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소상공인 두 번 울리는 ‘해썹’ 불신론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3.14 16:04:28
  • 호수 1366호
  • 댓글 0개

비싸게 주고 차는 ‘안전 완장’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식품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공급’ ‘안전성’ ‘기호성’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특히 식품의 안전성이 무너지면 사람 건강에 바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안전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식품 안전성을 위해 정부는 1997년 해썹(HACCP) 근거 규정을 신설했지만 신뢰성·효율성 문제가 계속되고 있어, 소규모 식품업체들은 해썹 때문에 문을 닫는 경우도 발생한다.  

해썹(HACCP)은 위해 요소 분석(Hazard Analysis)과 중요 관리점(Critical Control Point)의 영문 약자다. 여기서 말하는 ‘위해 요소 분석’이란 원료와 공정에서 발생 가능한 병원성 미생물 등 생물학적·화학적·물리적 위해 요소를 분석하는 것이다.

너무 힘든
인증 과정

‘중요 관리점’은 식품의 위해 요소를 예방·제어 또는 허용 수준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공정이나 단계를 중점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즉 해썹은 식품의 원재료부터 제조·가공·보존·유통·조리단계를 거쳐 최종 소비자가 섭취하기 전 발생할 우려가 있는 위해 요소를 규명하는 것이다. 

해썹 의무적용 품목은 ▲어육 가공품(어묵) ▲냉동수산물(어류, 연체류, 조미 가공품) ▲냉동식품(피자류, 만두류, 면류) ▲과자류(빙과류) ▲비가열 음료 ▲레토르트식품 ▲김치류(배추김치)다.

해썹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사전단계에서 ▲해썹 팀 구성 ▲제품설명서 작성 ▲사용 용도 확인 ▲제조공정흐름도 작성 ▲공정흐름도 현장 확인을 거친다.


본 단계에서는 ▲위해 요소 분석 ▲중요 관리점 결정 ▲한계 기준 설정 ▲모니터링 체계 확립 ▲개선 조치 방법 수립 ▲검증 절차 및 방법 수립 ▲문서화 및 기록유지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하면 해썹 인증  마크를 받는다. 하지만 사후관리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해썹 인증이 취소된다. 이 같은 전 과정은 식품의약안전처(이하 식약처)에서 관리한다.

현재까지 해썹 인증 마크를 받은 업체는 ▲식품 인증업소 9251곳 ▲축산물 인증업소 1만4887곳 ▲안전관리통합 인증업체 62곳으로 총 2만4200곳이다.

해썹 인증을 받은 업체가 매년 확대되는 추세다. 이 같은 추세로 보면 식품 안전성에 문제가 없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과정을 다 밟기가 너무 힘들고 시설 투자에도 많은 돈이 들어가며, 시설 유지가 매우 어렵다. 

이런 문제점에 더해 사후관리도 문제가 되고 있다. 2015년 2월2일에는 떡 전문 판매 기업인 송학식품의 떡볶이용 떡에서 대장균이 발견돼 해썹 인증이 취소됐다.

시험 비용에 수백∼수천만원 필요
“의무 적용 아닌 청결로 판단해야”

2018년 9월5일에는 풀무원푸드머스가 공급하고 더블유원에프엔비가 제조한 우리밀 초코블라썸케익 제품이 문제가 됐다. 해당 제품을 먹은 학생 2207명이 식중독 의심 증세를 보였는데, 더블유원에프엔비는 해썹 인증을 받은 곳이었다.


지난해 9월에는 해썹 인증을 받은 던킨도너츠 공장의 위생이 논란이 됐고, 올해에는 해썹 인증을 받은 1호 김치명인의 한성식품도 큰 논란이 됐다. 

한성식품은 곰팡이가 핀 배추로 김치를 만들었고, 공장 내부 곳곳과 설비된 기계에도 곰팡이가 껴 있었다. 천장은 누렇게 변해 있으며 물방울도 맺혀 있었고, 비가 오면 공장 전체에 물이 샜다.

하지만 식약처가 현장점검을 나올 때는 이미 깨끗하게 청소를 했기 때문에, 식약처는 공장 내 용기와 시설에서만 문제점을 발견했다. 

당시 공익신고자가 8개월 동안 모은 내부 영상과 보고서에는 불량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식약처가 현장 조사를 갔을 때 실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식품위생법 위반이 인정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과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처하지만, 한성식품은 과태료 50만원을 문 게 전부였다.

한편 한성식품은 2005년에 식약처의 ‘기생충 알이 검출된 김치 리스트’에 포함된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성식품의 해썹 인증은 취소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식약처 관계자는 해썹 부적합으로 나와도 해썹 인증이 아니고, 식품위생법상 지자체가 행정처분을 의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소비자다.

안전성 보장?
신뢰도 제로

스스로를 임산부라고 밝힌 소비자는 한 포털사이트에서 댓글로 “명인김치는 ‘명인’이라고 광고하면서 가격을 더 비싸게 팔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소비자를 기만하니 황당하다. 먹는 거로 장난치면 천벌 받는데 이참에 크게 벌받고 사업을 접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미 한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번거롭고 힘들어도 김치를 사서 먹는 것보다는 해 먹는 게 안전하겠다”는 의견이 퍼지고 있다.

여러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해썹 인증은 식품 안전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해썹의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식약처는 2020년 12월1일부터 연 매출 1억원 미만 또는 종업원 5인 이하 업체도 해썹 적용 대상으로 확대됐는데, 국내 식품업체의 80%가 연 매출 1억원 미만 또는 종업원 5인 이하에 해당한다.


이런 방침으로 소규모 식품업체는 큰 타격을 받았다. 소규모 식품업체가 해썹 인증을 받으려면 너무 큰 돈이 들기 때문에 생업을 포기하게 되는 사례도 발생한다. 

먼저 해썹 인증을 위해서는 고가의 금속검출기를 구매해야 한다. 이 제품은 700만원에서 1500만원 이상의 돈이 들고 운영을 위해서 직원도 추가로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금속검출기 모니터링 일지도 허위로 작성한다는 현장의 의견이 많다. 

울부짖는
소규모 업체

시험 비용에 필요한 돈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이상 소요된다. 이 시험은 원료·작업 과정 중의 위해 파악을 생물학적 위해·화학적 위해 및 위생관리 상태로 나눠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음식 가짓수가 다양한 급식업소는 매년 억대의 시험 비용 등이 들어간다. 모니터링 장비들인 온도계, 저울, 타이머 등 검‧교정 비용도 들고 문서 작성을 위한 별도의 인력도 채용해야 한다.


업체들은 공장을 운영하며 해썹 인증을 병행하기 어렵다. 보통은 해썹 인증을 받기 위해 컨설팅 회사에 의뢰하니 추가 금액이 더 발생한다.

결국 해썹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대부분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 같은 이유로 해썹 인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세 식품업체가 늘어나고 있다. 

해썹에 의한 소규모 식품제조업의 목소리가 국민청원에까지 올라왔다. 해당 글을 올린 A씨는 식품 제조가공업을 운영 중이며, 직원은 2명이다. A씨는 10만원에 제품을 납품하면 재룟값, 배달비, 월세, 인건비, 세금 빼면 2만원이 안 남는다고 밝혔다.

또 공장은 방 3칸으로 운영 중인데, 해썹 규칙은 최소한 8개를 만들어야 한다. 사용하지도 않는 방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작은 기업은 해썹 인증을 받기 위한 추가 서류 업무를 잠을 쪼개 처리했다. 

A씨는 “수많은 업체 중 몇 천만원을 들여 쉽게 공사할 수 있는 업체가 얼마나 되냐. 이 모든 것을 말해도 공무원들은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해썹 의무 적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건강하고 깨끗한 식품 브랜드로 만들어서 국민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전했다.

수원에서 식품제조업을 하는 B씨도 “5인 이하 식품제조업에게 해썹 의무 인증 기간을 늘려달라”고 주장한다. B씨의 설명에 따르면 약 10만개의 업체가 해썹으로 불법영업을 하게 됐다.

그는 홀로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며 식품제조업을 꾸려갔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백화점 즉석식품 판매행사는 모두 공산품 행사로 바뀌었고, B씨의 빵 공장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간 확보 어렵다” 시장 상인들 울상
90% 이상 불법시설 전락해 생계 걱정

납품금액은 4분의 1로 줄었다. 새로운 거래처와 계약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고, 덕분에 납품금액은 늘었다. B씨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해썹이었다. 해썹 시설비를 마련할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B씨는 담당 공무원에게 방앗간이나 떡집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고 있냐고 물으니, 담당 공무원은 “5인 이하 사업자들에 대한 방침은 내려온 게 없다. 즉석판매제조가공업들은 업종 변경을 하라고 유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B씨는 “수만명의 자영업자가 해썹 때문에 생계를 잃고 불법영업을 하게 되는 상황이다. 정부는 대책을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축산물 시장도 비상이다. 축산물 시장이 해썹 인증을 받으려면 66㎡ 이상의 공간이 확보돼야 한다. 원재료가 가게로 들어오는 별도의 입구와 보관실, 작업실 등 분리된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0여개의 업소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마장축산물시장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마장축산물시장에는 500여곳이 해썹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 중에서 10% 정도만 해썹 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의 시장 상인들은 갑작스레 불법시설로 전락해 생계를 걱정해야 될 상황을 맞았다. 

축산물 관계자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해썹 인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썹 인증을 받은 사람은 계속 유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 그대로 ‘배 째라’식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며 “해썹 인증을 받았어도 이후에 계속 관리하면서 드는 돈이 커 큰 부담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식품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우선 한국은 해썹 인증을 받기 위해 컨설팅을 받고 공장 시설 투자에 초점을 둔다. 결국 해썹 인증을 위해선 해썹을 위한 필수시설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은 해썹이나 국제식품안전협회(GFSI)인증을 모두 민간인증 기관에서 주도한다. 시설면에서는 한국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기록 관리나 개별검사 등 감시체계가 훨씬 까다롭다. 미국 식품 공장에서는 기록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회사 자체적으로 엄한 처벌을 내린다.

발각 시 정부기관으로부터 형사고발을 당하거나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는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식품 컨설팅 관계자는 “한국은 법 위반 시 부과되는 형 집행이 너무 가벼워서 해썹 관리가 제대로 안 된다. 현실적인 해썹 제도의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alswn@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