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이 운영하는 LP숍 가보니…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2.03.14 16:53:44
  • 호수 13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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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직∼’ 모든 노래의 시작은 같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음악은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가 되기도 한다. 멜론, 애플뮤직, 스포티파이 등 다양한 음원 플랫폼이 나오고 있지만 명곡들은 LP를 수집해서 듣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회가 점점 편리해지고 있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시대다. 이와 역행하는 게 턴테이블과 LP(Long Playing Record)판이다. 음악시장이 큰 미국에서는 LP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국내 가수도 LP를 내고 있고 한정판은 구하기 힘들 정도다. 

장당 2000원

지난달 22일 서울시 중구 신당동 한 주택가에 위치한 LP숍 ‘모자이크 서울’을 찾았다. LP를 파는 곳이라면 화려한 간판이 있을 법도 한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mosaic(모자이크)’라고 적힌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나서야 매장 위치를 파악했다.

매장 창문에는 집중해서 봐야 볼 수 있는 레코드숍이라는 글씨와 함께 운영 시간, 전화번호, 메일, 인스타그램 등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매장 문을 열고 입장했지만 점원의 격한 환영이나 인사는 없었다. 점원과 손님은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고 매장 안을 가득히 채운 LP가 기자를 반겨줄 뿐이었다. 


흰색과 청록색이 조합된 매장은 갈색 가구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대여섯 명만 들어와도 비좁을 것 같은 내부는 LP로 벽면까지 가득 찼다. 과거 비디오 대여점이나 만화책 방에서 느낄만한 아늑한 느낌이 났다. 

이곳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프랑스 외국인이 운영한다. 사장의 이름은 커티스 캄부. 한국에 온 지 10년된 그는 음악 관련 일을 하다가 지금은 음반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커티스 캄부는 “음악 관련 종사자이며 음반 판매를 한 지는 오래됐다. 나에 대한 얘기보다는 이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은 음반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 매장이다. 다른 매장에 비해 수입하는 LP 양이 많은 편”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캄부의 말대로 매장 안을 둘러보니 1000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LP판들이 이목을 끌었다. 매장 중앙도 모자라 벽면을 가득 채운 LP는 인테리어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LP를 보유하고 있냐는 물음에 커티스 캄부는 “현재 보이는 것만 3000장이고 따로 보관하고 있는 게 2000장이 있어 총 5000장 정도 갖고 있다. 1만장, 2만장이 넘을 때도 많다. 소장하고 있는 LP 개수는 시시각각 변한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회전율이 좋다. 다음 달이면 또 다른 음반으로 매장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곳은 록, 힙합, 재즈, 하우스,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구분해 LP를 비치했다. 고객의 음악 장르를 취향에 맞춰 찾아볼 수 있게 하는 작은 배려였다. 수많은 LP를 구하기 위해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터.

그에게 슬쩍 물었지만 “영업 기밀”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상태가 좋고 저렴한 LP를 찾는 방법은 인맥이라고 귀띔했다. 


LP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입문곡’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에 커티스 캄부는 “그런 건 따로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음악으로 단계를 나누거나 레벨을 나누는 건 맞지 않다. 자신이 직접 다 들어보고 취향을 찾는 행위를 해야 한다”며 “LP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니다. 음악을 듣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음악에 순위나 랭킹을 매기지 말고 자신만의 취향을 찾길 바란다. 모자이크 서울에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있다”고 말했다.

록, 힙합 등 다양한 장르 구분
턴테이블 통해 청음할 수 있어

젊은 층이 LP 문화 입문에 꺼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가격 때문이다. 음원 플랫폼을 구독하면 매월 1만5000원정도 결제 후 음악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다. 반면 최근 출시되는 LP 가격은 4~5만원선이다. 재출시되는 앨범 같은 경우에는 15만원을 웃돌기도 한다. 

모자이크에서는 중고 LP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단돈 2000원으로도 구입할 수 있는 LP가 많다. 매장을 둘러보는 손님 연령층을 살펴보면 20~30대가 주를 이룬 것을 보면 저렴한 가격대가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커티스 캄부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게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매장에는 저렴한 LP는 2000원으로 책정돼있고 보통 7000원에서 1만원 정도 한다. 그 다음 비싼 게 2만원에서 2만5000원정도 수준”이라며 “LP 가격은 공급과 수요에 따라 바뀐다. 비틀스, 마이클 잭슨 등 유명한 아티스트라고 해도 LP를 많이 찍으면 저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곳의 백미는 LP를 직접 청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카세트테이프와 CD 세대였던 기자에게 턴테이블을 활용해 LP를 직접 들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수많은 LP 중에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민해경의 ‘제1회 미국 국제 가요제 그랑프리 및 최우수가창상 수상곡’이라고 표기된 앨범과 힙합가수 팀독의 앨범 총 2장의 LP를 집었다. 국내 가요 카테고리에는 민해경뿐 아니라 희자매, 방미 등 과거 국내 가요계를 휘어잡은 가수들의 앨범도 있었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턴테이블 사용법과 함께 LP 잡는 법 등의 설명을 들었다. 꽤 큼지막한 LP를 잡을 때는 손바닥으로 밑면 중앙 라벨에 대고 엄지로 LP 가장자리를 잡아 내피에서 뺀 다음 양손으로 턴테이블을 걸어야 한다. LP트랙에 손자국이 남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귀에 헤드셋을 낀 뒤 LP를 턴테이블 가장자리 끝 부분에 바늘을 위치시켜야 1번 트랙부터 들을 수 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은 분명 음원 스트리밍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음악을 듣기 위한 과정을 거친 덕분에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도 받았다. 

팀독의 ‘Tim dog i get wrecked’를 들을 때 공연장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 보니 1곡이 끝나버렸다. 턴테이블 옆에 포스트잇으로 ‘구매 목적을 위한 손님을 위한 것’이라는 글귀를 보고 헤드셋을 내려놓고 LP를 정리했다. 

커티스 캄부는 “청음은 5장 정도 들을 수 있다고 적어놨다. LP를 구매할 의향도 없으면서 계속 듣는 무례한 손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옷 가게에서도 구입할 목적이 없지만 여러 벌의 옷을 입는 것과 같다. 턴테이블이 2개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손님을 위해 배려하는 자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LP 판매뿐 아니라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서너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간이다. 다락방 같은 느낌은 이 공간을 더욱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메뉴는 핸드드립 커피와 민트 티 등 두가지 뿐이지만 3500원의 가격으로 여유를 즐기기엔 충분하다.

5000장 보유

커티스 캄부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와 취향을 이야기하는 등 소통의 장이 됐으면 좋겠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나 모임은 많다. LP는 잠깐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전부터 자리 잡은 문화”라고 설명했다. 


<9do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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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