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를 만나다> 한층 더 진화한 배우 조인성

“걱정만 하다 내려놓고 들이댔죠”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배우 조인성의 어깨는 늘 무거웠다. 국내의 창작자들은 조인성의 파트너로 두 명 이상을 붙이려 하지 않았다. 멀티 캐스팅보다는 적은 인원이 나오는 작품이 많았다. 조인성을 부각하는 게 흥행 면에서 효과적이라 판단했던 것 아닐까. 이유를 막론하고 조인성은 작품 내외적으로 늘 현장의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외롭게 홀로 책임져야 할 때도 있었다.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 조인성이 김윤석과 허준호라는 거목에 기대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한다. 신작 <모가디슈>에서다. 

학교 선생님마저 ‘광채’가 나는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거주한 서울 천호동 일대에서 조인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큰 키의 훤칠한 외모, 극강의 매력을 가진 그의 주위에는 늘 그를 흠모하는 여학생들로 붐볐다. 

광채
꽃미남

1998년 의류 브랜드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가 KBS2 <학교3>를 통해 카메라에 얼굴을 비춘 후 조인성 개인의 삶은 턱없이 작아졌다. 이제껏 한국 연예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커다란 몸에 작은 머리를 가진 꽃미남이라는 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디서나 그를 알아봤다.

굵직한 선을 가진 서구적인 인상의 스타들이 사랑받던 시절, 조인성의 등장과 함께 남성미의 기준이 뒤바뀌었다. 

MBC <뉴 논스톱>에 출연해 스타덤에 올랐고, SBS <피아노> <별을 쏘다> 영화 <클래식> 등을 통해 점차 자신의 연기적인 영역을 넓혀갔다. 2004년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을 통해서는 명실상부한 국내 톱스타로 자리매김한다. 


정장 차림에 가방을 처음으로 메고, 구두 대신 스타일리쉬한 단화를 신은 그의 스타일링은 남성 직장인의 로망이 됐다. 당시 조인성의 패션을 맡은 발리는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많은 직장인이 따라 하려 했지만, 조인성 외에는 소화하기 매우 어려운 패션이라, 낭패를 본 남성들이 적지 않았다는 슬픈 뒷이야기도 있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최우수 남자 연기상을 수상한 조인성은 꾸준히 배우로서 진화해 나간다. 이미 광고계의 블루칩으로서 왕자님 이미지의 캐릭터만 택했다면 더 큰 신드롬을 일으켰을 텐데, 그가 바라보는 다음 목적지는 언제나 도전이었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훔치기보다는 특별한 인물에 눈길을 보냈다.

이복 형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해 저항하는 청춘이었던 SBS <봄날>을 비롯해 삭발을 하고 온갖 추잡한 행위를 하면서 두목에게 충성했다가 결국 비수가 꽂히는 영화 <비열한 거리>나, 남자 배우와 농밀한 키스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영화 <쌍화점>까지, 그는 대중이 기대하는 조인성과는 사뭇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군 복무 후, 인간 내면을 그려내는데 가장 섬세한 작가라는 평을 듣는 노희경 작가와 협업한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와 tvN <괜찮아, 사랑이야> 역시 누가 봐도 뻔한 길은 아니었다. 노 작가의 작품이 여타 드라마처럼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력은 점점 더 짙어졌다. 

영화 <모가디슈> 안기부 요원 역
“김윤석·허준호에 기대고 싶었다”

영화 <더 킹>은 그야말로 조인성의 원맨쇼다. 동네 건달에서 정치 검사로 한국 정치권을 쥐락펴락하다가, 막다른 길에 몰려 복수를 감행한 박태수(조인성 분)는 영화 내에서 모든 내레이션을 포함해 95%가 넘는 장면에 등장한다. 배우로서는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값진 모험이었다. 


이어 남주혁, 배성우, 엄태구 등과 함께 고구려를 지킨 장만춘의 삶을 묘사한 <안시성>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성과를 얻었다. 그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

어딘가 건들건들하고 마음을 다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선의 영역에 있고 때로는 정의로운 인물을 주로 연기했다. 어딘가 모르는 까칠함이 있지만,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매우 진한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어쩌면 조인성도 그런 사람이기에 그런 인물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조인성은 이번에는 앞장서는 대신 중간에서 서포트하는 포지션을 택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여러 배우와 호흡을 하는 방향이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모가디슈>에서다. 영화 자체가 큰 모험이자 도전이다.

이역만리 타지인 모로코에서 4개월간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것에 이어 외국에서 외국인들이 벌이는 전쟁을 그린다. 그 사이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남북한 대사관들의 이야기다. 남한 한신성 대사관은 배우 김윤석이, 북한 림용수 대사관은 허준호가 맡았다. 

조인성이 연기한 강대준은 안기부 정보요원으로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안기부에서 좌천돼 소말리아로 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불성실하며, 정의롭게 일을 헤쳐가기보다는 늘 뒤에서 수를 부리며 외교전을 하려는 인물이다. 남한 외교에 힘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작을 벌이는 북한에 대항해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걸 일삼는다. 

늘 불평불만이 많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에는 어김없이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라의 대의보다는 자신의 성과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강자 앞에서는 헤프게 웃고, 약자 앞에서는 싸늘하다. 때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불안한 상황에 놓이면 윽박부터 지르고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남북이 화합하는 순간에서는 희생한다. 꼭 매력적이지 않은 강대준에 조인성은 기어코 매력을 붓는다. 결과적으로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구현한다.

“책임질 게 
 많아졌다”

“인물을 표현하기에 앞서서 상황에 집중했어요. 영화는 내전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텐데요. 그때부터 상황이 달라지죠. 순간순간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몸으로 느껴지는 날것을 표현해내려고 했어요.”

류 감독의 <모가디슈>는 영화계가 주목한 작품이다. 워낙 거대한 자본이 투입된데다 끼 많고 능력 있는 배우가 대거 출연해서다. 앞선 작품인 <군함도>가 비교적 실패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은 후 류 감독이 절치부심하고 만든 작품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정작 시나리오를 본 배우들은 “이걸 어떻게 찍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한다. 

외국에서 시나리오 상황에 맞는 미술을 구현하는 것부터 수많은 외국인이 필요한데 비중이 작지도 않으며, 언어적인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장소도 매우 변화가 많은데 어떻게 다 섭외할 것인지 등 의문부호가 붙었다.

김윤석, 허준호처럼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모가디슈>는 쉽지 않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인성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봤을 때 ‘영화를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연하기도 했죠. 익숙한 동네도 아니고요. 영화를 찍는 것도 찍는 거지만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도 관건이었어요. 현지 적응에 대한 고민도 있었죠. 여러 스태프 덕분에 슬기롭게 헤쳐나갔던 것 같아요. 의문이 많았지만, 류승완과 허준호, 김윤석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가 컸어요. 함께하고 싶었나 봐요. 주저하지 않았어요.”

앞서 <모가디슈> 언론시사회에서 그는 선배 배우들과 작업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선배들로부터 연기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은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4개월간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얻은 것이 적지 않다고 했다. 

“영화라는 작업은 모두가 함께해야 해요. 그간 타이틀롤이 많아서 부담감이 컸는데, 두 거목이 자리를 하고 계셔서 저는 연기에만 집중하면 됐어요. 비교적 심플한 마음이었어요. 앙상블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어요. 의지할 사람이 있다 보니 여유도 생겼고요.”

어느덧
23년

이미 수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 조인성이지만, 선배 배우들의 깊이에 놀라는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현장에서 두 분의 대단함을 많이 느꼈어요. 작품을 바라보는 시점과 해석 면에서 차원이 다른 수준을 느꼈어요. 같이 서 있기만 해도 힘을 느꼈던 것 같아요. 특히 시나리오에는 나오지 않는 빈 곳을 채우는 부분에서는 감탄을 많이 했어요. 앞으로 저도 계속 영화를 할 건데요. 그런 부분에서 저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또 오랜만에 현장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40세가 넘은 조인성은 어느덧 선배 배우가 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모델이 되고 벌써 데뷔 23년이 지났다. 국내를 넘어 아시아가 주목하는 배우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조인성도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스스로 좋은 배우의 덕목을 갖추고 있는지 불안했다고 한다.

김윤석을 붙잡아놓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한참 동안 조인성의 불안을 경청한 김윤석의 대답은 “널 믿어. 응원할게”였다고. 조인성은 이 말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응원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사실 활동하다 보니 어느덧 선배급이 돼버린 거죠.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의문점도 있었고, 앞으로 삶의 방향성에 대한 모호성도 있었어요. ‘잘하고 있나?’라는 질문만 되뇌기도 했고요. 방향이 헷갈릴 때 물어볼 선배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인지는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어찌 됐든 쉽게 꺼내기 힘든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물어봤고, 응원을 받았어요. 앞으로 더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됐던 것 같아요.”

“갈등이 없으면 그게 행복 아닐까요?”
“경험을 통해 진화해 나가고 있어요”

은근히 적지 않은 어록을 생산해냈다. 배우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사회생활의 영역이나 살아가는 부분에 있어서 귀감이 될만한 말을 적지 않게 했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버거왕에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모호한 지점을 깔끔하게 정립하기도 했다.

한때 행복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고 밝힌 그는 최근 여러 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행복이라는 게 관념적인 언어잖아요.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개념이 다를 수 있고요. 저는 행복이란 특별히 갈등이나 힘든 점이 없다면 행복이라 생각해요. 힘든 게 없다는 게 행복이라면, 앞으로 더 행복할 것도 많을 거라 생각해요. 지금 문제가 없다면 모든 것들이 행복일 수 있다는 개념으로요. 오히려 우리가 행복을 좇다 놓치는 보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덧 불혹을 넘긴 조인성도 수많은 인물을 거치면서 내면적으로 성숙해진 듯하다. 누군가 선망하는 스타이기도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터벅터벅 걸어온 인생의 어려운 포인트를 설명해주는 선생님 같은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책임질 것이 많다는 거기도 하죠. 행동에 대한 책임이요.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죠. 여러 예상을 하고요. 예상이 적중하려면 통찰력이 있어야 해요. 통찰력이 있다고 늘 맞는 것도 아니죠. 항상 조심하고 용기가 안 나는 것도 있어요. 용기가 안나다보니까 움츠려들기도 하고요. ‘움츠려드는데 이게 맞는 겁니까?’가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그럼 공감을 해주시더라고요.”

“오히려 선배님들이 더 많이 알아서 더 많이 두려워하시는 것 같기도 했어요. 경험이 많아서요. 저 역시 이번 경험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선배님들을 보면서 확인하는 거죠. 선배님들도 여러 경험을 통해 진화해 온 것처럼요. 앞으로 저도 계속 성장할 계획입니다. 특별히 멋있게 사는 건 없어요. 현실에 충실하는 게 최선이죠. 그러면 나중에 뭐가 되도 되겠죠.”

영화는 매우 매끄럽다. 남녀노소 누가 봐도 엄지를 들 만큼 괜찮은 작품이다. 올로케이션의 가장 좋은 예라는 수식어가 붙을지도 모를 정도다. 수백억의 제작비가 투입됐지만, 영화계의 지원으로 손익분기점은 300만으로 내려갔다. 평소 같으면 첫 주에 넘겨버릴 수치지만, 코로나19 시국인지라 이마저도 어려운 숙제라는 게 현실이다. 

소박한 꿈
현실에 충실

“<모가디슈>라는 이름으로 모인 영화인들이 용기를 한 번 내봤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보다는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은 분들에게 소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공감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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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