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넘은 금융권 모럴헤저드 실태 고발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2.09.12 14: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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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돈으로 '빚잔치'…"내 돈 어디에 맡기나?"

[일요시사=한종해 기자] 돈을 믿고 맡길 데가 없다. 집에 쌓아두자니 '도둑'이 무섭고 통장에 넣자니 '은행'이 무섭다. 은행들이 고객돈으로 개인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횡령·배임·불법대출을 넘어 고액배당·정보유출까지 탐욕은 끝이 없다. 징계자는 작년에 비해 2배 이상 급증했는데 감시망은 여전히 허술하기만 하다.

 

경기 일산경찰서는 지난달 29일 고객이 예치한 돈을 빼돌린 혐의로 우리은행 최모 차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우리은행 등에 따르면 최씨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6월까지 1년간 13회에 걸쳐 고객돈 31억원을 횡령하다 은행 내부감사에 적발됐다.

최씨는 고객이 정기예금에 가입하고 2억5000만원을 맡겼을 때 1000만원만 입금하고 2억5000만원이 입금된 것처럼 통장에 가짜 잔액을 붙이는 수법을 사용했다. 정상거래 내용을 임의로 출력해 통장에 오려 붙이는 수법으로 고객들을 속였지만 은행 간부라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았다.

31억 가져갔는데
은행 1년간 몰라

최씨는 30억원이 넘는 돈을 주식 선물옵션에 투자했다 모두 탕진한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우리은행이 이러한 사실을 한동안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 6월에서야 감사를 통해 적발해 경찰에 고발했다.


이에 앞서 우리은행은 지점장급 전·현직 은행원 3명이 지난 2005년 6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채권보전절차 없이 1350억여원의 PF대출을 해 주는 조건으로 수억원의 뭉칫돈과 함께 골프 등의 접대를 받은 것이 밝혀져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이 일로 우리은행은 서울 회현동 본점이 경찰 특수수사과에 압수수색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최근에는 서울 양재동 화물터미널 부지에 복합 유통센터를 조성하는 파이시티 사업과 관련해 의혹이 일고 있다.

지난 2010년 우리은행이 파이시티의 사업권을 뺏기 위해 청와대에 비리 첩보를 제보하고 의도적으로 파산신청을 냈다는 주장인데 은행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신한은행에서는 직원 18명이 고객이 낸 수수료 수억원을 가로채 전원 면직처리 당한 일도 발생했다.

지난 3일 금감원 등에 따르면 신한은행 서울 서교동 지점 한 직원은 지난해 기업고객들이 납부한 신용평가수수료 등 각종 1회성 수수료 2억여원을 수차례 걸쳐 빼돌리다 올해 초 고객의 민원제기로 덜미가 잡혔다.

이를 계기로 신한은행이 전체 지점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벌였고 이 결과 직원 18명이 적발됐다. 조사결과 이들은 수수료 영수증을 허위로 발급해준 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적게는 40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천만원에 이르는 돈을 횡령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8일에는 2010년 9월 '신한사태'를 앞두고 신한은행 직원들이 재일교포 주주의 계좌를 무단으로 열람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금감원은 "신한은행 사태를 앞두고 양용웅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장과 그 가족의 계좌를 신한은행 측이 무단 열람했다는 민원이 제기됐다"고 밝혔다. 이어 "계좌 열람 권한이 있는 직원들이 본 것인지 아니면 무단으로 열람한 것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며 "오는 10월 신한은행 종합검사 때 이 부분을 집중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횡령·정보유출·서류조작까지 '비리백화점'
비리 징계자 지난해 2배…근본 대책 절실

양 회장은 신한지주 사외이사를 역임했으며 신한지주 주식 100만주 이상을 가진 재일교포 주주모임 회원이다. 양 회장은 2010년 신상훈 전 사장의 사퇴를 반대한 바 있다. 때문에 양 회장 계좌 무단 열람이 신 전 사장 진영의 약점을 잡기 위해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파문이 예상된다.

감사원이 지난 7월23일 발표한 '금융권역별 감독실태' 공개문에서는 신한은행이 개인신용대출 금리를 매길 때 대출자의 학력 수준에 비례해 차등을 뒀다고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신한은행은 고졸 이하 대출자에 13점을, 석·박사 학위자에는 54점을 줬다. 4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 신용평점은 곧바로 대출승인 여부와 대출금리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당시 신한은행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민은행은 아파트 중도금 대출 서류를 직원이 고객 동의를 받지 않고 조작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물의를 빚고 있다. 여기에 본점 영업감사부가 금감원의 근거리 감독하에 중도금 집단대출 서류를 검사하는 중 약 4000~5000여건의 조작사실이 적발되면서 "직원 실수"라고 해명한 국민은행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출 만기를 은행직원이 멋대로 바꾼 사례가 가장 많았고 고객 대신 서명을 하거나 대출금액을 고친 일도 있었다.

지난 7월에는 고객돈을 마음대로 인출해 쓴 전직 국민은행 고객관리팀장 이모씨에 징역 2년이 선고됐다. 이씨는 2007년 8월 중순부터 지난해 9월 말까지 중랑구 국민은행 모 지점의 VIP고객관리팀 사무실에서 27회에 걸쳐 고객 5명의 예금 약 10억4000만원을 인출해 생활비 등 개인적인 용도로 쓴 혐의로 기소됐다.

올해 1월까지 고객예금을 관리하며 펀드와 보험 등 각종 금융 상품의 관리와 판매 업무를 맡아왔던 이씨는 펀드 실적을 높이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했으나 큰 손실이 발생해 고객 예금에 손을 댄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투자한 주식에서도 손실이 발생하자 생활비와 개인 주식 투자를 위해 고객돈을 인출하기도 했다.

국민은행에서는 지난 2월 경기도 포천의 한 지점에서도 지점장이 자신이 관리하던 고객돈 28억5000만원을 인출해 달아난 사건도 있었다.

하나은행은 지난 5월 금감원으로부터 기관경고와 과태료 2750만원 처분을 받았다. 또한 임직원 28명을 징계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상품권 횡령, PF 대출 부당 취급, 이사회 결의의무 위반 등 온갖 비리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당시 금감원에 따르면 하나은행 직원 김모씨 등은 2008년 6월부터 3년간 기업들이 국민관광상품권을 수천만원씩 사들인 것처럼 서류를 조작하고 상품권을 빼돌려 현금화했다. 횡령 규모가 174억4000만원에 달했지만 하나은행 측은 사고를 인지하지도 못했다.

우리·신한·국민·하나
그들만의 '돈잔치'


하나은행은 2268억원 규모의 PF 대출을 취급하면서 여신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1506억2800만원의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대주주 특수관계인들에게 총 7100억원의 신용공여 안건을 이사회에서 처리하면서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는데도 안건을 의결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파생상품 회계 부당처리 ▲금융거래 실명확인 의무 위반 ▲예금잔액증명서 부당발급 ▲고객신용정보 부당 조회 ▲대출금 용도 외 유용 및 사후관리 불철저 ▲담보 및 보증 설정업무 불철저 ▲그룹 내 임직원 겸직업무 불철저 ▲은행장 승인 없이 외부 영리업무 영위 등의 문제가 발견됐다.

모럴헤저드는 제2금융권에서도 심하게 나타났다. 특히 신협·농협·수협 등 상호금융회사 행태가 '위험수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5일 금감원에 따르면 광주광역시 우산신협은 직원 가족 등 특수관계인에게 11억원을 빌려주고 대출 상환이 연체되자 7000만원의 대출을 일으켜 이자를 메웠다. 또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대출 이자를 내부 전산에서 삭제하기도 했다. 더욱이 우산신협은 5차례나 징계를 받은 직원 3명을 9차례나 승진시키고 3차례 자체 표창과 특별 승급 혜택도 부여했다.

불법대출이 적발되자 징계를 피하기 위해 공사를 미끼로 건설업자에게 4000만원을 빌려주고 다시 받아 갚기도 했다.


지난 5월에는 역시 광주시에 소재한 퇴촌신협에서 여직원 김모씨가 10년에 걸쳐 고객 예금 66억여원을 횡령한 사건도 발생했다.

신협·농협·수협
'비리백화점'

김씨는 조합원 명의의 청구서를 위조해 임의 해지 후 예금을 출금하거나 조합원이 요청한 입금액보다 적은 금액만 입금시킨 다음 입금되지 않은 나머지 돈을 횡령하는 수법 등을 사용했다.

농협도 간부와 조합장들이 잇따라 각종 비리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지난 2일 경남 마산중부경찰서는 투자사업과 관련해 특정 업체에 혜택을 주고 공금을 가로챈 혐의 등으로 마산시농협 간부 윤모, 강모, 차모씨 등 3명을 농업협동조합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지난 7월에는 대출청탁 명목으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경남 도내 모 지역 농협 조합장 박모씨가 경찰에 형사입건됐고 지난 1월에는 전국 지역 단위농협에서 수백억원의 대출비리가 포착되기도 했다.

수협은 더하다. '비리백화점'이라 불릴 정도다. 경북 포항수협에서는 수협 대의원과 이사 선거 과정에서 20여명의 수협 임원과 조합원들이 돈 봉투를 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전남 목포수협에서도 지난해 9월 목포수협 조합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 지지를 부탁하며 조합원들에게 수십만~수백만원을 건넨 혐의로 5명의 조합원이 불구속 기소됐다.

제주수협에서는 수협 저장냉동고에서 2000여만원 상당의 갈치와 30여만원 상당의 어업용 면세유 400ℓ가 도난당했는데도 제주수협이 사건 발생 두 달이 지나도록 관련 내용을 수협중앙회에 보고하지 않아 제주해양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했다.

부산수협은 수십만원을 수수하고 오징어 경매대행 수수료를 100여 회에 걸쳐 총 1억원 가량 초과 지급하다 지난 3월 적발됐다.

보험권에서는 설계사가 고객의 보험료를 가로채는 일이 여러 차례 적발됐다. 올해에만 메트라이프생명, 교보생명, 알리안츠생명, 미래에셋생명, 삼성생명, ING생명, 대한생명의 설계사 12명이 보험료 수백만~수억원을 유용했다.

제2금융권도 금융사고 빈발, 탐욕 위험수위
'비리척결' 칼 빼든 금감원, 실효성은 의문

삼성화재, 현대해상, 한화손보, 동부화재, 메리츠화재, 악사손보 등 손해보험사는 자동차사고 피해자의 보험금 수백만~수억원을 주지 않았다가 적발됐다.

저축은행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동양저축은행 직원은 고객 330명의 예금을 멋대로 해지해 146억원을 횡령했고 참저축은행은 대출해준 업체에서 주식 배당금 명목으로 1000만원을 받았다.

신민저축은행은 대주주가 사실상 지배하는 회사에 불법대출을 했고 W저축은행과 HK저축은행은 주거래 회사의 대출이자를 부당하게 깎아줬다.

금융권에서 올해 8월 말까지 비리로 인해 징계를 받은 임직원은 무려 447명으로 임원 95명, 직원 352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징계를 받은 임직원 468명과 비슷한 수치이며, 지난해 같은 기간 222명과 비교해선 2배가 넘는다.

피해액 규모도 2006년 874억원에서 2010년 2736억원으로 급증했다. 2009년 48건이던 은행권 비리는 2010년 57건으로 19% 증가했고 연간 피해액은 291억원에서 1692억원으로 무려 222% 늘었다. 2006년부터 5년간 총 피해액을 보면 은행권이 2579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비은행권 1920억원, 증권사 896억원, 보험사 264억원 순이었다.

이처럼 금융권의 모럴헤저드가 갈수록 심해지자 금융당국이 전방위 대응에 나섰다. 금감원은 가산금리 문제와 차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다음 달 중 개선책을 내놓을 방침이다.

금감원은 보험의 약관대출 가산금리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만들도록 연구용역을 발주했고 은행의 경영실태평가 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치기도 했다. 경영실태평가 6개 항목 가운데 수익성 항목의 배점 비중을 15%에서 10%로 줄였고 경영관리적정성 항목에 '사회적 책임 이행실태'와 '성과보상체계 적정성'을 새로 만들었다.

'사후약방문'
실효성 의문

부유층 회원에게 지나친 혜택을 제공하는 초우량고객(VVIP) 서비스도 모럴헤저드의 소지가 있어 이를 억제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았다. 금감원은 VVIP신용카드 신규발급을 사실상 제한하고 기존 VVIP카드의 수익성도 재검토할 방침이다.

저축은행에는 아예 법을 고쳐 대응키로 했다. 금융위는 대주주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저축은행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겪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대형 비리들이 잇따라 터지고서 나온 처방전이어서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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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