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기획> 가습기살균제 참사, 그후 ①알고도 묵인한 정부 미스터리

피해자들 아닌 기업 편에 섰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세월호·가습기살균제 사건 진상규명 활동이 지난 6월 마침표를 찍었다. 작은 성과가 있었으나 피해자와 유족의 눈높이에 맞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요시사>는 사참위 가습기살균제 사건 진상규명 소위원회가 4년 가까이 조사해온 결과물을 입수해 4회에 걸쳐 집중 보도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연루된 정부부처는 상당히 많다. 공정거래위원회,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환경부, 질병관리본부(질본) 등이다. 정부부처 공무원들의 소극·졸속 행정은 부실 조사로 이어졌다. 피해 원인이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으면서 피해·사망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빠져나갈 구멍
뚫어준 형국

뒤늦게 사건을 조사한 정부는 가해기업에 대한 제재 대신 가습기살균제 원료가 위험하다는 정보를 주기까지 했다. 사실상 가해기업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뚫어준 것이다.

질본은 2011년 8월26일부터 3일간 SK케미칼, 옥시, 애경 등 가습기살균제 생산·제조·판매업체들과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간담회에서 가해기업은 질본에 “역학조사는 통계상의 상관성만으로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오류가 있다. 직접적 인과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업체명과 상품명이 발표되지 않아야 한다”며 “발표할 때 표현 수위를 잘 조절해달라”고 요구했다.

보건복지부와 질본은 같은 해 8월31일 역학조사 3단계 중 심층면담 조사 결과 등을 제외하고 가습기살균제 제품 사용 및 출시 자제 권고를 발표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가습기살균제 사건 진상규명소위원회(특조위)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질본은 사실상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질본이 은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층면접조사 결과로 나온 피해자 사용 가습기살균제 5개 제품명(옥시싹싹New가습기당번, 세퓨 가습기살균제, 롯데마트 가습기살균제, 애경 가습기 메이트, 홈플러스 가습기청정제) ▲18명 중 6명 사망 확인했지만 사망자 4명으로 축소한 부분 ▲피해자 사용 가습기살균제 5개 제품 성분분석 결과로 나온 주성분 PHMG·PGH, CMIT·MIT 화학물질 함유 사실이다.

이 외에도 ▲가습기살균제 제품 생산공장 현장조사(한빛화학, 용마산업사, 애경산업, 아토세이프, 애경에스티, 세퓨, 에스겔화장품, 홈케어 등 8개소) 결과 확인한 제조원과 판매원 ▲세포독성 시험에서 관찰된 폐세포 사멸 효과 관찰돼 독성 및 세 기관지·폐 말단 가습기살균제가 도달 가능하다는 사실 ▲가습기 물 처리제 흡입 시 좋지 않으므로 쓰지 말라는 미국 환경보호청 권고사례를 검토했으나 미발표한 부분 등이다.

질본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사용 및 출시 자제를 권고했다. 발표 내용과 관련해 당시 기업들은 보도자료에 대해 위험 요인 표현 변경, 교차비 비공개 등의 의견을 제시했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특조위는 업체명과 상품명이 보도자료에서 제외된 사실을 파악하고 질본이 업체명과 상품명을 제외해 달라는 기업들의 요구는 수용됐다고 판단했다. 특조위 조사 결과 질본 관계자들은 업체명과 상품명 미공개 사유에 대해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 간의 인과관계가 규명되지 않았고, 보도자료 작성 시에 보건복지부 외 타 부처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진술했다.

질본, SK케미칼·애경 말 듣고 제품·성분명 빼고 발표
폐 손상 인과관계 확인 역학조사서 가습기메이트 제외

질본 내부에서는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의 교차비가 확인돼 원인미상 폐손상의 유력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명확한 인과관계 확인이라는 명목으로 보도자료에 기업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사망자는 더욱 늘어났다.


질본은 가해기업과의 면담이 있기 전,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폐 손상 제품이었던 가습기메이트(CMIT·MIT 제품)를 조사 과정에서 제외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질본은 2011년 4월25일 원인미상 폐 손상에 대한 역학조사를 시작했다. 보도자료가 발표된 8월 말 이후에도 명확한 인과관계 확인을 위해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먼저 질본은 기도 내 투여 예비시험을 실시해 ▲적정 투여량 ▲가습기살균제 폐 도달 시 독성이 나타나는지를 확인했다. 최종적으로는 흡입독성시험을 통해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인하려 했다.

질본이 PHMG·PGH 제품군에만 실시했던 2011년 기도 내 투여 예비시험의 투여량은 2019년 시험조건으로 환산하면 0.35mg/kg, 0.70mg/kg, 7.00mg/kg이었다. 2011년 예비시험의 투여량이 2019년(CMIT·MIT를 쥐에게 투여하여 실시된 기도 내 투여 시험) 폐섬유화가 확인된 0.29 mg/kg보다 높았다.

그러나 질본은 가습기메이트를 예비시험 대상에서 제외했다. 2011년 기도 내 투여 예비시험의 대상으로 가습기메이트를 포함시켰다면 폐 손상과 가습기살균제 간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특조위는 질본의 부실조사 발표로 인해 피해자들의 배상과 구제 지연 및 검찰의 늑장 수사, 공정위의 잘못된 심의처분 등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했다.

특조위 관계자는 “가습기메이트가 예비시험에서 제외됐던 원인 중 하나는 원료물질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예비시험을 시작한 이후 현장조사를 통해 물질을 확인했고 제품 성분이 공개됐다면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험성 안 알리고
문제 제기 안 해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질본은 2011년 11월11일 유해성 확인 및 6개 제품에 대한 강제수거 조치를 내렸다. 이후 가습기살균제 의심 피해사례에 대해 신고·접수를 받기 시작했다. 시민사회단체와 전문가들은 피해조사 확대 및 피해자에 대한 판정 등 정부 대책을 요구했으나 후속 조치는 미흡했다.

질본은 2012년 10월8일 폐손상조사준비위원회 계획을 수립하고 호흡기내과, 소아청소년 호흡기내과, 영상의학, 병리학, 예방의학, 환경보건전문가 등 각각의 전문 분야에서 민관 공동 추천을 통해 22명의 위원을 위촉, 폐손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 구성을 마친 폐손상조사위원회는 2012년 12월6일 제1차 회의를 시작으로 2015년 1월20일 제14차 회의까지 운영됐다. 폐손상조사위원회의 주요 활동 내용은 질본과 시민단체 등에 피해 의심 신고를 한 361명에 대한 피해 판정이었다. 피해 판정 기준은 신고를 한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건강 이상과 가습기살균제와의 인과성이었다.

폐손상조사위원회의 활동 종료 이후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건강 피해를 정부로부터 판정받았다. 총 4단계로 ▲1단계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 가능성이 ‘거의 확실함’ ▲2단계는 ‘가능성 높음’ ▲3단계는 ‘가능성 낮음’ ▲4단계는 ‘가능성 거의 없음’이었다.


위원회 내부에서는 해당 단계 구성을 두고 이견이 있었다. 위원회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특조위 조사에서 “4단계 구분법으로도 판정을 내리기 어려운 질환이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적절한 방법인지 여부에 대한 토론은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위원회의 진술조사에서 4단계 구분법과 관련하여 ‘근거자료의 부족이나 불확실성’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4단계 구분법이 폐손상조사위원회에서 이견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4단계 구분법은 폐손상조사위원회 전체 입장으로 최종 결정됐다. 조사와 판정에 있어 폐질환에 국한되기도 했다. 위원회 위원들은 폐 손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자료와 근거자료가 부족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활동 시기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만큼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인정 및 지원이 늦어지고 있었기에 우선 판정 가능한 질환부터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질본은 위원회의 이 같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은 감염성 질환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 규모 조사와 건강이상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 및 사후 대책 마련에는 소극적이었다.

조사위 의견
묵살에 외면


<일요시사>가 입수한 사참위 내부자료에도 질본은 피해 질환과 피해자들의 피해 양상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추가적인 조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일부 위원의 요구가 있었음에도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

특조위는 폐손상조사위원회가 제4차 회의(2013년 3월7일)에서 추가동물실험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제6차 회의(2013년 6월5일)에서 폐손상조사위원회의 조사 목적을 폐 손상 환자 판정으로 제한한 것도 질본의 소극적 행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이 같은 질본의 태도는 폐손상조사위원회 제5차 회의(2013년 4월4일) 당시 위원 전원이 사퇴하는 일까지 발생시켰다. 당시 질본과 위원들 사이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청인들에 대한 검사 범위를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폐손상조사위원들은 CT 촬영이나 폐기능 검사 등 추가 비용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질본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폐손상조사위원들은 전원 사퇴했다.

결국 질본이 폐손상조사위원들의 입장을 수용해 위원들이 제6차 회의부터 다시 복귀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잘 아는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참사 대응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며 “위원회도 최선을 다했고 그 의견을 질본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상황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폐손상조사위원회 1기는 미흡했으나 폐 손상 가능성을 기준으로 피해 판정 기준을 정했다. 결과적으로 129명이 1단계, 46명이 2단계, 39명이 3단계, 144명이 4단계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폐 이외의 질환과 관련해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폐 손상 이외의 질환은 폐 손상 판정 기준으로는 피해 판정이 불가하거나, 피해 기준에 해당하지 않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추가 실험 필요한데 손 놓기…환자로만 한정
권성동, 기재부와 지원 예산안 삭감에 한몫

정치권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을 위해 2013년 5월 추경예산안 50억원으로 증액했다. 이 예산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거쳐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기획재정부의 반대로 전액 삭감됐다. 기재부는 국회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법 검토의견서에 “법률안 전체 수용 곤란”이란 의견을 밝혔고 “폐질환과 가습기살균제 간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앞서 보건복지부(2011년 8월)와 질본(2012년 2월)이 폐질환과 가습기살균제 원료 간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밝힌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도 기재부와 함께했다. 권성동 의원은 2014년 12월2일 열린 환노위 법안소위에서 “환경성 질환만 정부에서 선보상하고 구상권을 행사하면 (중략) 그러면 교통사고든 모든 사고를 다 그렇게 해놔야 한다”며 “교통사고 입은 국민들은 특별대우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법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기재부는 2016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 확대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공문서에 허위사실을 작성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 관련 관계 차관회의’에서 4가지 안건이 처리됐다.

당시 안건은 ▲신속한 피해신청자 조사·판정추진 ▲피해자 지원 확대 추진 ▲폐 이외 질환 규명 신속 추진 ▲재발 방지대책 논의 등이었다. 환경부는 다음 달인 6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가습기살균제에 사용된 화학물질로 인한 폐질환의 인정 및 지원 기준 등에 관한 고시’ 개정안을 제출했다.

고시의 주요 내용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생활 안정자금 및 간병비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기재부는 환경부의 입장에 대해 “제6조(피인정인에 대한 지원범위 및 방법) 입원 기간 중 발생하는 간병비(입원 간병비)는 해당 피해가 발생한 날로 소급해 산정한다. 다만 입원 기간이 아닌 기간 중 발생하는 간병비(비입원간병비)는 제7조제1항에 따라 간병비를 신청한 날로 소급해 산정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생활안정 자금 및 간병비 지원은 소급하지 않는 것으로 관계부처 차관회의에서 결정한 만큼 동 신설조항 삭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피해자 지원
나 몰라라

실제 고시는 개정됐고 2016년 7월1일 이전에 발생한 입원간병비는 포함하지 않게 되는 등 기재부의 원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됐다. 기재부는 이처럼 고시 제6조 5항에 대한 신설 반대 입장을 제시했다. 이후 허위 문구를 작성해 실제 고시는 원안대로 통과됐다. 실제 이 같은 일로 인해 일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허위공문서를 작성한 기재부 고용환경예산과 사무관 A씨와 사건에 관여했던 공무원들은 전부 징계를 받지 않았다. 고시 개정을 추진하던 환경부 환경보건관리과 직원들은 차관회의 결정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기도 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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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목줄 잡은 대법원 막전막후

이재명 목줄 잡은 대법원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선을 앞두고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대권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후보가 또 한 번 판결대에 서야 할 상황에 놓인 것. 그 후보로서는 지난 대선 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리스크를 떨칠 기회이면서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대법원이 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오는 6월3일 조기 대선이 열린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각 당은 최종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레이스에 돌입했다. 국민의힘은 컷오프를 거쳐 8명의 후보를 추린 후 1차 경선서 4명을 뽑았다. 2차 경선서 과반 득표자 여부에 따라 추가 경선을 진행해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 민주당은 3명의 후보가 4개 권역을 돌며 지난 27일, 이재명 전 대표가 대선후보로 결정됐다. 압도적 1위 제동 걸리나 국민의힘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악의 악재를 짊어진 상태다. 조기 대선의 책임 소재가 여당인 국민의힘에도 지워진 상황이라 내부가 혼란스럽다. 실제 후보 간에도 탄핵 찬성과 반대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최종 1인이 결정되는 다음 달 3일까지 후보 간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민주당은 ‘1극 독주’ 상황이다. 이 전 대표가 경선 지역마다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였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득표율보다 높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경쟁자로 나선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김동연 경기도지사 등은 한 자릿수 득표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 지난 27일 마지막 경선서 이 전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다자 대결, 양자 대결서도 이 전 대표는 국민의힘 후보를 압도하고 있다. 어떤 후보와 붙어도 15%~20%p 차이로 넉넉하게 앞선다.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재수 끝에 대권을 잡는 데 성공한 문재인 전 대통령 때와 오버랩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당시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표현이 선거를 지배했듯, 이번 대선은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이 유권자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최근 ‘이재명이냐, 아니냐’로 흘러가던 선거 구도에 대법원이라는 변수가 던져졌다.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처음 불거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전 대표의 발목에 달려 있던 ‘사법 리스크’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다시 한번 판결대 위에 올랐다. 이 전 대표는 20대 대선 과정서 고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1처장과 경기 성남시 백현동 한국식품연구원 부지 용도변경과 관련해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2022년 9월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로 판결했다. 항소심 유죄, 무죄로 뒤집어 김명수 체제서 7대 5로 회생 이 전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지난달 26일에 나왔다. 이후 헌재가 지난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인용하면서 이 전 대표의 대선 행보를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공직선거법 재판은 1심은 기소 후 6개월, 2·3심은 3개월 이내에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6·3·3 규정에 따라 대법원 판결은 대선 이후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 전 대표의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이하 전합)에 회부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오전, 이 전 대표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오경미·권영준·엄상필·박영재 대법관으로 구성된 2부에 배당했다. 주심은 박영재 대법관이 맡았다. 그러나 곧이어 해당 사건을 전합에 회부했다고 밝혔다. 전합은 ▲소부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기존 대법 판례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 ▲소부서 재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경우 등의 상황에 올리게 된다. 사건이 전합에 회부되면서 조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재판 업무를 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회피를 신청한 노태악 대법관을 제외한 12명이 최종 판결 선고를 포함해 심리 및 판단을 하게 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노 대법관은 이해 충돌을 우려해 전합으로부터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사건을 전합에 회부하고 첫 기일을 진행한 데 이어 지난 24일에도 기일을 잡았다. 대법원이 사건 심리에 속도를 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판결 선고 시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시에 이 전 대표 앞에도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놓이게 됐다. 먼저 대법원이 상고 기각을 하는 경우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대법원이 기각하면 공직선거법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된다. 이 전 대표의 대선 가도에 정말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지는 셈이다. 변수 등장 경우의 수 반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는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한다고 해서 바로 형이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확정 판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대선 전에 최종 결론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이 경우에는 이 전 대표의 대선후보 자격 논란이 빚어질 수 있다. ‘파기자판’ 가능성도 나온다. 파기자판은 상급심 재판부가 하급심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보고 원심을 파기하면서 사건을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판결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법원이 판결을 하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 보수 진영 등에서 대선 전까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두고 파기자판 가능성을 거론했던 바 있다. 대법원이 벌금 100만원 이상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이 전 대표는 피선거권 박탈로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다만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에 대한 법리해석을 따지는 법률심에 해당하며, 징역 10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선 양형을 판단하지 않는다. 법조계에서는 파기자판 가능성은 작게 보고 있다. 대법원이 심리를 서두르는 것과는 별개로 선고가 대선 이후에 나면 헌법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점화될 전망이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5년 만에 평행이론? 여기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소추’에 대한 해석이다. 기소로 봐야 하는지, 기소와 재판을 합쳐서 봐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것. 또 이 전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재판 정지 여부도 맞물려 있다. 민주당은 대법원의 행보를 경계하는 듯한 모양새다. 민주당 황정아 대변인은 “이 전 대표는 우리 당 대선 (경선) 후보기도 하지만 선고 결과에 따라 우리 당이 직접적 영향을 받는 사건이라 당 차원의 입장 표명이 불가피하다”면서 “(대법원의)공정한 재판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청래 의원은 “대법원이 국민 참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렸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전 대표의 운명이 또다시 대법원의 결정에 달렸다는 점이다. 앞서 이 전 대표는 지난 대선 전 대법원의 판결로 ‘기사회생’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 전 대표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2년 6월 보건소장, 정신과 전문의 등에게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로 기소됐다. 또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서 ‘친형을 강제 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허위 발언을 한 혐의(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도 받았다. 1심과 2심 모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허위 사실 공표에 대해서는 판결이 엇갈렸다.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였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형량으로 대법원서 확정되면 이 전 대표는 5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상황이었다. 경기도지사직은 물론 대선 가도에도 브레이크가 걸릴 판이었다. 조희대 체제도 12명이 판결 이례적 속도전 대선 전에? 대법원은 이 전 대표의 사건을 전합에 회부했다. 판결에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11명의 대법관이 참여했다. 12명 대법관의 의견은 7(무죄) 대 5(유죄)로 갈렸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7명의 대법관은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상대 후보자의 공격적 질문에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취지의 답변 또는 일부 부정확하거나 다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봤다. 적극적으로 반대 사실을 공표했다거나 전체 진술을 허위라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반면 박상옥 전 대법관 등 5명은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유권자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할 정도로 왜곡됐다면서 유죄 취지의 반대 의견을 냈다. 상대방 후보의 질문이 즉흥적인 것도 아니었고 이 전 대표도 답변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당시 판결이 낳은 후폭풍이다. 7대 5 판결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권순일 전 대법관의 행보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이는 재판 거래 의혹으로 번졌다. 특히 화천대유 실소유주로 알려진 김만배씨가 대법원 선고를 전후해 여러 차례 권 전 대법관의 집무실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확산됐다. 여기에 권 전 대법관은 퇴직 이후 2020년 11월부터 2021년 9월까지 화천대유 고문으로 재직하며 등록 없이 변호사로 활동한 혐의도 받았다. 이 기간 그는 1억5000만원의 고문료를 받았다. 또 대장동 개발업자들로부터 거액을 받거나 약속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른바 ‘50억 클럽’으로 지목된 6명 가운데 1명이기도 하다. 2표 차로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이 전 대표는 경기도지사 임기를 마치고 이후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결국 2022년 대선서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지긴 했지만 대법원 판결이 없었다면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이 전 대표는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다시 출발선에 서 있다. 고비마다 또 한 번? 문제는 이 전 대표의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다. 이 전 대표는 12개 혐의로 5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에서 공직선거법 사건만 확정 판결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이번에 대법원이라는 산만 넘으면 이 전 대표 앞에는 ‘꽃길’만 깔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가시밭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건 대법원에 달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