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망치는 ‘오버부킹’ 피해담

내 객실에 다른 사람이…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모처럼 휴가를 떠나는 이가 늘고 있다. 코로나 유행이 잦아들고, 황금연휴와 여름휴가 기간이 이어진 결과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휴가를 다 망쳤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일명 숙소 ‘오버부킹(중복 예약)’ 때문이다. 숙박 앱(App)의 불완전한 대처 아래, 오버부킹 피해 사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숙박 앱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오버부킹 피해도 덩달아 늘어왔다. 오버부킹은 숙박 앱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숙박업계 관계자들은 “구조상 줄일 순 있어도 없앨 순 없다”고 입을 모은다.

야놀자
여기어때

한 객실이 여러 플랫폼에 모두 올라가기 때문이다. 플랫폼 이용자들은 숙소 예약을 위해 다른 플랫폼 이용자들과도 동시에 경쟁하는 셈이다. 어느 한 곳에서 객실이 예약되면, 다른 플랫폼에서는 ‘예약 마감’ 처리를 통해 오버부킹을 막아야 한다.

이때 숙박업체나 숙박 앱의 대응이 늦어지는 게 오버부킹이 발생하는 주된 원인이다. 숙소 마감 처리가 모두 ‘수동’으로 이뤄지는 탓이다.

간혹 숙박업체가 고의로 오버부킹을 유도하는 경우도 목격된다. 객실 취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공실을 최소화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예상한 대로 예약 취소가 발생하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버부킹이 대거 발생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방문객의 휴가를 판돈으로 거는, 일종의 ‘도박’이다. 

정당한 비용을 지불한 방문객이 피해를 감수할 이유는 없다. 오버부킹을 최소화해야 하는 이유다. 문제 해결 의무를 진 숙박 앱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동안 여러 대책을 강구해왔다. 

대표적으로 ‘안심예약제’가 있다. 예약이 뜻하지 않게 취소되면 숙박 앱이 예약 비용을 보전해주거나 다른 숙소를 구해다주는 제도다. 

숙박 앱을 운영하는 ‘여기어때’ 측은 “안심예약제를 운영하는 전문 상담 그룹을 배치했다”며 “제도 도입 2년 만에 7000여명 고객을 피해에서 구제했다”고 밝혔다.

이어 “제도 시행 이후 고객 강성 민원은 71%나 줄었고, 오버부킹으로 인한 제휴점의 일방 취소 건수도 14%p 감소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들의 노력이 ‘최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따라붙는다. 각종 대책을 연이어 내놨음에도, 대처가 미흡하다는 지적은 끊이질 않고 있다.

숙박업계 고질병 ‘중복 예약’ 피해 여전 
숙박 앱 그림자 같은 존재 “없앨 순 없다”


<일요시사>는 이달 초 오버부킹으로 피해를 봤다는 두 제보자와 연락이 닿았다. 이들은 각각 업계 1·2위인 ‘야놀자’와 ‘여기어때’를 통해 숙소를 예약했다.

먼저 A씨는 지난 4일 새벽, 야놀자를 통해 한 펜션을 예약했다. 잠시 뒤 카카오톡을 통해 ‘예약 완료’ 알림이 왔고, 다음 날에는 야놀자 앱으로 입실 안내가 전달됐다. 이를 모두 확인한 그는 다음 날 오후 5시경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A씨가 예약한 숙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놀란 마음에 야놀자 고객센터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 시간째, A씨는 야놀자 대신 펜션 예약 업체와 연락이 닿았다.

펜션 예약 업체는 A씨에게 “지난 4일 오전 10시쯤 예약 내역을 확인했다”며 “예약 금액이 잘못 올라간 것을 확인한 즉시 야놀자 측에 연락해 예약 취소와 가격 수정을 통보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야놀자 측이 이를 A씨에게 전달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A씨는 “펜션 예약 업체 쪽에 재차 확인해봐도 ‘분명 지난 4일 오전에 야놀자에게 통보했다’고 한다”며 “야놀자는 어떤 통보도 없었고, 취소 처리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당일에 입실 안내를 보내 끝까지 예약이 됐다고 믿게 했다”고 비판했다.

A씨는 이후로도 야놀자와 전화 연결을 재차 시도했다. 하지만 끝내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고육지책으로 카카오톡 상담을 시도했다. 그마저도 2시간 뒤인 오후 7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야놀자 측은 이어진 상담에서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했다. 야놀자 측은 A씨에게 “연휴 기간 동안 즐거운 여행을 계획하셨을 텐데, 저희 측의 과오로 황당함과 불편함을 끼친 부분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야놀자는 환불과 추가 보상도 약속했다. A씨가 동의하자, 그제야 예약 취소 조치가 이뤄졌다. 시간은 오후 7시58분. A씨가 숙소에 도착한 지 약 3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취소 없이
연락 두절

A씨는 “즐거워야 할 여행이 야놀자의 업무태만으로 엉망이 됐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3시간도 넘게 달려 숙소에 도착했는데 너무 허탈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뒤늦게 보상해준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이미 휴가를 위해 쓴 시간도, 노력도 모두 버려졌는데 그걸 주워 담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요시사>는 야놀자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관계자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여기어때에서 숙소를 예약한 B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는 지난 3일 전남 목포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 B씨 역시 예약 확인 알림과 입실 안내 문자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호텔에 도착하니 “방이 없어 체크인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B씨가 자초지종을 따져 묻자, 호텔 측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황에서 실수가 있었다. 오버부킹을 확인한 뒤 여기어때에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여기어때 측은 “숙소 측에서 통보가 왔을 때, 고객들에게 예약 취소 문자를 보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B씨는 여기어때로부터 취소 사실을 전달받은 적이 없었다. 여기어때로 예약한 다른 방문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여기어때 앱에서도 예약 취소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B씨는 “다른 방문객들한테도(문자를 받았는지) 물어봤다. 그곳에 있는 아무도 예약 취소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정말 문자를 보냈다면 그 많은 사람이 다 확인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으냐. ‘책임 회피용 멘트’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결국 B씨는 근처의 다른 숙소를 수소문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대규모 지역 축제가 열리고 있는 탓에 지역 숙소 대부분이 ‘만실’이었기 때문이다. 남는 방이 없으니, 안심예약제도 B씨를 도울 수 없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어때 측은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B씨는 우여곡절 끝에 시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에 들어갔다. ‘호캉스’를 망친 분을 삭히고 있던 그때, 여기어때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여기어때는 오후 8시가 넘어서야 예약 취소와 환불 절차를 마무리했다. B씨에게는 사과와 함께 유효기간이 한 달인 3만원짜리 쿠폰이 쥐어졌다.

알아서 조심
교차 검증 필수

B씨는 “앱에서 예약 취소한 뒤 알림을 보내거나 전화를 줬다면 서로 더 확실히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여기어때 측의 응대가 아쉬운 건 사실”이라며 “타지까지 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휴가 내내 찜찜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어때 측에 따로 바라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추후에는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며 “숙소 예약 앱인데 예약이 제대로 안 되면 무용지물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요시사>는 여기어때 측 입장을 물었다. 여기어때 관계자는 “취소 통보 문자를 발송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며 “예약 취소가 이뤄진 새벽 3시경 바로 문자를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만 불분명한 원인으로 문자가 전달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듯하다”며 “피해 고객에게 사과했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숙박업주로서도 ‘오버부킹’이 곤혹스러운 것은 매한가지다. 한 숙박업주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오버부킹은 구조상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업주는 “오버부킹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응 방식이 문제”라며 “ A씨와 B씨의 사례는 역시 오버부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숙박 앱의 대응이 미흡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숙박 앱의 과실로 오버부킹이 발생하는 경우가 또 있다”고 귀띔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오버부킹을 수습하기 위해선 ‘취소’와 ‘마감’ 절차가 모두 이뤄져야 한다. 오버부킹된 예약을 취소하고, 해당 객실을 마감 처리해 추가 예약을 막는 방식이다. 하지만 숙박 앱들이 예약 취소만 하고 마감 처리를 하지 않아 ‘제2의 오버부킹’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예컨대 1번 고객이 예약한 숙소를 2번 고객이 오버부킹했다면, 2번 고객 예약을 취소하는 동시에 예약을 마감해야 한다. 하지만 숙박 앱 측 과실로 예약 마감 없이 취소만 이뤄지면 또 다른 3번 고객이 오버부킹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갑질로 비춰질라” 적극적 해결 어려워
업체가 고의로 유도하는 경우도 목격

그는 “이런 허점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여러 번 몰렸었다”고 털어놨다. 잘못은 숙박 앱이 하고, ‘허탕’친 방문객들의 거센 항의는 업주가 받아내야 했다.

업주는 “야놀자에 확인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곧장 숙소로 온 오버부킹 고객이 있었다”며 “현장에서 입실 불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게 ‘택시 타고 멀리서 왔는데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고 따졌다.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이용객과 점주 모두 숙박 앱이 더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숙박 앱 관계자들은 “더 적극적인 노력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숙박앱 관계자는 “겉에서 보면 해결법이 간단해 보인다. 객실을 한 플랫폼에만 올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운을 띄웠다.

이어 “하지만 그걸 우리가 요구할 수는 없다. 단독 제공 요구는 공정거래법에 저촉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간혹 사업 성격에 따라 상품(객실)을 우리가 일괄 매입하고 단독으로 재판매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라며 “모든 숙소 예약을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오버부킹은 서비스 품질과 직결되는 문제다. 업계 전체 문제 해결을 위해 대책을 강구 중”이라며 “다만 더 적극적으로 나서 업주들에게 뭔가를 제안·요구하면 혹시나 ‘갑질’로 비춰질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개선 방법이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혹시 모를 방문객 피해는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재발 방지?
안일한 대응

한 업주는 “숙박앱 알림만 믿을 게 아니라, 숙소에 직접 연락해 예약 여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숙소와 앱은 환불해주면 그만이지만, 방문객은 시간·감정 낭비가 심하지 않느냐”며 “번거롭더라도 확실히 확인해서 스스로 피해를 예방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야놀자 ‘송해 광고’ 논란 

야놀자가 방송인 고 송해가 등장하는 광고를 한시적으로 다시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앞서 야놀자는 지난 3일 송해가 모델로 출연하는 광고 캠페인 ‘야놀자해’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하지만 이 광고는 지난 8일 송해가 갑작스럽게 별세하면서 방영이 중단됐다.

야놀자 측은 “고인을 추모한다는 의미로 방영을 중단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야놀자는 유족과 광고 집행 여부를 다시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야놀자는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전하려 광고에 참여했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TV와 온라인 채널에서 광고를 2주간 다시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광고에 나오는 고인의 모습은 인공지능과 딥페이크 기술 등을 활용해 합성된 것이다.

야놀자 관계자는 보도자료를 통해 “광고가 상영된 후 송해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반응이 많았다”며 “대한민국의 영원한 놀이꾼으로 야놀자와 함께했던 선생님을 영원히 추억하겠다”고 전했다.

여론은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야놀자 공식 유튜브에는 “이렇게나마 송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마지막까지 즐거움과 희망을 주신 송해 선생님의 마음을 기억한다”는 등 광고 재개를 반기는 댓글과 “위약금 조항 문제가 있을 테니 야놀자 측(입장)도 이해된다. 그래도 기업이윤을 위해 ‘고인의 뜻’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동원해 고인을 활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동시에 달렸다.

한편 야놀자는 2주 뒤 후배 MC가 모델로 참여한 새 광고를 공개할 예정이다.

해당 모델은 “송해 선배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광고 제작에 동참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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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