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떠나는 신인 작가들의 속사정

“힘겨운 영화판, 미련 없이 떠난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영화의 태초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있다. 좋은 시나리오의 바탕에서 좋은 영화가 탄생한다는 얘기다. 공감 가는 캐릭터와 현실성 있는 사건, 가슴에 와닿는 대사,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은 대부분 시나리오에서 출발한다. 작품의 미덕이 분명한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 있는 작가가 많을수록 이야기 업계가 성장하며, 따라서 새로운 스타 발굴이 필수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좋은 작가가 유입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영화판에 좋은 신인 작가가 없어요.” 한 영화 제작자의 말이다. 영화 <쉬리> 이후 한국 영화계가 몸집을 불릴 때부터 ‘좋은 작가가 없다’는 말은 늘 있었지만, 최근에는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를 찾는 게 정말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0년 전만 하더라도 영화는 대중 예술 콘텐츠 중 가장 명예로운 플랫폼으로 받아들여졌다. 문인들이 시를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로 칭하는 것처럼, 2시간 사이에 이야기를 전달해서다. 또 하나는 관객이 직접 돈을 내고 영화관까지 찾는 수고를 감당하는 콘텐츠라는 것도 가점 요소다.

그 관객의 수가 때로는 1000만명이 넘어갈 때는 매우 큰 수익과 함께 한국 영화사에 남을 명예를 얻는다. 

“열 개 시나리오 중 개봉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시나리오가 아홉 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박성이 짙은 산업이지만, 그만큼 과실이 달고 크기 때문에 영화에 도전한 창작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에 대한 메리트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유튜브와 웹드라마 등 뉴미디어가 활성화될 뿐 아니라 집에서 얼마든지 높은 수준의 작품을 시청할 수 있는 OTT가 대중화되면서 비교적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영화관까지 찾아야 하는 수고가 필요한 영화는 올드미디어로 전락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전부터 한국 영화계는 사양산업의 길로 접어들었다. 52시간 근로제 적용에 예외 산업이었던 영화 산업이 제외됨에 따라 한국 영화계는 막대한 제작비 상승을 겪으면서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간한 ‘2020년도판 한국영화연감’(이하 연감)에 따르면 2019년 3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상업 영화는 총 45편으로, 이 영화에 투입된 총제작비는 약 4559억원이다. 이는 2016년 기준 2956억원(33편)보다 무려 1600억원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2017년에는 3618억원, 2018년에는 4101억원으로, 제작비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영화 매출 규모 상승폭은 그리 크지 않다. 2016년 총매출은 4530억원, 2017년에는 4947억원, 2018년에는 4584억원이다. 일반적으로 4500억원을 전후한 매출을 기록했다.

2019년은 약 5664억원의 총 매출을 기록했다. 이전보다 갑작스럽게 매출이 늘어난 이유는 <극한직업> <기생충> <엑시트> 등 1000만을 넘겼거나 육박한 영화가 세 편이나 된 덕분이다. 

2019년 평균 100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남겼지만, 실제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8편에 해당한다. 이는 27편의 영화는 손실을 봤다는 것을 말한다. 


100억 넣으면 8억 손해 보는 산업
웹소설·드라마로 떠나는 작가들

연감에 따르면 매출액 1위 영화인 <극한직업>을 제외하면, 44편 영화의 평균 수익률은 -8.1%까지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100억원을 투입하면 약 8억원의 손해를 보는 산업이라는 것. 

결과적으로 영화 자체에서 얻어지는 수익이 적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집필료는 더 적을 수밖에 없다. 또 영화는 정산이 매우 늦는 산업이다. 작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일반적으로 신인 작가의 경우 한 작품에 약 2000만원가량의 계약금을 받고 2년에서 3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한다. 온 힘을 다해 시나리오를 썼지만, 캐스팅에 실패하거나 투자를 받지 못해 제작에 돌입하지 못하면 그간의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혹여 시나리오가 영화화돼 흥행에 성공한다고 해도 수익의 약 1%의 수익만 얻는다. 대부분 개봉 후 정산을 마친 다음에 수익금을 얻는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개최한 업계현안인식포럼에서 작가조합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크레딧을 보유하지 못한 작가가 2018년에서 2020년 사이 시나리오 계약을 체결하고 집필한 7건의 집필료 실수령액 평균은 1143만원이다.

영화 시나리오에만 매진하면 연봉 500만원에 그칠 수 있다. 

김병인 작가조합 대표는 “배우나 감독이 수억원의 출연료와 연출료를 받는 것에 비해 작가의 노력은 너무 터무니없이 책정되고 있다”며 “2년 동안 1000만원가량의 집필료를 받는 현실이다 보니 생활고에 지치는 시나리오 작가가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은 제작자가 악의적이어서는 아니다. 영화계가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의 구조를 띠고 있어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영화는 R&D(연구·개발, Reaserch&Develop)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이 개봉까지 가기 너무 어려운 현실에 놓여있다. 

빚을 내서 시나리오를 개발하다 수십억원가량의 빚더미에 오른 제작자들도 수도 없이 많다. 

아울러 제작비 상승으로 리스크가 더욱 커지면서 경제적 책임이 커진 투자사는 이미 능력을 증명한 기성 감독과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 이미 티켓 파워를 증명한 배우가 아니면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빚더미에
놓인 현실


영화계는 사실상 배우나 작가, 감독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는 게 중론이다. 

한 영화 배급사의 본부장은 “2016년만 하더라도 30억원 제작비로 작가주의 색채가 강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제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면 50억원이 넘게 든다. 그럼 200만 관객을 넘겨야 한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작가주의 색감이 강한 영화로 200만 관객을 동원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특별한 열망이 있지 않은 신인 작가들은 영화가 아닌 다른 채널을 찾는 게 요즘 현실이다. 특히 10~20대를 겨냥한 포털사이트 웹소설에 많은 신예 작가가 투입되고 있다. 비록 집필의 강도가 비교할 수 없이 힘들기는 하나 드라마의 경우에는 감독보다 더 작가를 대우해준다.

흥행에 따른 수익도 드라마가 훨씬 좋은 편이다. 

김병인 대표는 “요즘 문예창작과 학생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다 웹소설을 쓴다고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고 했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매월 정산이 되기 때문이다. 웹소설도 대박을 터뜨리면 1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낸다”며 “대부분 작가들도 영화보다도 드라마를 선호한다. 그만큼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역시 작가들이 드라마에 유입되면서 드라마 시장이 훨씬 더 커졌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크레딧 여부다.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적폐 중 하나가 감독들이 작가의 크레딧을 뺏는 사례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영화 <마이웨이>의 원작을 쓴 김병인 작가조합 대표도 강제규 감독과 크레딧 문제로 큰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내가 작가조합 대표를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서는 정의를 운운하면서 뒤에서는 부조리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영화감독들이 너무 많다. 이미 부와 명예를 얻은 자들이 가진 것 없는 작가들의 작은 결실마저 뺏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수많은 작가들이 감독으로부터 크레딧을 뺏기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많은 감독과 제작자들마저 크레딧을 악용한 사례가 정말 많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데뷔 영화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둔 A 감독은 신인 작가의 원고를 뺏어 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고를 뺏긴 작가는 비토하는 심정으로 영화계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은 5고까지 쓴 작가진의 크레딧을 뺏으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당한 요구에 분개한 작가 B는 소송을 준비했으나, 그 과정에서 꼬리를 내린 제작자와 감독으로 인해 별 무리 없이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제작자의
흔한 갑질

익명을 요구한 작가 B는 “당시 그 영화의 감독이 제작자에게 크레딧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으로 안다. 그렇게 되면 작가료와 감독료를 동시에 받을 뿐 아니라, 모든 명예와 스포트라이트가 감독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라며 “그 감독과 재계약하고 싶었던 제작자가 내게 악의적인 요구를 했다. 영화계에서는 흔한 갑질”이라고 토로했다. 

국내에서 명작을 다수 남긴 유명 작가 C는 감독 D와 지겨운 신경전을 벌였다고 토로했다. C에 따르면 D는 영화 개봉까지 원작자인 C와 단 한 번도 회의를 거치지 않았다. 이후 촬영이 끝나고 편집 과정에서 D 감독은 C 작가 몰래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두려고 했다.

개봉을 앞두고 C 작가가 편집 스태프에 확인했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C 작가는 “각본 크레딧에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시나리오에 누가 더 많이 기여했냐는 의미다. D 감독은 시나리오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나온 뒤 대사만 고쳤다. 그럼에도 편집 때 몰래 그의 이름을 앞에 넣으려 한 것”이라며 “내가 그야말로 노발대발을 해서 원래대로 고쳤는데, 개봉 전에 또 바꾸려고 하다가 또 걸렸다. 다시는 그 사람과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작가 조합에서 취합한 사례 87건 중 40%의 작가가 개봉한 영화의 크레딧을 불인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각본에 해당하는 원고를 쓰고도 각색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거나, 각본 크레딧에서도 순서가 후 순위로 밀리는 것이 그 예다. 

김 대표는 “굉장히 많은 작가가 크레딧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지만, 대다수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문제제기조차 안 한 것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뼈대를 구성한 사람이 각본에 이름을 올리고, 대사를 바꾸거나 몇 가지 상황을 고친 사람은 각색에 이름을 올리는 게 불문율이다. 작가 조합의 주장에 제작자들은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배경은 시나리오에 대한 기여도의 해석이 각기 다른 상황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시나리오가 고쳐지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나 대사에 대한 해석이 작가나 감독, 제작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아 크레딧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 제작사 대표는 “과거에는 감독이 작가의 크레딧을 뺏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이를 악용한 제작자도 많았다. 지금도 모두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준계약서가 나온 이후에는 많이 나아지고 있다. 크레딧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감독이 직접 글을 쓰고 연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나홍진, 이준익, 류승완, 한재림, 윤종빈, 이병헌 감독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감독들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도맡는다. 직접 각본을 쓰지 않더라도 파트너 작가를 두고 기획단계부터 함께 시나리오를 개발한다. 

“2년에 1100만원 번 경우도 있어”
“신인에 부와 명예, 기회가 없다” 

신인급 감독들 역시 직접 시나리오를 써야만 데뷔할 기회가 생긴다. 작가와 연출의 기능을 구분하지 않는 점이 한국 영화계의 특수성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김 대표는 “할리우드 영화의 크레딧을 살펴보면 감독이 시나리오 크레딧을 겸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한국은 크레딧상 감독이 시나리오 크레딧을 갖는 경우가 70~80%에 달한다. 연출의 기술과 작법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두 영역을 모두 섭렵한 감독도 자연스레 있는 것이지만, 과연 한국의 감독들만 유독 80%나 되는 감독이 그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업 영화의 경우 화자가 아닌 청자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돼야 한다. 그렇다면 기획개발단계에서 제작자, 작가, 감독 간 치열한 논쟁을 통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작가의 포지션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다. OTT로 대변되는 온라인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똑똑한 전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1년에 제작되는 한국 영화가 약 40편이라고 하면 절반 이상의 작품이 유명 작가나, 직접 시나리오를 쓴 기성 감독의 것이다. 한 감독당 약 3년에 한 번씩 작품을 내놓는다고 해도 120편 중 약 40편 이내의 작품만이 신인 작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이마저도 신인 감독과 경쟁을 해야하는 수준이다. 바늘구멍이나 다름없다. 

신인의 이름으로 부와 명예를 얻기에 너무 높은 장벽이 된 영화계는 신인 작가가 메마른 상황에 이르렀다. 신인 작가가 부나 명예를 노력에 비해 얻기 힘든 영화계에 굳이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영화계가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제작과 유통 등 모든 부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영화계가 다시 성장을 도모하려면 새로운 이야기와 스타가 발굴돼야 하는데, 현시점에서는 위기에 대한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신인 작가가 많다는 것은 스포츠 선수로 치면 기초체력이 좋다는 얘기다. 체력이 좋아야 기술도 좋아지는 법인데, 한국 영화계는 기초체력이 계속해서 약화되고 있다”며 “OTT의 힘이 세지는 악조건 속에서 한국 영화계의 미래는 너무 어두워 보인다”고 우려했다.

허약해진
기초체력

한 영화 감독 역시 “실제로 영화를 두고 감독의 예술로 칭하다 보니, 작가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이야기를 쓰는 좋은 작가가 적어지면서 한국 영화계를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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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머드급 국방정보본부 ‘5공 보안사’ 오버랩, 왜?

매머드급 국방정보본부 ‘5공 보안사’ 오버랩,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군 정보기관 개혁안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기한은 2027년까지다. 방첩사 해체 및 정보사 인간정보부대를 국방정보본부 직속으로 둔다는 게 골자다. 군 안팎에서는 우려가 쏟아진다. 국방정보본부에 여러 권한이 쏠리면 과거 ‘전두환 보안사’처럼 통제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조직에 여러 권한이 집중되면 장단점이 확실하다. 관리하기 쉽지만 수장의 역량이 부족하면 컨트롤하기 어렵다. 군 정보기관은 더욱 그렇다. 인간정보 부대(HUMINT·휴민트)의 경우 전문가가 극소수다. 특히 전문가 대다수가 12·3 내란에 연루돼 개혁에 동참할 수 없는 형국이다. 2027년까지 조직 개편 우리 군에는 각종 정보와 첩보 수집을 담당하는 군 정보기관이 존재한다. 대북 업무만을 담당하는 국군정보사령부, 777사령부와 국내 간첩 및 군사보안에 초점을 둔 국군방첩사령부로 나뉜다. 정보사와 777은 국방정보본부가 총괄 지휘한다. 정보기관 특성상 자세한 조직 현황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간 군 정보기관은 역할을 나눠 견제와 균형을 잡아왔다. 이들 기관은 12·3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정치인 체포조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투입 등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과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각각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일부 실행했다. 이재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군 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약속했다. 방첩사 장성 7명은 모두 직무에서 배제됐고, 현재 참모장 대리 겸 사령관 직무대행은 육군사관학교가 아닌 학사장교 출신의 편무삼 육군 준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직무정지·분리 파견됐던 임삼묵 2처장(공군 준장) 등 장군 4명이 각 군으로 원대 복귀했다. 나머지 3명은 정성우 방첩사 1처장, 국방부 방첩부대장, 육군본부 방첩부대장 등이다. 방첩 업무는 방첩사에 두고 수사 기능은 국방부 조사본부로, 보안 기능은 국방정보본부 및 각 군으로 이관하는 방안 등이 확정됐다. 이는 정치 개입·민간 사찰로 누적된 군에 대한 불신을 불식하고 정보기관을 본연의 임무로 복귀시킨다는 취지지만, 대공·방첩 기능 약화로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거세다. 방첩은 말 그대로 간첩 활동을 막는 걸 일컫는다. 방첩 자체가 정보·보안 수집과 수사를 통해 이뤄진다. 실제로 정보·보안 업무를 이관받는 국방정보본부의 경우 예하 정보사의 블랙 요원 명단 유출 등 기밀 유출 사고를 막지 못했다. 국회는 7년간 외부감사가 없었던 정보사에 대해 올해부터 방첩사가 들여다보도록 했다. 수사권도 문제다. 군사경찰 최상위 조직인 국방부 조사본부도 내란 당시 정치인 체포조 편성·운영 등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한 조직에 보안·신원조사·첩보 수집 통째로 해체 수순 방첩사 군 인사 통제는 누가 하나 명확한 규정 없이 광범위한 범죄 정보 수집 활동을 벌여오면서 수사 전문성을 의심받아 온 조사본부에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 내란·외환·반란·이적죄 등 10대 안보 관련 수사권을 넘기면 컨트롤하기 어려운 권력기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방첩사 기능 폐지로 군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방첩사는 국방부 장관 직할부대로서 각 부대의 부조리 조사 및 감찰, 지휘관의 특이 동향 점검, 대령급 이상 인사 검증 등을 통해 군을 견제해 왔다. 국방부는 올해 1단계로 내란 극복·미래 국방 설계를 위한 민·관·군 합동특별위원회 내 군 방첩·보안 재설계 분과위원회(분과위원장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를 구성해 조직·기능 재설계 등 합리적 개편 방안을 도출할 예정이다. 내년엔 2단계로 방첩사 개편을 위한 법령·규칙 개정, 시설 재배치, 예산 조정 등 후속 조치 사항을 이행하고 개편을 완료할 방침이다. 또 국방정보본부장의 합참정보본부장 겸직을 해제하고 정보사령부에서 휴민트 부대를 분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방정보본부령 일부 개정안을 지난달 27일 입법 예고했다. 국방부는 “정보사령부를 포함한 국방정보 조직 전반의 지휘·부대 구조를 최적화해 임무·기능 수행에 전문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며 개정 이유를 밝혔다. 개정안은 국방정보본부의 업무와 관련해 ‘합동참모본부 등의 예산 편성 및 조정(1조 2항 7호)’을 삭제함으로써 합참과의 직접적 업무 연결을 차단했다. 반면 군사보안 외에 암호정책(동항 8호)과 군사 관련 지리공간정보 외에 국방기상정보(동항 제11호), 군사정보 외에 군사보안(동항 12호)을 추가했다. 군사보안 업무가 신설된 것은 국군방첩사령부 개편에 대비한 사전 조치로 풀이된다. 어디까지? 초월적 권한 개정안은 국방정보본부장의 직무와 관련해 ‘군사정보·전략정보 업무에 관해 합동참모의장 보좌’(3조 2항)를 삭제해 합참정보본부장 겸직을 해제했다. 개정안은 정보본부 예하부대 중 정보사령부 업무와 관련해 기존의 ‘군사 관련 영상·지리 공간·인간·기술·계측·기호 등의 정보’ 등(4조 2항 1호) 규정 중 ‘영상’과 ‘인간’을 삭제했다. 대신 동항 4호에 ‘군사 관련 인간정보 수집·지원 및 훈련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기 위한 인간정보 부대’ 규정을 신설했다. 이른바 블랙 요원이나 특임대(HID) 같은 인간정보 부대를 정보사에서 분리해 정보본부 예하에 재배치했다. 이에 따라 정보본부 예하에는 기존 정보사와 777사령부(신호정보 담당) 외에 인간정보 부대가 추가된다. 방첩사는 지난 8월 조직 와해를 막기 위해 전담팀을 꾸렸다. 정치권에 따르면 방첩사는 같은 달부터 ‘부대개혁 TF’라는 전담팀을 꾸리고 간부들에게 비공개 지침을 하달했다. ‘글로벌 안보 위협’을 이유로 들어 “주변 고위급 지인 등 인맥을 통해 부대 존치 논리나 순기능 역할에 대해 전파해 협조나 지원을 이끌어내라”는 내용이다. 국정기획위원회의 방첩사 폐지 방침을 두고 “국방부·대통령실·국회 측도 방첩 역량 약화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주장도 담겼다. 한 군 관계자는 “지금 방첩사가 내부 갈등이 심하다. 개혁해야 하는 것에 동의는 하는데 방첩사 폐지로 방첩 기능이 약화되는 걸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부대가 없어져도 기능 자체가 이관되기에 문제될 게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북 정보망 복구가 중요 정보사에서도 최근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 따르면 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정보사 100여단 소속 일부 인원들이 지난달 21일 오전 안양에 위치한 정보사령부 건물로 출동했다. 사령부에서 인간정보 부대 관련 업무를 담당·지원하는 관련 부서들의 사무용품, 책상, 의자, 서류 등을 포장해 100여단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다. 사무용품 등의 이전은 당일 낮 12시께 중단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박선원 의원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전 중단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이후 100여단 소속 인원들은 부대로 복귀했다. 다만, 중단 지시 전 옮겨진 인간정보 부대 관련 부서의 서류와 물품들은 100여단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국방부는 군 정보기관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지난달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내년 1월1일부터 인간정보부대를 정보사에서 분리해 국방정보본부 예하 부대로 전속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사가 100여단을 움직여 인간정보 부대가 국방정보본부 소속으로 개편되기 석 달 전, 국방부와 정보사 지휘부에 보고도 없이 사령부 건물을 방문한 것이다. 정보사령관 직무대리는 지난달 26일 “상급부대에서 (인간정보부대 개편 내용을 담은) 법적 근거를 마련할 때까지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사령부가 추진한 사항을 잠정 중단하라”는 취지의 공문을 하달했다. 지난 9월18일 정보사 100여단 부대 강당에서는 국방정보본부 산하 인간정보 부대 개편을 위한 내부 설명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100여단장은 해당 간담회를 주재하며 부대원들에게 “간담회에서 나눈 이야기나 부대의 사정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라”며 입단속을 강조했다. 앞으로 국방정보본부가 갖게 되는 권한은 막대하다. 현행 구조에서 국방정보본부장은 정보사·777, 합참 정보부를 총괄한다. 여기에 더해 정보사의 휴민트 기능을 직접 통제하고 보안·신원조사를 추가하면, 누구도 견제하기 힘든 조직이 탄생한다. “대북공작 휴민트가 장관 직속? 전례 없어” “조직 수장 역량에 따라 괴물 집단 될 수도”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휴민트 임무 특성상 비밀·독립성이 가장 중요하다. 이걸 국방정보본부장 예하로 두겠다는 건 관리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윤석열과 같은 인간에게 넘어간다면 굉장히 위험한 조직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관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군 전문가도 “전문성이 없는 민간 부처가 공작 임무를 직접 운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보사 휴민트 조직은 국정원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공작을 기획한다. 국정원이 예산도 관리해 관리·감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며 “이번 개혁안이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지만 휴민트를 국방정보본부 예하로 두는 건 도박”이라고 비판했다. 박 의원도 지난달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휴민트 부대의 본질은 숨기고 또 숨겨야 하는 특수공작 조직”이라면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국방 장관 직속으로 인간정보 공작부대를 두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부승찬 의원 역시 “전시 연합사령관 지시를 받는 부대도 아니고, 평시 합참 지휘체계에도 없는 부대”라면서 “작전 지휘체계나 통제체계에 들어가 있지 않은 부대인데, 이를 국방정보본부에 넣는 건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이 같은 지적에도 국방부는 국방정보본부령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했다. 기존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선 정보부대 개편을 2026년 내 마무리하겠다고 했었는데, 이번 개정령안은 내년 1월1일 시행으로 못 박았다. 이에 민주당 황명선 의원은 종합감사에서 인간정보부대의 국방정보본부 편입에 우려를 표했다. 황 의원은 “장관도 동의하지 않는 이런 개정안을 누가 냈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안 장관은 “글자 그대로 입법 예고이니 의원들께서 의견을 주시면 최적화하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국방정보본부와 국방부 기획조정실(조직관리담당관)은 다른 분위기다. 한 국방부 관계자는 “장관과 국방정보본부 간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정보 계통 군인들은 오히려 현 입법안을 두고 안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개혁 반대 움직임도 황 의원이 민·관·군 합동 특별자문위원회의 ‘방첩·보안 재설계 분과’가 합리적인 안을 만들어낼 때까지 입법 예고를 보류해달라고 하자 안 장관도 “알겠다”고 답했다. 안 장관은 “휴민트 조직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부대에 대해서는 가급적 말을 절약해주는 것이 휴민트 부대를 살리는 길이고 부대 가치를 존중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