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항소심 ‘게임 체인저 ’부상, 왜?

스모킹건 발견…1심 무죄 뒤집히나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가습기살균제 재판에 변수가 생겼다. 피해자들에게 1심 무죄라는 참담한 선고가 내려진 이후 “이제 끝”이라는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근거가 발표됐다. 가습기살균제 성분 물질 중 하나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이 호흡기를 통해 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입증된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재판 공소 유지를 담당하는 검사들도 분주하다.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이 호흡기를 통해 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입증된 보고서를 증거로 제출한다 해도 통상 사실심인 1심과 2심의 결론이 다른 경우는 드물다. 검찰도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어 1심 재판부가 판단한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 전망이다.

새로운 사실
그리고 입증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은 지난 8일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하는 연구 보고서를 공개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10년이 지나서야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며 탄식 섞인 기대감을 품게 됐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앞서 옥시와 롯데마트 등은 2018년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SK케미칼을 포함한 애경, 이마트 등 가해 기업 관계자 13명은 지난해 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즉시 항소를 통해 공판을 이어나가고 있다.

옥시와 롯데마트 등은 인체 유해성이 확실하게 입증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사용·판매해 빠른 유죄가 선고될 수 있었다. 반면 SK케미칼과 애경 등은 지금까지 법적으로 인체 유해성이 인정되지 않은 CMIT·MIT를 제조·판매했다.


SK케미칼은 ‘가습기 메이트’를 만들었다. 애경산업이 이를 판매했고, 이마트는 이 제품을 납품받아 자체 브랜드 상품을 출시했다.

2006년부터 원인 미상 폐 손상 주범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지목한 질병관리본부는 CMIT·MIT 제품 제조사들에 대해 검찰에 고발하지 않았고 PHMG·PGH 계열 제품들에 대해서만 강제 수거 명령을 내렸다. 당시 실험에서 PHMG·PGH에 노출된 쥐들은 이상 소견을 보였으나 CMIT·MIT에 노출된 쥐들은 명확한 ‘폐 섬유화’ 증상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질본의 설명이다.

문제는 CMIT·MIT 계열제품을 사용했다가 병을 얻거나 사망한 피해자가 상당하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정부에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7799명이다. 정부가 구제급여 지급을 결정한 사람이 4417명인데, 이 중 SK케미칼·애경·이마트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사람은 1581명으로 집계됐다.

정부가 지원을 결정한 피해자 3명 중 1명이 CMIT·MIT 계열제품을 사용한 셈이다.

지금도 CMIT·MIT는 법적으로 인체 유해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검찰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행된 동물실험을 근거로 SK케미칼 등을 재판에 넘겼으나 법원은 10여건에 달하는 CMIT·MIT 동물실험을 단 한 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CMIT·MIT 노출과 건강 영향 간의 인과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3가지 기준이 충족돼야 한다고 봤다. ▲CMIT·MIT가 폐 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어야 함 ▲CMIT·MIT가 흡입으로 폐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함 ▲폐에 도달해 폐 질환을 일으킬 정도의 양이 축적돼야 함 등이다.

환경부 산하 국립연구원 보고서 검찰 증거로 쓰여
불명확 CMIT·MIT 위험성 확인…폐 손상 깊은 연관


검찰이 고전하는 상황에서 국립환경과학원이 경북대학교 연구진(전종호 교수), 한국화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이규홍 단장)와 함께 CMIT·MIT가 비강이나 기도를 통해 폐까지 도달한다는 새로운 동물실험 결과를 내놓은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성과라고 볼 수 있다.

1심 재판부가 판단한 ‘CMIT·MIT의 폐 도달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물리화학적 특성상 CMIT·MIT가 폐까지 도달하기 어렵다고 봤다.

고분자중합체로 체내에 잔류하기 쉬운 PHMG·PGH와 달리 저분자 화학물질인 CMIT·MIT는 물에 잘 녹고, 몸에서 잘 분해돼 몸 밖으로 쉽게 배출된다는 변호인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호흡기로 흡입한 물질은 상기도와 하기도를 거쳐 폐로 전달된다.

재판부는 CMIT·MIT를 흡입하더라도 대부분 비강 등 상기도에서 흡수돼 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환경과학원은 몸속에서 CMIT·MIT가 실제 어떻게 이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CMIT·MIT에 방사성 추적자를 합성했다. 방사성 추적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포함된 화합물이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붕괴될 때 방출하는 에너지를 측정하면 해당 물질이 몸속에서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방사성 추적자를 합성한 CMIT·MIT를 실험용 쥐의 비강과 기도에 노출시킨 결과, CMIT·MIT가 비강과 기관지를 거쳐 폐까지 이동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확인됐다. 폐를 통해 전달된 물질이 간과 신장, 위장과 심장, 뇌 등 전신으로 퍼져나간 사실도 추가로 확인했다.

환경과학원은 이들 물질이 체내에 얼마나 머무는지 확인하기 위해 5분, 6시간, 1주일 단위로 방사능 농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최초 노출 후 1주일이 지난 후에도 기관지와 폐에서 CMIT·MIT 성분이 검출됐다. 특히 지금까지 불명확했던 CMIT·MIT의 위험성도 확인됐다.

논란의 성분
폐 도달 확인

CMIT·MIT를 반복 노출한 후 실험용 쥐의 기관지 폐포세척액을 분석한 결과, 폐 손상과 관련 있는 염증 및 섬유화 지표가 노출 농도에 따라 증가했다.

연구진의 이번 연구 결과는 환경과학 분야 상위 5% 수준의 국제학술지인 <국제환경>에 ‘비강 및 기관 내 투여 후 CMIT·MIT의 체내 거동 및 호흡독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로 전달돼 폐 손상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첫 번째 보고서”라며 “이 연구의 결과는 CMIT·MIT 노출과 폐 손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했다.

연구진은 “최근 한국에서 진행된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의 노출이 폐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재판에서 제조사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며 “법원 판결문에는 현재까지 CMIT·MIT 노출과 폐 손상 사이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명시됐다. 그러나 이번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이러한 결론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SK케미칼 등의 항소심 재판에서 기존 판단을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판단한다. 앞서 밝힌 대로 재판부가 제시한 3가지 판단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규홍 안전성평가연구소 인체유해인자 흡입독성연구단 단장은 “이번 연구는 가습기살균제에 사용된 CMIT·MIT가 호흡기 노출을 통해 폐까지 도달돼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체내 분포와 독성연구 결과로 종합 분석해 입증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며 “CMIT·MIT가 함유된 제품이 호흡기 이외의 장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근거로 건강영향 평가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단장은 “1심 재판부가 판단 근거로 들었던 3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연구”라며 “CMIT·MIT가 폐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음이 확인됐고, 물질이 코를 통해 폐까지 이동하며, 폐 내에서 꽤 오래 잔류하는 것도 확인됐다”고 했다.

골머리를 썩고 있던 검찰도 상황이 한결 나아졌다고 전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이번 연구로 앞으로 열리는 공판에서 검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으로 기대한다”며 “검찰도 이번 연구 결과를 재판에 증거로 제출했고 1심 재판부의 논리를 정면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고 본다”고 말했다.

상해사망
인과관계

그러나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통상적으로 형사소송은 민사소송보다 피고의 책임을 입증하기 힘들다. 1심에서도 CMIT·MIT의 위해성을 보여주는 동물실험 결과가 증거로 제출된 바 있다. 한 실험에서는 CMIT·MIT에 노출된 실험용 쥐가 6일 만에 사망했고, 또 다른 실험에서는 CMIT·MIT에 노출된 임신한 암컷 쥐가 사산하거나 체중이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실험용 쥐에 사용한 용량이 지나치게 과도했다 ▲코로 물질을 흡입한 게 아니라 기관에 물질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사망의 원인이 폐 손상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로 이 실험 결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것과 같은 환경에서 동물실험을 진행했을 때, 폐 섬유화 등 명확한 증거가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반면 학자들은 CMIT·MIT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증거 확보에 집중하면서 물질의 노출 농도와 실험 방식 등을 바꿨다. 결국 1심은 검찰의 패배로 끝났다.

권정환 고려대학교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는 “항소심도 1심처럼 검찰의 입증 책임을 강하게 요구한다면 똑같은 상황이 유지될 수 있다. CMIT·MIT가 폐에 도달한 것이 확인됐다고 해도, 실험용 쥐에게 얼마나 많은 양을 노출했는지, 노출량 대비 얼마만큼의 양이 폐 조직으로 들어갔는지를 피고인 측 변호인이 따질 수 있다”며 “폐에서 염증 지표가 증가했다고 해도 폐 섬유화까지는 여러 단계가 있기에 1심 재판부처럼 완벽한 증거를 요구한다면 여전히 상황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의 시각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고 했다.

CMIT·MIT의 물리화학적 특성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오해로 인해 부득이 이번 연구가 수행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CMIT·MIT를 비강에 노출했을 때 폐까지 간다는 결과는 과학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PHMG·PGH가 폐로 들어가서 석회층을 일으킨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PHMG·PGH는 고분자인 반면, CMIT·MIT는 단분자로 크기가 훨씬 작다. PHMG, PGH가 폐까지 들어가는데 그보다 작은 CMIT·MIT가 폐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구원, 잘못된 잣대에 추가 연구 “2심 기대”
과학적 결론·증거 채택 안 될 시 논란 예상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같은 시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학자들은 추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CMIT·MIT 성분의 동물흡입시험을 수행 중이다. 시험 결과가 나오면 비강과 기도에 물질을 묻혀 체내 반응을 관찰한 이번 실험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해당 실험에서는 염증이 일어나기 전 단계의 면역반응을 관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사망 원인의 인과관계가 아닌 CMIT·MIT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진행되는 SK케미칼 등 재판의 주요 혐의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인데 가습기살균제와 상해 간 인과관계 입증의 어려움으로 검찰의 어깨가 무거운 상황이다.

실제 전문가들은 가해 기업의 주의 의무 위반행위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간 인과관계도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10월25일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는 홍지호, 안용찬 등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필러물산 전·현직 임직원 13명에 대한 항소심 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 변경 이후 첫 공판인 이날 검찰과 변호인단은 변론을 통해 사안의 쟁점을 짚었다. 검찰은 “2019년 기소돼 2022년까지 3년에 걸친 이 사건의 본질은 살균제 사건이라는 것”이라며 “세균을 죽이는 독성의 살균제가 가습기를 매개로 호흡기를 통해 제약 없이 인체에 들어와 집단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CMIT·MIT 원료는 원래 페인트 섬유 제품 등 공업용 살균 방부제로 사용된다. 검찰은 “살균제를 초음파 가습기 수조에 넣어 분무하는 제품은 1994년 우리나라 유공이 최초로 개발하기 전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던 제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제품판매 중에도 소비자들이 호흡기 불편, 피부 과민 등 불만을 접수했고 영유아와 산모에게 안전한지 문의가 많았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결국 본인들이 화학물질 제조 판매업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주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피해자 박나원, 박다원 등 44명에게 폐 손상을 입히고 피해자 4명에게 천식 상해를 입혔다는 게 이 사건의 공소 사실 요지”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동물과 인간 간 종간 차이 등을 무시한 채 동물실험만으로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등 원심 오류도 지적했다.

막판 뒤집기
가능할까?

검찰은 “전문가 진술, 증거 등을 종합해 인과관계 인정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 법률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원심은 단편적인 접근으로(과학적인 연구 결과 등) 증거를 개별적으로 분리하고 비합리적인 근거로 주요 증거를 배척했다”며 “증거 전체 취지를 왜곡하고 공소 사실에 부합하는 시험 결과와 전문가 진술 등에 대한 판단을 누락했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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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