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특별인터뷰③ 종교계 큰어른의 나라 걱정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 “내가 아프면 상대도 아픕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다. 남북·동서·남녀·세대·빈부 등 어느 하나 갈라지지 않은 곳이 없다. 역설적으로 통합이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동안 국민통합에 앞장서왔던 종교의 역할에 의문부호가 붙는다. <일요시사>가 추석을 맞아 종교계 큰어른,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을 만나 그 해법을 청했다. 

오후 6시20분. 전남 구례 소재의 화엄사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운고각으로 모여들었다. 저마다 자리를 잡은 사람들 사이로 북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범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땅거미가 느릿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한낮의 땡볕이 무색하게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화엄사의 저녁 모습이었다. 

19교구 본사
50여개 말사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 품은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 중 19번째 교구다. 정확한 명칭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지리산 대화엄사’. 전남 구례군에 위치한 우리나라 대표 사찰 중 한 곳이다.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만 1400~1500년에 이르는 ‘천년 고찰’이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 화엄사의 가람 배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보제루 정면으로 대웅전이, 좌측으로 각황전이 우뚝 서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인 경우가 많은데, 화엄사에서는 각황전이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국보67호로 지정돼있는 각황전은 국내 최대 목조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사라졌다가 조선 숙종 때 재건했다. 각황전이라는 이름도 숙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황전 뒤편으로 난 108계단을 오르면 역시 국보(35호)로 지정된 4사자 3층석탑이 나온다. 4사자 3층석탑은 현재 보수 중으로 추석 명절 이후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이 108계단 너머를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꼽았다. 덕문 스님은 “그곳에서 2년 정도 살 기회가 있었다. 화엄사를 가장 대변하는 곳”이라며 “바깥에는 태풍이 불어도 그 공간만큼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화엄사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오전 화엄사 삼전에서 덕문 스님을 만났다. 덕문 스님은 2017년 4월 화엄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올해 3월 재임에 성공했다. 여수·순천·곡성·광양·구례 등 전남 동부권 다섯 지역을 관장하는 교구이면서 50여개의 말사를 관리하는 화엄사의 교구장으로 5년째 활동 중이다. 

“이전에 계셨던 선배 스님들이 도량을 잘 가꿔주셨고, 이미 많은 부분을 일궈내셨기 때문에 저는 그저 숟가락 하나 얹는 정도였습니다. 다만 현재 불교를 포함한 종교가 국민에게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있었습니다. 화엄사가 국민은 물론 지역민과 불자들에게 다가가도록 할 수 있는가에 가장 초점을 맞췄습니다.”

물질과 과학의 시대
사라진 종교의 역할

취임식을 문화재 학술행사로 대체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문화재 활용 부분에 있어서는 관심이 남다르다. 과거에는 정부 차원에서 문화재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젠 문화재를 통한 대중의 마음 정화와 치유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계절마다 여러 이벤트를 열어 대중과의 접촉면을 늘려간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화엄사는 올해 ‘홍매화·들매화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3월), ‘요가대축제’(6월), ‘모기장 영화 음악회’(7월) 등의 행사를 연달아 열었다. 코로나19로 법회 등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행사가 줄어들자 야외에서 대중을 만나는 자리를 만든 것.


덕문 스님은 코로나19로 집단 우울증에 빠진 국민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어떤 곳을 가도 환하게 웃는 사람보다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됐다. 지하철만 타도 고개를 든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 공간(화엄사)에서 국민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호응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화엄사 광주 빛고을 포교원 건립도 마찬가지다. 덕문 스님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광주에 포교원을 짓기 시작했다. 광역도시면서 공용 지역인 광주에 포교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은 30년 전부터 있었지만 현실 여건상 이루지 못했다가 덕문 스님 취임 이후 시작해 현재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포교원은 불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24시간 열려 있는 곳이기 때문에 밤에라도 문득 마음속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가서 기도하고 참선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싶을 때 들어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곳이 포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심 속에 있는 불교 사랑방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19년 4월 말사인 천은사의 입장료를 폐지하는 데 화엄사 교구장으로서 결단을 내린 부분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천은사가 자리한 지리산은 1967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됐다. 당시 정부는 천은사 소유의 토지를 군사작전 도로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후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관광객 유치 명목으로 벽소령관광도로 개발이 시작됐다. 

천은사는 문화재 보호를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게 됐는데,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지리산을 찾는 방문객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천은사 입장료 문제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지역민들과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만큼 일종의 숙원이었다. 덕문 스님은 천은사 주지 종효 스님, 관계기관 등과 논의 끝에 천은사 입장료 폐지를 이끌어냈다. 지난 3월에는 이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야외 행사

“국가에는 여전히 할 말이 있지만 국민이 불편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사찰의 존재 의의는 국민입니다. 국민을 위해서, 국민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이 가난해지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현재 주변을 잘 정돈하고 여건을 만들었더니 천은사뿐만 아니라 화엄사도 더 많이 찾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화엄사에서 시행 중인 승가복지 시스템도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 5년 전 덕문스님은 ‘출가부터 열반까지’를 약속으로 내걸었다. 스님들의 교육, 의료, 연금, 주거까지 책임지는 승가복지 체계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한 것. 그 약속은 현재 종단 내 모범사례로 꼽힐 만큼 안정된 상태다. 

“표현은 ‘승가복지’라고 하고 있지만 저는 ‘기본’을 마련해 드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은 중병에 걸리면 곡기를 줄이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일찍 떠납니다. 몸이 건강했더라면 더 많은 깨달음을 얻어서 많은 국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건강을 해쳐 떠나는 스님들을 보면서 승가복지의 기틀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덕문 스님은 스스로를 ‘흉악한 사판승’으로 표현했다. 사판승은 주로 잡역에 종사해 사찰을 유지하는 데 힘쓰는 스님을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절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스님이다. 참선을 통해 수행에 정진하는 이판승과 구분된다.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을 뜻하는 사자성어 ‘이판사판’이 여기에서 유래됐다. 

덕문 스님은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 이른바 이판승에게서 ‘우리나라 불교의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는 “수행을 하려는 스님들, ‘내가 이 절에 살겠습니다’하고 대기하는 스님들이 몇 년씩 밀려 있다. 그 정도로 아직 수행하고자 하는, 수행을 갈구하는 모습들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 모습에서 우리나라 불교의 희망이 있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덕문 스님의 지난 5년은 ‘대중 속으로’라는 말로 요약된다. ‘구례군’ 하면 화엄사, ‘지리산’ 하면 화엄사를 떠올렸던 옛날의 영광이 사라지고 어느 새 ‘잊혀가는’ 처지가 된 사찰을 재부흥시키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시간이었다. 화엄사를 활짝 열고 대중을 품어 종교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덕문 스님은 세상의 풍파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불교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남북은 물론 동서·세대·남녀·빈부 등 갈등이 갈등을 낳는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인 화합을 실천하기 위해 화엄사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공업중생
일체유심조

또 물질과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는 시대에 사찰의 역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전제돼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불교에서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바 세계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를 되짚어보면 하루라도 조용한 때가 있었던가 싶어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고 감염병도 돌았고요.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서도 남북이 갈려 있고 동서가 화합하지 못하며 빈부 갈등과 세대 갈등 등 많은 갈등이 존재할 것이라고 봅니다.”

“물질과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게 바로 개인주의, 이기주의입니다. 또 마치 다음 생이 없는 것처럼 인생을 막 사는 모습도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업중생’ 즉 업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코로나19로 ‘내가 아프면 상대방도 아플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처럼 한 나라, 한 국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덕문 스님은 ‘큰스님’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첫손에 꼽았다. 화쟁사상은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교리를 말한다. 우리나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을수록 대화와 소통으로 통합을 꾀하는 화쟁 사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마음을 서로 공유하고 나눌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서로 만족의 정도를 낮추면 화합이 쉬워질 텐데 자기만족은 낮추려고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이기적인 생각을 갖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모두가 종교‧사회‧국가 등 모든 부분에서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화합된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3월 화엄사는 교구 본사 중에서는 최초로 미얀마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연대와 지지를 보내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우리도 1980년대 군사정권을 딛고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미얀마 역시 우리나라의 군사정권 시절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미얀마가 현재 상황을 잘 극복해 우리나라처럼 민주화가 꽃피웠으면 합니다. 희망을 갖고 지지하며 또 성원합니다.”

대중의 신뢰 회복해야
정치인 진정성 중요해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 인사들을 향한 당부도 전했다.

덕문 스님은 “나는 정치하는 사람에게 매번 물어본다. ‘정말 국민을 대변하고 그런 자세로 있는지’ ‘(국민 위에)군림하거나 부리고 있진 않은지’ 일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정성이라 여긴다. 우리 국민도 진정성을 찾아내는 것이 선택의 중요한 덕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덕문 스님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국민에게 ‘화엄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다. <화엄경>의 중심 사상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일체유심조’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을 안겼다는 ‘해골물’ 이야기와 함께 자주 인용된다.

“지금처럼 과학과 물질이 만능인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부분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의지처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가장 허해지는 부분은 마음일 것이고,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조금만 잃으면 안 좋은 선택을 하잖아요. 그 이유가 마음의 허함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화엄 사상을 통해 국민의 마음 만족도가 충족되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엄사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10월의 첫 삼일, 화엄사가 다시 한 번 대중 속으로 뛰어든다. 화엄사의 사계절 행사 중 가장 큰 축제인 ‘화엄문화대축제’가 다음달 1일부터 3일까지 열리는 것.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열리지 못했다. 올해는 규모를 줄이거나 그래도 어려우면 비대면으로라도 반드시 강행한다는 입장이다. 

첫째 날에는 ‘걷기 박사’ 성기홍 박사가 주도하는 트래킹 행사가 열린다. 트래킹 코스는 ‘어머니의 길’로 명명했다.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어머니처럼 쓰다듬어주고, 어머니처럼 언제든지 위로 받을 수 있는 화엄숲길을 국민들에게 알리겠다고 강조했다. 

둘째 날에는 국보 301호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이 공개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괘불로, 역사적·미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원본은 1년에 딱 한 번 괘불제를 통해 공개된다.

덕문 스님은 “야외에 걸괘 그림을 걸고 부처님을 모시고 하는 법회를 ‘야단법석’이라고 한다. 그 야단법석을 괘불제를 통해 진행해 보려 한다”고 기대를 드러냈다. 

마지막 날에는 화엄사의 정신세계를 담은 영성 음악제가 열린다. 이날 순천 송광사에서 화엄사를 거쳐 실상사를 넘어 법보사찰 해인사, 불보사찰 통도사까지 22일의 여정을 진행 중인 순례단이 들를 예정이다. 

마음의
의지처

“화엄사 보제루 편액(현판)을 보면 ‘화장(華藏)’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처럼 향기로운 마음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화엄사에서 오시는 모든 분이 늘 향기롭고 마음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리산을 바라보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또 스님들이 수행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간절한 마음을 기원하셨으면 합니다. 또 화엄사를 그런 향기 가득한 사찰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