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 이력서> (12·13) 더덕, 도라지

'해독에 좋고 천식에 도움'

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더덕

신한국당 연수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일이다. 강원도 인제가 고향인 동료 직원이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더덕으로 담근 술을 선물했다.

물론 은근슬쩍 한마디 덧붙였다. ‘거시기에 끝내준다’고.

더덕

거시기에 끝내준다는 말에 혹해서 그 친구가 돌아가자마자 뚜껑을 열고는 급하게 한잔 들이켰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독하기도 하지만 그 냄새가 마치 카바이트 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카바이트 향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오래전에 포장마차를 방문하면 종종 접하고는 했는데 상당히 불쾌하고 사람이 죽기 일보 직전 몸에서 풍겨나오는 그 냄새와 아주 흡사했다.

그런 연유로 거시기를 떠나 그 술을 하수구에 버렸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흐르자 그 친구 남의 속사정은 모르고 슬그머니 다가와 더덕 술 복용 효과에 대해 물어온다.

차마 하수구에 버렸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냥 눈을 찡긋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후일 지방 출신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면서 예의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 친구가 한마디 한다.


“이 친구야, 그게 바로 더덕향이야. 그리고 그 정도 냄새 날 정도면 거의 산삼 수준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거야.”

더덕 향기를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저 아쉬움에 씁쓸하게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 더덕이 향약집성방에는 가덕(加德)이라 표기돼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더할 가’이니 ‘더’라 읽어야 하고 덕은 ‘덕’이라 읽어야 하니 더덕이 이두식 표기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그를 위해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에 실려 잇는 글 중 일부 인용한다.

山菜以爲沙參 山菜方言曰多德,【多音더】 蔓生根可茹

산채는 사삼인데 방언은 다덕(多德)으로 불린다.

多의 음은 ‘더’로 덩굴과 생뿌리는 식용할 수 있다. 

정약용의 변을 빌면 더덕의 한자명은 沙參(사삼)이다.

그 사삼의 우리 명칭이 바로 더덕이라는 의미다. 이로써 더덕이란 명칭에 대한 궁금증이 한 번에 해결된다. 

이제 중국 송나라 시대의 문신인 서긍의 ‘고려도경’에 실려 있는 기록을 살펴본다.

고려의 더덕은 관(館) 안에서 날마다 올리는 나물 가운데 있는데, 형체가 크고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다.


약용(藥用)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이 무엇을 의미할까.

더덕이 중국에서는 약으로 쓰이는데 고려에는 너무 흔해 평소 식품으로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이후 조선조에서는 더덕이 식용뿐 아니라 약용된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밝힌다. 

특히 동의보감을 살피면 더덕에 대해 산정(疝疔)과 분돈(奔豚)에 그만이라 했다.

산정은 아랫배가 아파서 대소변을 못 보는 것을 이르고 분돈은 아랫배서 생긴 통증이 명치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마치 새끼돼지가 뛰어다니는 듯한 증상을 의미한다.


이는 더덕이 복통에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복통에 탁월한 효능… 동의보감에도 실려
흰머리를 검게 하는 도라지, 사포닌 듬뿍

도라지

필자가 어린 시절 자주 접했던 ‘도라지 타령’ 소개해보자.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광우리에 철철 넘누나
(후렴)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어여라 난다 지화자자 좋다
네가 내 간장 스리살짝 다 녹인다

상기 도라지 타령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경기) 지방에 유행했는데, 도라지 타령은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불리고 있다.

이는 도라지가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식물이었음을 입증하는데 상기 노래에서 결론 즉 후렴의 마지막 가사가 일품이다. 

네가 내 간장 스리살짝 다 녹인다

‘간장을 녹이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는 의미인데 도라지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도라지 ⓒ신세계백화점

즉 하얗고 곧게 뻗은 도라지 뿌리는 사람의 하반신을 연상시킨 데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남자에게는 여자의 하반신으로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자의 하반신으로 말이다.

여하튼 도라지는 한문으로 桔梗(길경)이라 기록하는데 그 사연을 풀어보자.

아니 桔梗서 나무 목(木)을 제외한 吉更만을 놓고 보자.

吉은 ‘상서롭다’라는 그리고 更은 ‘고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도라지는 상서롭고 무엇인가를 개선하는 식물이라는 이야기다.

정말 그런지 과거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자. 

오래전 설날에 마시던 술 중에 도소주(屠蘇酒)라고 있다.

이는 약주의 한 종류로 설날에 괴질(怪疾)과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장수하기 위해 마시던 술인데 이 술이 도라지로 빚었다.

그러니 상서롭다는 의미는 성립된다. 

그렇다면 ‘고치다’라는 의미도 성립될까.

이에 대한 답은 확고하게 '물론‘이다.

과거 여러 문헌서 약으로 사용된 흔적이 나타난다.

심지어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따르면 ‘대변이 막힌 데에는 도라지를 기름에 담갔다가 항문에 꽂으면 즉시 변을 볼 수 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을 정도니 고치는 데에 관한한 언급이 필요치 않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 송강 정철의 손자인 정호(鄭澔, 1648∼1736)의 작품 감상해본다.

州倅遺以白花桔梗數三莖云。啗之。能令白髮還黑云。戲吟。
사또가 백도라지 세 뿌리 보내주면서 말하기를, 먹으면 하얀 머리가 검게 변한다고 하기에, 재미 삼아 읊다.
 
使君遺我草三莖(사군견아초삼경) 
사또가 내게 도라지 세 뿌리 보내주었는데
却老神方不翅靈(각로신방불시령)   
정신은 물론 늙음 없애는 처방 지니고 있다네  
頭上素絲猶堪黑(두상소사유감흑) 
머리 위 하얀 실 오히려 검게 변하게 하고
難醫澤畔槁枯形(난의택반고고형) 
고치기 어려운 택반의 초췌함 고칠 수 있다네 

*澤畔槁枯(택반고고) : 굴원이 조정의 권세가들에게 미움을 받아 좌천당해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렸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이 고고했다고 한다.

정호에게 도라지를 보내준 인물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빌면 도라지가 흰머리를 검게 하는 등 시 내용처럼 실로 무궁무진하다.

물론 정호의 농이 다분히 섞여있지만 고치는 데에는 고래로부터 명성을 구가했던 모양이다.

이제 도라지 효능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도라지는 모습도 인삼과 흡사하지만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 역시 지니고 있다.

사포닌은 혈관을 확장해 혈압을 낮추고, 체내 혈당을 낮춰주고 콜레스테롤까지 저하시키며 환절기에 자주 걸리는 호흡기 질환의 증상인 가래를 삭이기도 하는데 도라지의 쓴 맛을 내는 사포닌 때문이다. 

또 비타민과 무기질 등이 함유돼있어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데에도 좋고 폐를 맑게 해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줘 스트레스 완화에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한다. 

이 도라지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어 소개해본다.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 시절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공조참의였던 이계기가 그를 축하하며 바친 글 중에 나오는 대목이다. 

桔梗充飢美(길경충기미)
도라지는 주림을 채우는 아름다움이 있네

연산군에게 백성들이 굶주림에 처하지 않도록 농업에 특히 도라지 농사에 주력해달라는 의미다.

그런데 보위에 오른 연산군은 상서롭고 개선의 의미를 지닌 도라지의 본성을 역으로, 즉 파괴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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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