), <구암허준>(2013) 등 여러 사극에 출연했다.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 시작과 함께 견미리는 1987년 4월 동료 탤런트 임영규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1993년 이혼을 하게 됐다. 이후 임영규는 한 방송에 출연해 “알뜰살뜰했던 견미리에 비해 나는 돈 씀씀이가 헤펐다. 그 때문에 아내와 많이 싸웠다”고 밝혔다.

이어 “아내는 남대문시장에서만 옷을 사 입었지만 나는 백화점의 고급 옷만 사 입었다. 사치가 심했다”고 했다.

임영규는 견미리와 이혼 후 아버지가 물려준 서울 강남의 165억원 건물 등의 유산을 갖고 미국으로 떠났고, 방탕한 생활과 사업 실패로 2년 반 만에 재산을 모두 날렸다. 공허함을 잊기 위해 마시던 술로 인해 알코올성 치매마저 얻었다.

또 임영규는 폭행 사건, 기물 파손, 사기 혐의 등 꾸준한 사건 사고로 현재 전과 9범으로 알려졌다. 2008년에는 택시 기사에게 욕을 하고 때린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2013년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술값 60만원을 내지 않아 체포됐다.

2014년에는 택시비를 내지 않아 경범죄 처벌법상 무임승차 혐의로 즉결 심판에 넘겨졌다. 2015년에도 서울 강남의 한 포장마차서 난동을 부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드라마 속 배우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저 술은 진짜 술일까? 물일까?’라는 생각하기도 한다. 23년 전에는 진짜 술로 연기를 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존재한다. 1992년 MBC <동쪽으로 난 창>에서 독신을 고집하는 커리어우먼 정주 역을 맡은 견미리는, 술 마시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실제로 만취한 적이 있다.


당시 견미리는 “첫 녹화가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었는데, NG와 재촬영이 거듭되면서 빈속에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 취해버리는 바람에 그날 다른 장면 녹화가 취소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8월 ‘행복한 여자’라는 음반을 발매하며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후 아이돌 가수가 대거 출연하는 프로그램인 KBS <뮤직뱅크>, MBC <음악중심> 등에도 출연했다. 견미리가 가수로 데뷔한 데에는 태진아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평소 견미리의 음색을 높이 평가했던 태진아는 견미리에게 음반을 낼 것을 적극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수’ 견미리의 무대를 지켜본 태진아는 “드라마서 마치 가수 역할을 연기하듯 견미리는 무대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훌륭하게 소화해냈다”고 극찬했다.

학창 시절부터 연예계 엘리트 코스 정주행
연속극부터 사극까지 작품 가리지 않고 섭렵

검소한 습관 덕일까? 견미리는 코스닥 상장사인 보타바이오의 대주주로 등장해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당시 견미리의 보유 주식 평가액은 54억2000만원이었다. 이와 동시에 견미리의 딸 이유비의 주식 평가액도 3억3000만원을 기록해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견미리의 히스토리를 논하자면 딸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견미리의 첫째 딸 이유비는 이유비는 SBS 토크쇼 <화신>에 출연해 “‘엄마 덕에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는 얘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은 바 있다.

이 자리서 이유비는 “‘엄마가 배우니까 너도 배우하면 되겠다’”는 말이 너무 싫어 오히려 배우의 꿈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면서 “학창시절 엄마가 시험지를 빼돌려줬다는 소문에 휩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소문을 마냥 피하기만 하면 안 되겠다고 느껴 ‘견미리가 대통령이냐! 시험지를 빼돌려?’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견미리의 둘째 딸 이다인은 성격이 사뭇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다인은 화가 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견미리의 딸’이기 때문에 항상 참았다고 한다. 혹시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친구들에게 “힘들다”며 고민을 털어놔도 친구들은 “네가 복에 겨워서 배부른 소리 하는 거야. 너보다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답했다고 한다.

몇몇 정치인이 연예인을 후원한다는 얘기는 많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2014년 3월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한 ‘2014년도 국회의원 후원회 후원금 모금액’ 자료에 따르면 견미리는 지난해 김진태 당시 새누리당 의원에게 개인 후원 한도액인 500만원을 후원했다. 견미리와 김 의원은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견미리의 남편인 이홍헌 전 파미셀 회장이 김 의원과 동향 친구라는 이유로 후원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다인은 이승기와 지난 7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해당 호텔은 예식 비용만 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기가 직접 결혼을 발표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승기와 이다인의 결혼은 이미 업계서 예상돼왔다.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극도로 민감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기가 직접 쓴 편지로 먼저 결혼 소식을 알린 것이다.


이승기와 이다인은 2021년 5월 열애를 인정한 뒤 공개 열애를 이어왔으나 몇 차례 결별설에 휩싸였다. 침묵을 지켜오던 이승기는 지난해 6월 열애와 관련해 말을 아꼈던 이유를 설명했다.

임영규와 이혼
이홍헌과 재혼

이승기는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여러 소란 속에서 말을 아낀 점은 감정적 말들로 인해 생각하는 것들이 명확하게 전해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우리만의 소통과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나가 2차적 소문으로 왜곡돼 더 많은 이들이 상처받을 것과 누군가에겐 또 다른 가십거리로 이용되는 것이 우려됐다”고 말했다.

이승기가 침묵한 배경에는 이다인과의 열애가 일부 팬으로부터의 반발을 샀던 것도 포함된다. 이승기의 일부 팬은 이다인의 부친이 과거 주가조작에 연루됐던 이력을 언급하며 트럭 시위를 벌였다. 이승기와 이다인이 이미 결혼 전부터 경제적 공동체로 올라섰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기자 출신 유튜버 이진호에 따르면 이승기는 2020년 말 약 56억3500만원에 서울 성북동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이승기가 자신의 1인 기획사인 휴먼메이드 사업장으로 쓸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승기와 이다인의 열애설이 2021년 5월 세간에 알려졌고 당시 이승기 1인 소속사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이승기는 후크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했다. 이후 해당 건물은 새로운 업체의 사업장으로 등기됐고 해당 업체의 사내이사에는 이다인이 등기됐다.


이 같은 사실은 이승기와 이다인의 결혼설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승기는 지난해 후크엔터테인먼트와의 분쟁을 개시했고 현재 진행형이다. 이승기가 ‘데뷔 이후 음원 사용료를 한 푼도 정산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전속계약 해지를 요구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승기는 후크엔터테인먼트 권진영 대표를 비롯해 전·현직 임원을 업무상 횡령과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후크엔터테인먼트는 이후 이승기에게 미정산금 지연 이자 등을 명목으로 약 54억원을 지급했다. 이승기는 지난해 12월 1인 기획사 휴먼메이드와 새 출발을 알렸다. 이와 함께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 20억원 기부 소식을 동시에 알리기도 했다.

이전부터 이다인과 경제적 공동 관계를 맺어온 이승기의 향후 행보에도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견미리는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져 있다.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견미리의 자택은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의 6층 규모 단독 주택으로 시세는 90억원 이상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화장품 사업으로 약 4300억원에 달하는 판매량을 올렸고 2015년 폐지 위기에 놓인 제 바이오 회사를 12억원에 사들여 121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견미리는 이 전 회장과 재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2011년 주가조작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복역한 뒤 2014년 가석방됐고, 2014년 10월부터 견미리가 대주주인 코스닥 상장사의 주가를 부풀린 후 주식을 매각해 40억원에 달하는 부당 이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왜 이리
욕먹나?

1심서 징역 4년의 실형과 벌금 25억원을 선고받은 이 전 회장은 기나긴 항소심 끝에 혐의를 벗게 됐다. 앞서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부장판사 고종영)는 주가조작 피해를 주장하는 김모씨 외 7명이 이 전 회장 외 4명을 상대로 낸 10억8000여만원의 손해배상소송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김씨 등은 이 전 회장 등이 허위 공시를 하고, 증권투자 방송을 통해 회원들에게 주식에 관한 풍문을 유포해 적극 매수하게 함으로써 주가조작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김씨 등은 “이 전 회장 등의 위법행위로 A사의 주식을 매수했다가 주가가 하락하는 손해를 입게 됐다”며 이 전 회장을 포함해 A사와 증권 방송인 B씨, 증권 방송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조사 결과 증권 방송인 B씨 등은 2015년부터 다음 해까지 증권방송을 하면서 회원들에게 방송 및 문자메시지로 A사 주식에 관해 정보를 제공하고 매수를 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보다 앞서 이 전 회장 등은 A사 주가를 부풀려 주식을 고가에 매각해 23억7000만원 상당의 차익을 남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당시 검찰은 이 전 회장 등이 견미리와 홍콩계 자본이 A사 유상증자에 참여한다는 등 호재성 내용을 허위로 공시해 주가를 부풀렸다고 의심했다.

이 사건 1심은 “다수의 선량한 투자자에게 손실을 입혀 시장 신뢰를 훼손한다”고 이 전 회장에게 징역 4년에 벌금 25억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수사기관의 선입견이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민사소송서도 재판부는 이 전 회장 등의 허위 공시와 풍문 유포가 위계를 사용해 주가를 조작한 것이라고 인정할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 전 회장 등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공시 내용이 당시 이사회 결의 내용에 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대체로 객관적 사실에 부합한다”며 “공시 자체는 진실했으나 사후에 일부 증자참여자가 의사를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고 허위 공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방송 및 문자메시지는 거의 모두 B씨의 주가 전망에 대한 예측이나 단순한 개인적 의견, 주식거래 동향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며 “전체적으로 투자자들의 투자 판단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허위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풍문 유포도 아니라고 봤다.

차녀 이다인·이승기 2년 열애 끝 결혼
재혼 남편 주가조작 사건으로 시끌시끌

이 때문인지 견미리와 두 딸 이유비, 이다인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현재 살고 이는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총 6층의 어마어마한 단독주택이 이 전 회장이 주가조작을 통해 벌어들인 시세 차익으로 누리는 호화라는 비난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견미리는 주가조작 혐의와 관련된 사실을 부인하며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견미리는 법무법인을 통해 주가조작 다단계 사건과 관련된 의혹은 자신의 가족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법무법인 대호는 “견미리 부부는 다단계 사기 사건 제이유의 엄연한 피해자이며, 제이유 관계자가 벌인 루보 주가조작 사건에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견미리 남편이 코어비트의 유상증자 대금 266억원을 가져가서 이를 개인의 부채상환에 썼다는 보도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어 “견미리 남편은 5억원을 대여받은 적은 있으나, 그 5억원은 몇 달 후 변제해 결과적으로 코어비트의 돈을 가져가서 본인의 부를 축적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다. 한남동 주택을 범죄 수익으로 마련했고, 가족들은 그 돈으로 죄책감 없이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보도도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견미리 측은 “해당 주택은 2006년 말 견미리가 토지를 매수해 지었고 주택의 자금 출처는 당시 견미리의 30여년간 배우 활동으로 발생한 소득”이라고 강조했다.

견미리는 tvN 새 드라마 <판도라: 조작된 낙원>으로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2020년 <편의점 샛별이>에 출연 후 3년 만의 차기작이다. 이지아 주연의 <판도라: 조작된 낙원>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인생을 사는 여성이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멋대로 조작한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펼치는 복수극이다.

<원더우먼>, <굿캐스팅> 등에서 유쾌하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최영훈 감독과 시청률 보증수표 김순옥 사단의 현지민 작가가 손을 잡은 작품이다. 여기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펜트하우스>를 비롯해 <황후의 품격> <아내의 유혹> 등을 집필한 김순옥 작가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해 캐스팅된 배우들은 김순옥 사단으로 불린다.

견미리는 차분하고 냉정한 안목으로 안살림을 챙기는 금조그룹 안주인 ‘민영휘’ 캐릭터에 캐스팅됐다.

이유비는 SBS 새 드라마 <7인의 탈출>로 복귀를 준비 중이다. <7인의 탈출>은 수많은 거짓과 욕망이 뒤엉켜 사라진 한 소녀의 실종에 연루된 7인이 엄청난 사건을 맞닥뜨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극중 이유비는 교내 스타이자 아이돌 지망생, 눈부신 미모와 부유한 집안, 뛰어난 재능까지 갖춘 친구들의 워너비 한모네 역을 맡아 기존의 통통 튀는 연기를 보여줄 예정이다.

남편 의혹 해소?
딸은 행복 시작?

한모네의 치명적인 약점은 거짓말로 언젠가부터 꼬이기 시작하는 거짓된 삶을 사는 역할로 갈등을 겪는다. 역시 김순옥 작가의 작품으로 <펜트하우스>에 출연했던 엄기준, 신은경, 윤종훈이 캐스팅됐고, 황정음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다인은 MBC 새 드라마 <연인>으로 안방극장 복귀를 앞두고 있다. 남궁민, 안은진 주연의 <연인>은 병자호란의 병화 속으로 던져진 연인, 그들이 몹시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서브 주연을 맡은 이다인으로는 2020년 <앨리스> 이후 3년 만의 복귀작이다. 무엇보다 이승기와 4월 결혼식 이후 유부녀로 연기하는 첫 작품이 될 예정이어서 남다른 의미를 두고 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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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 전 국방부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