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승부수 던진 나경원

윤, 또 골치 아프게 생겼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결국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을 따라갈까? 당권주자들은 총선 전략보다도 자신이 가진 윤심의 크기를 앞세운다. 여당은 윤심 반영을 위해 룰 변경마저 불사했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다. ‘민심’을 넘으니 ‘당심’이 윤심을 막아섰다. 일찍이 정리한 줄 알았던 나경원 전 의원이 줄곧 당심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나 전 의원은 숱한 견제에도 출마를 강행할 분위기다. 친윤(친 윤석열)계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의 당 대표 출마설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나 전 의원은 국민의힘에 비대위 체제가 들어선 직후 스스로 당권 도전을 시사한 바 있다. 아울러 지난해부터 실시된 당권주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줄곧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판사 출신
보수 중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반윤(반 윤석열)계 핵심’ 유승민 전 의원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당 지지층 대상 조사에서는 대부분 1위 자리를 지켜왔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룰은 변경 전에도 당원 선호도 70%·국민 여론조사 30%였다. 나 전 의원이 다른 당권주자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나 전 의원이 당심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배경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온다. 우선 나 전 의원은 20년이 넘도록 탈당 없이 국민의힘에서만 4선을 쌓은 중진 정치인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 지지층 사이에서 탈당 전력이 있는 유 전 의원이나 진영을 건너온 안철수 의원보다 선호도가 높다.

당원들 사이에서 나 전 의원이 ‘진짜 보수’로 인식되는 점도 중요한 지점이다. 나 전 의원이 강도 높은 발언을 거리낌 없이 이어오면서 강성 보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이 때문에 중도 확장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열성 당원 사이에서는 ‘사이다’ 발언으로 높은 지지를 얻어왔다.


오랜 정치경력으로 만들어진 높은 인지도나 여당에서는 드문 수도권 출신 중진이라는 점 역시 강점이다. 정치색과는 달리 계파색이 옅어 독자 세력 조직에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반대로 당내에서 포괄적인 지지세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같은 나 전 의원의 특성은 그가 밟아온 이력에서 잘 드러난다.

나 전 의원은 1963년 서울 영등포구(현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82학번으로, 조국 전 법무부장관, 원희룡 국토부 장관 등과 동기다. 이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나 전 의원은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고시원에서 서울대 법대 선배·동기들과 함께 하숙하며 시험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고시반 대장 역할을 자처했던 이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79학번, 나 전 의원은 82학번으로 두 사람은 3살 터울의 선후배 사이다. 이들은 모두 수험생활이 상대적으로 긴 편으로,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윤 대통령은 검찰 재직 시절 나 전 의원이 17대 총선에 출마하자 “(나 전 의원이)나중에 대선에 출마하면 검사를 그만두고 지지 유세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 전 의원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1995년 부산지방법원에 초임판사로 부임했다. 이어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2002년 제16대 대선 때 판사직을 내려놓으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나 전 의원은 이 후보의 여성특보를 맡아 정계에 입문했다.

2년 뒤인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07년 제17대 대선정국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변인을 맡아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나 전 의원은 이를 계기로 당내 입지를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당심’ 1위지만… ‘윤심’ 없어 고민
“곧 결단” 사실상 출마 결심 굳힌 듯

이듬해엔 18대 총선서 서울 중구에 출마해 재선 고지를 밟으며 당내 유력 여성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일각에서는 나 전 의원을 차차기 대권후보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던 그의 정치 행보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시작은 2011년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직을 걸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물러나면서, 선거 판세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불리한 상황에서 의원직을 던지고 출마한 나 전 의원은 이변 없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득표율 약 7%p 차이로 석패했다.

낙선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거 과정에서 다른 논란들이 함께 불거진 것이었다. 선거캠프 대변인의 음주 방송 논란이 사실로 드러났고, 반대 진영서 주장했던 ‘호화 피부과 의혹’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 참여 의혹’ 등에도 내상을 크게 입었다.

결국 이듬해 치러진 제19대 총선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마하지 못했다. 한동안 정계와 거리를 두고 변호사 생활에 전념했다.

나 전 의원은 2014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한다. 당시 동작구을 지역구의 현직 의원이었던 정몽준 전 의원이 서울시장에 출마했고, 나 전 의원이 공석을 메우기 위해 낙점됐다. 당시 그는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정의당의 고 노회찬 의원을 상대로 단 1.3%p(929표 차) 앞서는 진땀승을 거뒀다. 

결국 19대 국회에 입성하면서 연속 3선에 성공한 정치인이 됐다. 중진 반열에 올라선 그는 후반기 외교통일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2016년 치러진 제20대 총선서 연속 4선 기록에 도전했다. 앞서 당선됐던 동작구을 지역구에 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새누리당은 원내 1당 자리를 빼앗기는 등 고전한 선거였지만, 나 전 의원은 무난하게 4선에 성공했다. 어려운 선거에서 수도권 4선 고지를 밟은 나 전 의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커졌다.

이를 바탕으로 원내대표 경선에 두 번 도전하지만, 모두 친박(친 박근혜)계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두 번째 경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치러졌다. 이때 나 전 의원이 낙선하면서 친박계가 주도권을 지켜내는 모양새가 연출됐다. 이는 비박(비 박근혜)계 의원들의 집단 탈당 사태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하지만 정작 나 전 의원은 탈당 대열에 합류하지 않아 비판 여론이 일었다. 보수 지지층 일각에선 “나 전 의원이 개인적인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대의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당적을 지킨 나 전 의원은 2018년 원내대표 경선에 재출마했다. 앞선 선거에서는 친박계에 맞서 낙선했지만, 이때는 오히려 친박계의 지지에 힘입어 무난하게 당선됐다. 나 전 의원은 야당 원내대표로서 여권을 상대로 한 강성 투쟁에 앞장섰다.

하지만 강성 투쟁 일변도 실리를 챙기지 못했고, 중도층 등 지지층 확장에도 실패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문빠’ ‘달창’ 등 여권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뒤늦게 사과하는 등 개인적 구설도 잇따랐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본인의 재신임 투표를 제안했지만, 황교안 전 대표가 비공개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해 이를 막았다. 나 전 의원은 자신에게 언질도 주지 않고 재신임 논의를 끝낸 것에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기점으로 나 전 의원의 정치 행보는 다시 수난기에 접어들었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5선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정치 신인급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에게 밀려 낙선했다. 전반적으로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선거이긴 했어도 나 전 의원은 이미 자신이 2번이나 당선된 지역구에서 정치 신인에게 7%p 득표율 차이로 패배했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더 큰 굴욕을 맛봤다.

그는 낙선 후 정치권과 잠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권에서 다시 나 전 의원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2020년 7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임기 중 성추문 의혹을 받고 사망하면서다. 나 전 의원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자로 거론됐다.


약 10년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불리한 구도가 형성돼있었지만, 이때는 반대로 낙승이 예견됐으므로 구미가 당길만한 기회였다. 

‘윤심’ 보다 
‘민심’ 이다?

실제로 나 전 의원은 2021년 1월13일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결국 오 시장에게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경선 결과 발표 직후 나 전 의원은 “결과에 승복한다. 국민의힘 승리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나 전 의원은 당시 오 시장의 선거유세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아울러 동시에 진행되던 부산시장 선거 지원유세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 전 의원은 2주 동안 총 65회의 후보 지원유세 일정을 소화했다.

나 전 의원은 숨 고를 새도 없이 당권 도전을 선언해 이준석 전 대표와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민심에서는 이 전 대표가, 당심에서는 나 전 의원이 앞서는 양상이었다. 두 사람은 후보 토론회 등에서 날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민심은 계속 벌어졌고, 당심은 계속 좁혀졌다.

결국 2021년 6월 전당대회서 이 전 대표에게 6%p 득표율 차이로 밀리며 고배를 마셨다. 전체 70%를 차지하는 당원 득표에서는 아슬아슬하게 1위를 차지했지만, 여론조사의 격차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써 나 전 의원은 불과 1년 사이에 치른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나 전 의원이 정치생명에 치명타를 입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외연 확장과 중도층 포섭에 난항을 겪는 모습을 잇달아 보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한계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나 전 의원은 전당대회 이후 미국으로 출국하며 대권 레이스와 거리를 뒀다. 이후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윤 대통령이 나 전 의원을 캠프에 참여시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선대위에 내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내 작은 자리라도 내어놓고 싶다”며 “그 자리가 한 표라도 가져올 수 있는 외연 확대를 위한 인사 영입에 사용되길 소망한다”며 거부 의사를 에둘러 밝혔다.

윤정부 출범 전후로는 입각설이 꾸준히 제기됐다. 인수위 출범 초기 외교부 장관 내정설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중소벤처기업부, 환경부 장관 등의 하마평에 지속적으로 언급됐다. 이어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다. 하지만 약 반 년간 ‘내정설’이 수차례 돌았음에도 실제로 성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13일, 나 전 의원은 부총리급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에 내정됐다. 다음 날 바로 임명장이 수여되면서 정식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같은 달 18일에는 기후환경대사에 임명됐다, 불과 나흘 사이에 정부 고위직 두 자리를 얻은 셈이다.

일각에서는 나 전 의원의 갑작스러운 중용 배경을 두고 대통령실의 ‘당권 교통정리’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른바 윤심을 받는 친윤 주자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다른 유력 주자들을 정리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 전 의원은 “(받은 자리가)비상근이기 때문에 어떤 제한이 있지는 않다. 당적을 내려놔야 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당권과 관련해 배제되거나 배척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자리를 받았음에도 당권 도전 의사를 당장 접을 생각은 없다는 의미로 풀이됐다.

게다가 마치 유 전 의원을 겨냥해 변경한 듯한 ‘당원투표 100%’ 선거방식은 당 지지층 선호도 1위를 달리는 나 전 의원에게 큰 호재로 다가왔다.

친윤 파상공세 버티고 당선될까? 
되든 안 되든 막대한 파장 예고

‘동상이몽’ 아래 미묘하게 이어지던 갈등은 이달 초 폭발했다. 지난 5일 나 전 의원이 출산 시 부모의 대출 원금을 탕감하는 ‘헝가리식 저출산 대책’을 제시하자, 대통령실이 “실망스럽다” “납득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처사” 등의 표현으로 나 전 의원을 직격했다.

이후 대통령실에서는 나 전 의원을 향해 해촉까지 시사하는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정책을 명분 삼아 과도한 비판이 가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 전 의원이 정부와 상의 없이 저출산 대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나 전 의원이 교통정리를 거부하고 당권 행보를 계속 이어간 것에 대한 대통령실의 불만이 깔려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당 안팎에서는 나 전 의원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윤심 후보’로 꼽히는 김기현 의원과  친윤계에서는 “전당대회에 나온다면 ‘제2의 유승민, 이준석’ 프레임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며 나 전 의원을 압박했다. 앞서 이 전 대표는 윤 대통령 및 친윤계 의원들과 극한 갈등을 빚은 끝에 대표직에서 축출된 바 있다.

나 전 의원 입장에선 대통령실의 비토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만일 나 전 의원이 윤심을 등지고 출마해 당선되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일 수도 있다. 계파색이 옅어 세력이 약한 나 전 의원이 사실상 ‘식물 대표’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다. 앞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정치력을 지나치게 소모했기 때문이다. 당심의 큰 지지를 받으면서도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정치적 타격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번 대표 출마가 나 전 의원이 부활할 마지막 기회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일단 나 전 의원은 저자세 전략을 택했다. 그는 지난 10일 “대통령께 저출산위 문제로 심려를 끼쳐드렸다”며 저출산위 부위원장직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뜻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이미 높은 지지율을 확보한 나 전 의원이 대통령과 악화된 관계를 먼저 풀려는 시도를 보여주기만 해도 동정표를 꽤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사의는 서면으로 표명해야 한다는 입장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나 전 의원은 지난 13일 오전 서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는 대통령실에 사실상 자신의 거취를 조속히 정리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실은 같은 날 오후 나 전 의원을 저출산위 부위원장과 기후대사 직에서 해임했다.

당초 대통령실은 나 전 의원의 사의를 오는 21일 전에는 받지 않을 방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미 깔끔한 정리에 실패한 상황에서, 나 전 의원에게 일방적인 핍박을 가하는 구도가 오래 지속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낙장불입  
절치부심

대통령실 입장에서는 한결 자유로워진 나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이 올라간 점 또한 문제다. 결국 나 전 의원의 출마를 막지 못해 윤심 후보가 낙선한다면, 정권 초기부터 윤 대통령의 당 장악력에 큰 타격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 전 의원 측은 출마 여부 발표 시점을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복귀 시점으로 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이 출마를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직서 제출 직후나 윤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입장을 밝히면 자칫 ‘항명’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14일 출국한 윤 대통령은 오는 21일 귀국할 예정이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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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