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뒤집듯’ 중대재해처벌법 한계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6.21 09:23:23
  • 호수 13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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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머리 아픈 세 가지 문제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공사현장은 늘 위험하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안전모 착용과 안전 난간 설치 등을 필수로 지정해도, 건물에 설치된 안전 난간·철골·지붕·작업 발판 등이 떨어져 노동자가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쉬운 구조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 ‘중대재해처벌법’이지만, 시행된 지 5개월 만에 책임자 처벌이 줄어들 상황에 처했다. 

‘중대재해’란 사망자가 1인 이상 발생한 재해,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2인 이상 발생한 재해를 말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직업성 질병자가 10인 이상 동시에 발생했을 때 중대재해로 정의한다. 

소규모 현장서 
사망사고 72%

이만큼 건설 현장은 항상 위험이 깔려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3월15일 발표한 ‘2021년 산업재해 사고·사망 현황’을 통해 지난해 산재 사망자는 828명이며, 전년 대비 54명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사고 사망자 수는 ▲건설업 417명 ▲제조업 184명 등 건설·제조업에서 70% 이상 발생했다. 이외 업종에서는 227명 발생했다. 재해 유형별로는 ▲떨어짐 351명 ▲끼임 95명 등 대부분 기본적인 안전수칙 준수로 예방 가능한 재래형 사고가 전체의 53.9%를 차지했다.

▲부딪힘 72명 ▲깔림·뒤집힘 54명 ▲물체에 맞음 52명 등으로 조사됐다.


주요 기인물별로는 ▲건축·구조물이 239명으로 절반 이상 발생했고 ▲기계·장비는 108명 ▲부속물 및 설비는 41명 순으로 많이 발생했다. 건설업의 경우 50억원 미만 소규모 현장에서 전체 사망사고의 71.5%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보호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사고가 난 뒤 그 무엇도 노동자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례로 2020년 3월4일 오전2시59분 충남 서산시 대산읍 롯데케미칼 대산공장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를 들 수 있다. 

당시 폭발사고로 1명의 노동자가 사망했고, 2명의 노동자가 크게 다쳤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동료를 잃은 동료의 유족은 회사와 보상 문제로 갈등했다. 피해자를 대신해 노동조합이 회사와 합의를 시도했지만, 회사 측은 유족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보상 금액만 통보하고 등을 돌렸다. 

“책임자 처벌 과도” 국힘 개정안 추진
노동계 “목숨 담보한 충성 경쟁” 반발

노조는 회사를 향해 항의 집회를 열며 반발했고, 회사는 마지못해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사망자의 시신은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12시간이나 장례식장에 안치돼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대산 공장 폭발사고가 ‘인재’라고 주장했다.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한 현장에 비숙련자를 고용해 인건비를 줄이는 등의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가령 공사현장에 17만5000원씩 일당을 지급하는 조건의 기술자 20명을 모집해야 한다면, 그중 실력 좋은 기능공은 한두 명만 뽑고 나머지 18명은 일당 13만원인 초보자나 아르바이트생을 뽑은 것이다.

이들을 관리하는 기술자도 고작 한두 명이 전부여서 제대로 된 교육이나 관리를 할 수도 없었다. 비숙련자들은 곧바로 현장에 투입돼 일했다. 그 결과 제대로 된 줄을 묶을 실력도 없는 노동자들 때문에 대형사고로 이어졌다.


문제는 대기업 사업장에는 이런 방식의 비용 절감이 만연했고, 이런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참사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고를 겪고 난 뒤 비극적인 시스템은 바뀌었다. 지난 1월25일부터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다. 노동계 측은 법 시행을 무척 반겼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 및 보건을 확보하기 위해 경영 책임자에게 의무를 부과한 법률이다. 경영 책임자는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아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처벌은 1명 이상 사망사고가 발생하거나 2명 이상 부상자가 발생한 기업의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그렇다고 모든 중대재해가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영 책임자가 현장에서 노동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면 처벌받지 않는다. 

계속되는 참사
‘인재’ 타령만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법 시행 이후 지난 13일까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 사건은 모두 83건이다. 고용노동부는 이 가운데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56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37건(중복 포함)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이 중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수사 중인 10건은 수사를 완료한 뒤 관할 검찰에 송치했다.

이 중 ㈜삼표산업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1호 사건이다. ㈜삼표산업은 지난 1월29일 경기도 양주 채석장 작업 과정에서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천공기·굴삭기 기사 등 3명이 토사에 매몰돼 숨지게 했다.

㈜삼표산업 양주사업소장 A씨는 경영 책임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혐의로 대표이사를 의정부 지검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기북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도 A씨를 포함한 현장 직원 9명과 본사 직원 3명 등 모두 12명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수사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 사건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사흘 만에 발생한 사고로 ㈜삼표산업이 골재 채취량을 늘리기 위해 채취 과정에서 발생한 돌가루와 같은 ‘슬러지(찌꺼기)’를 쌓아 놓았던 곳까지 작업을 진행하면서 발생했다.

고용노동부 수사 결과 ㈜삼표산업이 무리하게 작업을 진행하면서 현장 작업자 등을 통해 토사 붕괴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작업을 강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 발생 이후 대표이사 지시를 바탕으로 증거를 인멸한 정황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붕괴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방대한 양의 디지털 증거 분석 때문에 수사가 지연됐다. 이날 ㈜삼표산업뿐 아니라 ▲경남 고성 조선소에서 자재를 나르던 하청 노동자가 숨진 삼강에스앤씨 ▲유독성 세척물질로 인해 노동자 13명이 급성 독성 간질환 진단을 받은 경남 김해의 대흥알앤티 대표이사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기소 의견으로 검찰청에 송치됐다.

“조치 했어도…”
사업주 지키기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의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지난 10일,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 등 10인은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개정안)’을 접수했다. 기존 중대재해처벌법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정안은 현행법의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위반해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재해를 예방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고 게재했다.

이어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및 보건 확보를 위한 충분한 조치를 했어도 재해가 발생할 수 있고, 이런 경우 과도한 처벌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개정안에는 ‘산업안전보건법 제13조에 따른 기술 또는 작업환경에 관한 표준의 적용에 대한 사항을 중대재해 예방에 관한 것으로 한정한다’ ‘중대재해 발생 위험에 관한 감지된 정보를 송신·수신해 재해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정보통신시설을 설치한다’ ‘법무부 장관은 중대재해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사업장과 공중이용시설 및 공중교통수단이 기준에 적합하게 운용되는지 인증하는 기관을 지정할 수 있다’ 등이 담겼다.


이번 개정안에 대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개정안이 국민 목숨을 담보로 한 충성 경쟁이라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3조에 따른 기술 또는 작업환경에 관한 표준의 적용에 대한 사항을 중대재해 예방에 관한 것으로 한정한다’ 항목에서 문제 되는 지점은 산업안전보건법 제13조에서 지정한 표준 자체가 19개 이상 작업지침으로 존재해 과도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것만 본다면 작업지침이 더 줄어들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보건관계법령’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개정안은 산업안전보건법의 일부 등으로 축소해 입법 취지를 퇴색시키고 있다. 

5개월 동안 사건 모두 83건
실질적인 산재 예방에 도움?

정보통신시설 설치에도 반대 의견을 표했다. 현장에 다수 설치된 바디캠, CCTV 등은 명확한 법적 판단이 없는 것들이다. 

특히 최근 노동 현장에서 바디캠과 CCTV를 산업재해 예방 목적으로 설치하고 있지만, 안전을 위한 목적과는 달리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안전보건과 관련 없는 감시‧통제로 악용되고 있다는 의견이다.

현재 개인정보 보호법상으로는 개인정보 처리자와 정보 주체를 대등한 당사자로 전제하고 있으나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를 갖는 노동 현장의 현실에서 원래 목적과 취지를 잊은 채 악용될 수밖에 없다.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기준을 세워 노동자 감시·통제 등으로 악용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이런 방식은 빈약한 정보통신 기술로 인해 경영 책임자의 처벌 회피를 위한 법률적 근거가 된다는 지적이다.

법무부 장관이 지정한 인증기관은 경영 책임자가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현재 노동 현장에는 안전보건 인증제도인 ‘안전보건 경영시스템’이 있지만, 일부 기업은 인증을 형식적으로만 유지할 뿐 실질적인 산재 예방에는 소홀해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실정이다.

그 예로 현대산업개발의 광주 화정 아파트 참사가 있다.

결국 또 다른 인증이 실질적 산재 예방에 도움이 될 리 만무하며, 기존의 ‘안전보건 경영시스템’부터 제대로 정착시키라는 의견이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 제16조(정부의 지원) 등을 통해 강화할 수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국은 “국민의힘은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개악 시도를 중단하라. 산재 예방과 감소를 위해 정치권과 노사정이 할 일은 중대재해처벌법을 흔드는 것이 아닌 현장 정착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명히
악용될 것”

이어 “정부는 엄정한 수사와 대폭적인 지원을 해야 하고, 국회는 후퇴한 조문을 되살리는 개정 작업을 해야 한다. 노사는 실질적인 참여와 안전보건 투자를 통해 중대재해처벌법이 현장에 뿌리내리도록 할 필요가 있다. 여당은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발의안을 즉각 철회하라”고 강조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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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