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 못 잡는’ 학폭 공소시효의 한계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3.20 14:36:19
  • 호수 14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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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힘 있는 놈들의 나라”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학교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성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하지만 어떤 학생에게 학교는 ‘폭력’의 장소다. 학교폭력을 당한 이들은 스스로를 ‘생존자’라고 부른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6일 16개 시도교육감이 초·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피해 응답률은 1.7%인 5만4000명으로 2021년에 비해 0.6%p 증가했다. 학급별로는 ▲초등학교 3.8% ▲중학교 0.9% ▲고등학교 0.3%로 나타나, 모든 학교서 학교폭력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피해 유형별 응답 비중은 언어폭력(41.8%), 신체폭력(14.6%), 집단따돌림(13.3%) 순이었다.

드라마
한 편으로…

과거에는 학교폭력 심각성이 조명되지 않았으며 가해자 처벌 수위도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피해자를 두고 “당한 사람이 잘못” “당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 “철없는 애들끼리 장난친 것” 등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2020년대부터는 학교폭력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범죄’라는 인식이 자리 잡혔다. 특히 최근 넷플릭스서 방영한 드라마 <더 글로리>가 큰 인기를 끌어 학교폭력 심각성을 다시 인지시켰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 학교폭력이나 그에 준하는 따돌림으로 피해자 자존감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심각한 경우는 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자해 내지는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심한 폭행을 당한 경우 영구적인 장애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의 질병으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 비해 가해자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몇몇 가해자는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빌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정부는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해당 법 제20조(학교폭력의 신고 의무)에는 ‘학교폭력 현장을 보거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자는 학교 등 관계 기관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 ‘신고받은 기관은 가해 학생 및 피해 학생 보호자와 소속 학교장에게 통보해야 한다’고 기재돼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신고를 하는 것도, 부모에게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알리기도 어렵다. 신고 후 2차 가해가 있을 수도 있고, 신고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촉법소년 연령 기준으로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다.

학교생활 내내 끔찍했던 폭력 피해
고소장 접수했지만…공소시효 8개월

이런 상황이 복잡하게 작용해 학교폭력 피해자는 성인이 된 후 가해자를 상대로 학교폭력 고소장을 접수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사건 공소시효가 임박했거나 지난 상황이 많다.

부산서 미용실을 운영 중인 A씨는 학교폭력 피해자다. A씨는 초‧중‧고등학교를 경남의 한 지역에서 다녔고 12년 동안 학교폭력을 당했다. A씨는 자신을 ‘생존자’라고 부른다.

A씨는 현재 학교폭력 후유증으로 ▲대인관계 형성 어려움 ▲불안장애 ▲불면증 ▲우울증 등으로 정신과에서 1년간 치료 중이다. 게다가 현재까지 알 수 없는 복통을 앓고 있다. 학교폭력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전 기간 동안 당했다. 종류는 ▲집단따돌림 ▲폭행 ▲특수폭행 ▲상해 ▲특수상해 ▲모욕 ▲갈취 등이다. 


A씨는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돼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며 자신이 당한 학교폭력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 설명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 때부터 A씨는 집단따돌림을 받았다. 같은 반 남학생 친구는 A씨를 교실의 초록색 칠판 가운데 데려다 놓고 발로 찼다. A씨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는 폭력이 멈추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A씨를 향해 지우개, 연필, 볼펜, 교과서, 의자 등을 던졌고 A씨의 교과서와 실내화를 화장실 변기통에 집어넣었다. 어떤 날은 실내화 안에 압정을 넣어서 실내화를 신다가 발을 다쳤다.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A씨 어머니는 A씨가 학교폭력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눈치채 A씨를 인근에 있는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 조치했다.

총 12년
“생존자”

전학으로 끝날 줄 알았던 학폭이었으나 이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전학 간 곳의 친구들은 A씨를 두고 “얘, ○○초등학교에서 왕따당해서 전학해온 거래. 더럽고 냄새가 난다”며 욕설과 구타를 수차례 가했다. 무리 지어서 노는 애들은 A씨를 두고 “○○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근처에 A씨가 있으면 일부로 어깨를 강하게 밀쳤고, 체육시간에는 A씨 머리 위로 모래를 뿌리거나 돌을 던졌다. 같은 반 아이 중 한 명은 A씨 어머니를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얼굴의 붉은 점을 보고 “다리미로 지졌다. 병○ 아니냐”며 모욕적인 발언을 이어나갔다.

남학생은 A씨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A씨가 지나가면 때리려는 행동을 취했다.

학교폭력은 중학교 입학 후 더 심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괴롭혔던 아이들이 그대로 중학교로 갔던 탓이다. 그들은 A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갔고, 샤프로 A씨의 몸을 찌르는 등 폭행을 일삼았다. 한 번 폭행을 시작하면 10분 이상 지속됐고, 교과서를 찢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체육복과 교과서를 훔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로 A씨를 끌고 가 변기에 A씨의 얼굴을 넣으려고도 했다. 같은 반 학생은 47명으로 직접 괴롭히진 않았지만 A씨를 피했다. A씨가 같은 반 아이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면 “쟤, 왕따다”고 말해 훼방을 놨다.

이동 수업 중 쉬는 시간에는 화장품을 A씨 머리 위에 붓고 분무기를 머리에 뿌렸다. 선생님이 오자 A씨의 머리를 털어주는 척 화장실에 데려갔다. 화장실에서는 다시 A씨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머리와 배, 다리, 등 위주로 여러 차례 폭행했다.

보호 뒷전
무방비 노출


이때부터 A씨는 학교를 벗어나기 위해 제과제빵 학원에 다녔다.

고등학교서도 학교폭력은 지속됐다. 고등학생 때는 같은 반 아이가 수업 중 A씨를 복도로 불러내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겁이 났던 A씨는 야간자율학습과 방과후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5교시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다른 지역 미용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땄다. 대회가 있으면 무조건 참가해 상을 받았다. A씨에게 미용은 학교서 도망치는 수단이었다. 

미용은 꿈이 아니라 생존수단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서 새벽 2시까지 연습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폭력 수위가 높아졌다. 같은 반 아이 한 명은 A씨의 자물쇠 다이어리를 갈취해 교실에서 큰 소리로 내용을 읽었다. A씨가 하지 말라고 말리자, 욕을 하며 A씨의 머리채를 잡았고 다이어리 모서리 부분으로 A씨 어깨 쇄골 부분을 2차례 가격했다. 그리곤 다이어리를 던진 뒤 뺨을 때리고 무릎으로 A씨 배를 올려 찼다.

A씨는 가해자를 상대로 현재 특수상해죄로 고소장을 접수해 수사가 진행 중이다. 문제는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5월과 11월이라는 점이다. 그전에 있었던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


경찰 신고해도 막을 수 없는 가해자
“잔혹성은 나이를 가리지 않아” 지적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B양은 지난해 4월, 한 학년 위 선배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했다. 그 선배는 B양이 다니던 학원에 장애가 아이를 향해 신체 비하 발언을 했고, 지나다니며 치거나, 욕을 했다. 선배는 계속해서 욕하면서 길을 막았다.

B양이 지나가다가 선배 얼굴에 오른쪽 팔 옷이 스쳤다. 순간 선배는 “너 애미가 그렇게 가르쳐서 행동이 그렇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놀라 관리자에게 말했고, 가해자에게 사과하라고 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B양을 보면 “죽여버린다. 한쪽 팔이 없어져야 한다”고 협박했다. 하원 후 가해자는 B양을 따라와 팔을 때리며 “집에 가서 말하면 죽는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했다.

가해자는 B양의 집까지 찾아와 유리창에 돌을 던져 금이 가게 했다. B양 부모가 학교에 해당 사실을 전달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경찰서에 신고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학교폭력 피해자는 무방비하게 폭력 상황에 노출된다. 부모가 직접 나서도 피해를 막기 힘들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학교폭력에만 ▲공소시효 폐지 ▲촉법소년 폐지 ▲무죄추정의 원칙에서 피해자 입장 중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가해자로부터 피해자 완벽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학교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공간에 만날 수밖에 없는 것 ▲피해자가 학생일 때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움 등의 공통점 때문에, 일반 사건과 동일한 법을 적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다.

이제 와서?
반성은커녕…

A씨는 “학교폭력의 잔혹성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생 때 당한 학교폭력이 가장 최근이지만, 기억은 초등학생 때 겪은 학교폭력이 가장 선명하다. 제발 어리다고 법의 잣대를 피해 가지 않길 바란다. 내가 겪은 사건은 8~9년 지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소시효가 지났는데, 그 당시 가해자는 반성은커녕 ‘기억이 안 난다’ ‘지어내지 말라’ ‘스토커 신고하겠다’고 말한다. 이건 가해자의 부모도 마찬가지”라며 “나는 재난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재난에는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내 아이가 학교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달라. 사람이 만든 재난은, 사람이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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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