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대담> 헌정회장 출사표 던진 정대철 전 대표

“나라꼴이 어쩌다…정계 원로들이 나설 때”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 노무현 전 대통령과 형·동생하던 사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서운한 게 있다면 대화로 풀어가던 소위 말하는 ‘인싸’ 정치인.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를 대변하는 수식어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헌정회(이하 헌정회) 회장에 자신 있게 출사표를 던졌다. 

“정치는 Agree to disagree다.”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게 진정한 정치라는 뜻이다.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조정, 타협해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대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헌정회장 후보)가 세워온 ‘정치 모토’다. 지금으로부터 약 46년 전, 정치권에 발을 들인 뒤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정치원로로 불린다.

‘그만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목표가 남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념을 이어나가기 위해 대한민국헌정회장에 도전한다. <일요시사>는 최근 정 후보와 만난 자리서 정치의 정의, 헌정회장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이유, 여야의 대립 해결법 등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강연이나 강의를 자주 나간다. 과거보다 더 바쁜 나날을 소화 중이다. (강연·강의는)20년 전부터 해온 일이다. 최근에는 교황의 남북 방문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거의 성사됐다. 교황이 우리나라에 먼저 방문했다가 육로로 평양 방문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를 위해 남북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에서는 10년이 넘게 통일시민포럼도 매달 연다. 또 꾸준히 해오던 교정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50개가 넘는 교도소가 있는데 이 중 서울구치소를 정기적으로 찾고 있다. 


-정대철이라는 정치인에게는 선친과 선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영향을 받았나?

▲선친인 정일형 박사의 인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평가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항일투사로,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인물로 평생을 올곧게 살아오셨다. 선친은 개인의 평안함이나 가정의 부유함을 추구하신 분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엇이 옳은지, 정의로운 게 무엇인지 헤아리던 분이다. 이 부분은 자식으로서 상당히 존경한다. 

선비께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선친께서 21번 체포됐었는데, 옥바라지는 물론 자식 양육까지 혼자 다 감당했다. 누비이불을 가위로 잘라서 생계를 이어가셨다. 많은 고생 탓에 손가락이 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밖으로 크게 휘었다.

그러나 선비께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까지 하셨다. 선비께서는 내게 늘 인간적인 정, 겸손을 가르치셨다. 이 부분이 내 정치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이다. 

-이 같은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오랜 기간 몸담아왔다. 가장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과거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승리해 정권을 재창출을 견인했던 기억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 부분 중 하나지만, 16대 대선이 좀 더 다이내믹하고, 극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대선 직전 정몽준 전 의원이 지지를 철회했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정 전 의원을 찾으러 다녔었다. 그러다가 내가 노 전 대통령을 태워 정 전 의원 집을 방문했는데,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발길을 돌렸던 기억도 난다. 간곡한 모습을 보이는 게 필요했다. 순간적인 판단력이 발휘됐던 거다. 

정치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전직 대통령 감옥 보내는 일 멈춰야 

-김 전 대통령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정치철학은 용서와 화해였다. 그러나 최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국가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남아프리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떠오른다. 당시 미국은 아파르테헤이트(Apartheid)라는 흑백 분리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학교 교실부터 교통시설,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로 사용하게 했다.

상당히 모욕적인 정책이었던 셈이다. 넬슨 대통령은 당선 후 오히려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설립해, 백인이 흑인을 탄압한 사항을 신고만으로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전 대통령도 비슷하다. 자신을 희생시키려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맏딸인 박근혜 당시 의원을 만났다. 또 전두환을 직접 만나 용서와 화해의 집권 경험을 들었다. 내게 사법적 판단할 권리는 없지만, 최근에는 전 정부와 현재 정부의 대립이 심하다.

잘한 일은 승계하고, 잘못된 일은 반면교사 삼고 국가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전직 대통령이 감옥 가는 상황이 더는 벌어지지 않고,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말씀과 신념을 새긴 뒤, 오랜 기간 정치권에 몸담았다. 이제 정치원로가 됐는데, 정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통상적으로 정치는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활동이다. 즉 좀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행위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로 간에 대립이 일어난다. 결국 민주사회에서 정치는 ‘Agree to disagree’ 서로 다르다는 인정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갈등과 모순이 줄어든다. 

그러나 서로 다르다 보니 모순과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부분을 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극복하고 해결해나가야 한다. 정치는 권력을 정당한 방법(투표)으로 획득한다는 것을 모두 안다. 권력이라는 희소가치를 남용하지 않고, 정당하고 공정하게 배분할 필요가 있다.

-여야도 마찬가지다. 대화 자체가 단절된 모양새다. 일각에선 정치가 발전은커녕 퇴보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는데… 


▲과거엔 여야 간 대화가 더욱 활발했다. 여야 의원들이 만나 정말 대화를 많이 했었다. 결국 정치는 협치와 상생이 필요하다. 한 발도 아니고 반 발자국만 물러나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 결과에 대한 책임은 대통령이 지게 돼있는 만큼 제일 노력해야 할 모습을 보일 사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경험이 없다. 이런 점에서 정치 선배, 자문기관을 통해서 정치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하길 바란다. 최근 국민의힘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준석 전 대표, 나경원 전 대표, 안철수 의원을 발로 걷어차는 인상을 국민에게 줬다.

이 전 대표는 대선서 일정한 역할을 했고, 나 전 대표도 정치적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안 의원은 지난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정권교체에 도움을 줬던 인물이다. 충분히 포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여야 반 발자국만 물러나자”
민주당 선당후사 정신 필요

-윤 대통령 옆에는 이른바 윤핵관 세력이 있다

▲윤핵관은 권력을 직접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눈에 덜 띄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비교적 적은 정치원로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다만 윤 대통령 경험이 쌓이면 잘 헤쳐나가리라 믿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만 일해야 한다. 


-민주당 상황도 녹록지 않다. 국민의힘에게 지지율을 추월당했는데…

▲헌정회장은 당적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민주당을 탈당한 상태다. 민주당에도 문제는 있다. 윤 대통령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만한 행동을 못 하면 상대적으로 민주당 지지율이 올라가야 정상이다. 그러나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심지어는 국민의힘과 지지율이12%p까지 차이가 난 적도 있었다. 민주당이 지지율을 회복하려면 선당후사의 정신이 필요하다. 당은 이재명 대표 개인 문제를 떠나서 당의 발전과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에 힘을 실어야 한다.

자꾸 이 대표 보호에만 빠져 있을 경우, 국민들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지금부터라도 국민적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개인 문제는 개인 문제대로, 당은 당대로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국회 체포동의안에 당이 몰입돼있으면 정신 못 차린 정당으로밖에 볼 수 없다. 위기는 늘 기회다. 경제, 외교, 민생 등 산적해 있는 대국민적 문제가 많다. 혹여 당이 죽으면 당 대표도 죽는다. 

-국민의힘 측과는 어떤 소통을 하나?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난 적 있는데 당시 이 대표를 만나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윤 대통령도 이 대표를 만나지 않고 있고, 국민의힘도 그렇다. 상당히 잘못됐다. 1년째 정치가 멍하니 흘러갔다. 

-조금은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내년 총선 결과를 전망한다면? 

▲비행기는 양 날개로 중심을 잡고 날아간다. 정치도 비행기의 양 날개처럼 균형이 잡혀야 제대로 비행하는 법이다. 한쪽으로 쏠리면 균형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총선을 전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지만,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 어느 쪽이든 국민감정에 어긋나버리면 그 당은 패배하는 게 자명하다. 

“독불장군 있어선 안 된다”
현실 정치에 가감 없이 조언

-헌정회장 출마를 결심한 이유와 포부를 밝혀달라

▲헌정회장은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원로 기관으로서 현직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에 대한 극단의 대결구도를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치 선배로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유도하는 일은 당연하다. 주변서 출마 권유를 상당히 많이 받아 결국 출마를 결심했다. 

전·현직 국회의원의 모임인 만큼 국가의 원로 집단으로 봐도 무방하다. 지금까지는 그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원로 모임단체로서 국가 발전에 대한 지혜를 나눠야 한다. 출마한 이유도 국가 원로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헌정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나?

▲헌정회원으로서 평소 느낀 점을 이번에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헌정회의 위상을 제고시켜야 한다. 헌정회는 회원 스스로를 위하는 단체다. 정치 원로로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더라도 현실 여야 정치인에게 가감없이 조언할 수 있는 단체가 돼야 한다. 

국가 원로라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대통령과 국회의장, 여야 지도부 등을 두루 만나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 국가 지도자나 정치인이 국민을 걱정해야 하며, 국민들이 정치를 걱정해선 안 된다. 

-내세우는 공약을 알려달라

▲국민은 퇴직한 국회의원이면 마냥 잘 산다고 생각하지만, 식권을 타러오는 사람도 더러 있다. 헌정회원의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회의원 공제회를 만들 계획이다. 국민 세금만 자꾸 축내는 모습은 국가 원로 처지에선 민망할 만한 사안이다. 세금으로만 유지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회의원 공제회를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단체가 되도록 하는 게 목표다. 

특히 정계 은퇴 후 현실정치서 물러난 이들의 후생 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군인공제회와 비슷한 개념이다. 군인공제회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미 헌정회에는 국민 세금 70억원이 투입된다. 공제 시스템을 도입하면 퇴직한 의원의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고, 수입을 올려 장학사업까지 할 수 있는 이점이 존재한다. 

-여야 원로에게 동시 지지를 받고 있다. 이유에 대해 분석해본다면?

▲정치에는 독불장군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정치는 함께해나가는 것이다. 가두리 양식장 같은 정치는 결국 필패의 길이다. 내 정치 역정을 되돌아봤을 때 우리의 세력만으로, 우리 지지자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해오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여야 원로들이 동시에 지지해준 게 아닌가 싶다. 정치인으로 살면서 항상 상대를 존중해왔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어의 몸이 됐을 때도 안부 편지를 보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중도통합의 정치를 해와서 특별히 척을 진 정치인이나 정치단체도 없다. 요즘 말로 인싸였다. 정치라는 환경에 늘 살아왔지만, 불철주야 수많은 곳을 찾아 희망을 이야기하는 모습과 교도소 교정위원으로 활동한 모습에 점수를 많이 얻는 게 아닌가 싶다. 

-정치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정치를 논할 때는 시대적 소명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대의 정치적 소명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더욱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만들겠다. 전두환이 물러난 이후 민주화하는 데 좋은 과정을 겪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더욱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인 건가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시켜 양극화를 함께 극복하고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GDP는 세계 10위다. 아프리카 55개국 GDP 합산(2020년 기준)과 같다. 그러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추세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극복해내겠다.

마지막으로는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나아가 평화적 통일을 이뤄내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시대적 소명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원로정치인로서 맡은 역할을 해나가겠다. 나의 정치 역정의 마지막 목표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헌정사상 최초 3대가 국회의원

고 정일형 박사, 정대철 헌정회장 후보, 새정치민주연합 정호준 전 의원은 3대가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유일무이한 일이다. 

정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광복운동을 했고, 광복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힘을 쏟았다.

아들인 정 후보 역시 5선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까지 지냈다.

손자 정 전 의원은 19대 총선서 당선됐다. <차>

[정대철은?]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문제특별위원장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9·10·13·14·16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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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